반복되는 휴직과 복직

나는 네아이 엄마이자 공무원입니다.

by 이송이

스무 살 무렵,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참 많았다.

영어 선생님도, 작가도, 여행가이드도 되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공무원이라는 안정적인 직업에 마음이 끌렸다. 그렇게 시험을 준비했고, 합격 통보를 받고 첫 발령지를 받은 곳은 바로 ‘면사무소’였다.


시청에서 발령장을 받고, 사송 주무관님이 직접 면사무소까지 데려다주셨다. 마침 점심 시간이 되어 인사를 드리자마자 직원들과 함께 마을회관으로 향했고, 어르신들 앞에서 “신규 직원입니다”라고 인사하자마자 날아온 첫 질문은 이랬다.


“개 먹을 줄 아나? 개 못 먹으면 닭 줄까?”


전라도 촌에서만 살다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도착한 곳이 경기도 도시였다. 나는 도시 사람이 된 줄 알았는데, 곧 알게 됐다. 경기도라고 다 도시는 아니라는 것을.



몇 년 후, 나는 면사무소에서 시청 본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작은 동네에서 큰 건물로 옮긴 것만으로도 마음이 벅찼다. 동기들은 이미 승진을 하고 있었고, 나도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인사 고충을 털어놓고, 간신히 본청으로 옮겼다.


처음 맡은 일은 청 직원 천여 명의 급여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첫 달엔 숫자가 맞지 않아 밤을 새우기도 했지만, 새로운 일에 대한 열정도 느껴졌다. 그런데 어느 날,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첫아이를 가진 것이었다.


입덧이 너무 심해 출근은커녕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힘들었다. 8급 승진을 앞둔 시점이었으나, 승진은 당연히 다음 기회로 미뤄야 했고, 그렇게 첫 육아휴직이 시작되었다.


첫아이가 돌이 되자 복직했고, 다시 적응해가던 중 두 번째 아이가 찾아왔다. 둘째도 돌이 되면 복귀할 계획이었는데, 젖을 떼기도 전에 또다시 울렁거림이 찾아왔다. 혹시나 하고 병원을 찾았더니, 정말 셋째였다. 둘째 모유수유 중이어서 희박한 임신가능성를 뚫고 찾아온 아이였다.



셋째가 돌 무렵, 복직했다. 오랜만에 사회인으로 사는 기분은 좋았다.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사실이 기쁘고 감사했다. 교통정책과에서 주차위반 과태료 부과 업무를 맡았는데, 하루에도 수십 통씩 전화를 받으며 욕을 먹었다. 고된 일이었지만, 어쩌면 그 시간을 통해 나는 강해졌는지도 모른다.


얼마 뒤 민원실로 자리를 옮겼다. 토지대장이나 지적도 같은 서류를 발급해주는 일이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듣는 일이 많아졌다. 그 한마디가 그렇게 따뜻할 줄은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변화는, 나에게 아주 큰 선물이었다.




7급 승진을 앞두고 있었고 , 아이 셋을 키우면서도 일과 육아를 병행해냈다는 자부심도 생겼다. 내 인생의 궤도가 안정되어가는 듯했다. 그런데, 또다시 속이 메슥거렸다. 짬뽕이 미치도록 먹고 싶고, 구내식당 밥은 도무지 삼켜지지 않았다. 설마, 아니겠지. 그런데... 넷째였다.


출근길에 임신테스트기를 들고 병원으로 향했던 날. 진료실에서 “임신입니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모든 게 멈춘 것 같았다. 곧장 육아휴직을 신청했고, 그렇게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로 어느덧 5년. 아이는 넷이 되었고, 코로나까지 겹쳐 학교도, 어린이집도 가지 못했던 시간. 하루 세끼를 지으며 큰아이의 온라인 수업을 챙기고, 막내 기저귀를 갈며 중간 아이의 받아쓰기를 봐주었다. 그 시간을 버텼다는 것만으로도 참 대견하다 싶다.



이제 큰아이는 초등학교 5학년, 막내는 다섯 살이 된다.

그리고 나는 다시, 복직을 앞두고 있다.


복직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두렵기도 하고, 내가 다시 그 자리에 어울릴 수 있을까 걱정도 된다. 하지만 이젠 육아휴직이 더는 ‘휴식’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다시 일하러 나가고 싶은 마음이 크다.


지금 나는, 복직을 준비하며 미뤄두었던 나의 삶을 조금씩 되찾고 있다. 아이들 틈에서 잊고 있었던 나의 이름, 나의 자리, 나의 가능성을.


이제는 엄마이기만 한 내가 아니라, 온전한 나로 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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