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일훈 Jul 23. 2024

연극 『웃으며 안녕』 '김태평' 인물 전후사


* 연극 『웃으며 안녕』의 '김태평' 역을 준비하면서, 배역 몰입을 위해 작성한 인물 전후사입니다.



전사


현관 앞에서 비닐봉지를 한가득 채운 석류를 바라봤다. 아내는 석류를 참 좋아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퇴근길 석류 한 번 사 들고 온 적이 없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정말 해 준 게 아무것도 없구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니 이제 와 생색이라도 내려는 건가. 한심하고 창피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내가 속으로 비아냥거리진 않을까. 이제 와 무슨 소용이냐며 핀잔을 주진 않을까. 나는 집 앞에 우두커니 선 채 현관문 손잡이만 바라보았다. 복도 끝이 한없이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떨리는 손을 겨우 붙들고 현관문 손잡이를 비틀었다. 깜깜한 거실 너머 문틈을 비집고 나오는 빛을 향했다. 방문을 열자, 아내는 힘겨운 몸을 겨우 일으키며 날 올려다보았다. 아내는 비닐봉지에 무엇이 들었냐며 물었다. 석류라고 했다.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미소 짓더니 석류가 먹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내의 미소는 나비가 되어 날았다. 죽음이 드리워진 공간이 잠시나마 생기를 되찾는 순간이었다. 그랬다. 아내는 40년 넘는 세월 동안 언제나 다정했고 따듯했다. 막무가내로 개업한 식당 운영이 힘들어지자, 운명으로 여겼던 교사직마저 내려놓고 손을 내민 아내였다. 내가 파도에 휩쓸리고 표류할 때마다 닻이 되어준 사람이었다.


아내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아내의 부재를 상상하는 것조차 한없이 버거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태연한 척 웃어넘기는 게 전부였다. 그런 나의 속마음을 알아챘던 걸까? 아내는 혼자서 장례를 준비하고 싶다고 했다. 난 만류했지만, 날 바라보던 그녀의 눈동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 죽음만큼은 온전한 나로서 받아들이고 싶어요.'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대학 시절부터 부부로 함께한 세월 동안, 아내는 오로지 가족과 제자들에게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마지막 순간만큼은 오롯이 아내 자신만의 삶이었으면 했다.


'해밀 상조'. 책자를 살피던 아내는 해밀이란 이름이 마음에 든다며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어리둥절 서 있던 나에게 해밀의 의미를 알려 주었다. '비가 온 뒤 맑게 갠 하늘'. 지금은 비록 힘들지만 곧 괜찮아질 거란 의미였을 테다. 지금의 슬픔을 훌훌 털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란 의미였을 테다. 그러나 나에게 맑았던 날들은 오직 아내와 함께한 순간들뿐이었다.


아내는 직접 상조에 방문하여 장례 방식을 정하길 원했다. 아내 혼자 먼 거리를 이동할 순 없었기에, 난 상조 앞까지만 동행하고 차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시간이 흘러 방문일이 되었다. 아내를 차에 태우고 운전대를 잡았다. 도로 위에서 그녀와의 지난날들을 묵묵히 곱씹었다. 그녀는 항상 날 사랑으로 대했지만, 내가 사랑을 준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 흔한 '사랑해'라는 한마디 말조차 남사스럽다는 이유로 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꼭 전하고 싶은 말이었지만, 너무 속 보이진 않을까 하는 조바심에 주저하고 말았다. 나는 눈가를 비집고 나오려는 눈물을 삼키려 연신 헛기침을 했다.


아내에게 난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녀는 나와의 삶이 행복했을까? 생각을 거듭해 봐도 밀려드는 건 후회와 죄책감뿐이었다. 나는 운전하는 내내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아내를 바라볼 수 없었다. 고통스러운 침묵 끝에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내는 차 문을 여는가 싶더니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보.”

고개를 들 수 없었던 나는 반대편 창밖을 보며 대답했다.

“응?”

아내는 내 눈길을 기다리는 듯하다가 넌지시 말을 이었다.

“나 누구보다 큰 사랑 받고 가요. 여보, 정말 고마웠어요.” 




대본




후사


딸은 약속이라도 한 듯 아내가 묻힌 날 출산했다. 아내의 제자가 아내의 새로운 터전이 될 치자나무를 보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년생 생물이네요." 맞는 말이다. 나뭇잎이 떨어진다 한들 나무가 죽었다 할까. 잎사귀 떨어진 빈자리엔 새로운 싹이 피어나 삶을 찬양할 것이다. 나무는 이 모든 것을 영원에 기록할 것이다. 아내도 이처럼 영원의 일부가 되고, 나 또한 언젠가 그리할 것이다. 아내가 웃으며 떠날 수 있었던 건, 필시 우리가 다시 만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년 아내의 기일이 되면 석류를 두 손 가득 들고 봉안당을 방문한다. 손주도 이제 제법 커서 할머니가 묻힌 나무를 곧잘 알아본다. 치자나무 꽃향기와 풀 내음이 한데 어우러진 게, 꼭 아내가 떠난 날과 같다. 아들은 나무 주변을 정리하고 딸은 석류를 정성스레 썰어 아내 앞에 내려놓는다. 손주는 할머니 명패를 찾느라 여념이 없다. 나는 그동안 노을 끝에 걸린 아내의 미소를 찾는다. 언젠가 다시 보게 될 아내의 미소를 찾는다.

작가의 이전글 연극 『파우스트 엔딩』 온라인 관람 감상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