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만언니 Dec 01. 2019

1. 십 년이 지나, 죽기로 결심했다

기억력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닌데, 이상하게도 생의 몇몇 장면들은 사진을 찍어 놓은 것처럼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날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학원을 마치고 집에 갔는데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이상했다. 주방에 불이 켜져 있었고 도마 위가 어질러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저녁을 준비하던 엄마가 칼을 내려놓고 어딘가로 사라진 것이었다. 왠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막내 외삼촌이었다.


"어떡하니... 글쎄 네 아버지가..."

"왜요? 죽었어요?"

그다음은 생각 안 난다.

다음 장면이다.

또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홍은동 아줌마야. 발인이 언제라니?"

"발인이 뭐예요?"

"아 그게... 음... 주변에 어른 안 계시니?"

"저도 어른인데요"


나중에 알았다. 발인이라는  장례가 끝난  시체가 영안실에서 화장터나 묘지로 운구되는 날이라는 . 그때 홍은동 아줌마는 지금  아버지를 잃은 친구 딸에게, 차마  말을   없었겠지.  후로 나는 살면서 숱하게 많은 상갓집을  봤지만, 이날 우리 집만큼 비통했던 상갓집을   없다.


아무튼 우리는 어찌어찌 상을 치르고 벽제에서 아버지를 화장한 후, 다시 작은 항아리에 옮겨 담아 근처에 있는 납골당에 안치하고 집으로 왔다. 돌아오는 장례 버스에서 나와 작은 오빠가 앞자리에 앉았는데, 봄날 햇볕이 유난히 좋았던 기억이 있다. 집에 오는 길에 우리는 더러 졸기도 했고, 가끔은 소리 내지 않고 웃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이상하긴 했다.


'어? 아빠가 그렇게 슬프게 죽었는데 어떻게 우리가 이럴 수 있지?' 근데 희한한 건, 이날 이후의 생은 계속 이랬다. 슬픈데 웃겼고, 웃긴데 슬펐다.


아버지는 분명 내게 좋은 사람이었지만, 본래 상처가 깊은 사람이었다. 한평생 생모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극복하지 못해 힘들어했다. 게다가 할아버지는 이런 아버지와는 아주 다르게 거칠고 급한 성정을 지닌 분이셨다. 덕분에 아버지는 자식을 셋이나 두고도 명절날 밥상머리에 앉아 할아버지에게 노상 꾸중을 들었는데 그 얘기는 대부분 "사내 새끼가 못나 가지고"로 시작하는 얘기였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할아버지는 부자였다. 80년대 초반까지 시골집 행랑에 머슴이 살 정도였다. 할아버지는 남자라면 자고로 해가 뜨면 밖으로 나가 돌멩이라도 하나 주워와야 한다는 신념으로 일평생을 사신 분이셨다. 그런 할아버지 눈에 골방에 틀어박혀 두문불출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아버지가 성에 찰 리 없었다.


그 후 아버지는 어찌어찌 친척의 소개로 옆 동네에 살던 엄마와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서울에 와 집도 얻고, 가게도 차리고 했지만, 하는 일이 전부 신통치 않았다. 그러다 막판에 전 재산을 걸고 배팅을 했는데, 그게 완전히 잘못돼 버렸다. 믿고 지내던 후배에게 사기를 당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아버지는 심한 충격에 빠졌고, 결국 나쁜 선택을 했던 거다.


나는 한동안 아버지의 죽음이 아팠다. 죽기 전날까지 아버지가 그만큼 힘들어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 일이 있기 바로 전, 아빠가 내 방문을 열었을 때, 지금은 대체 왜 그랬는지 기억도 안 나는 이유로 나는 아버지와 말을 하고 싶지 않아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리고 자는 척을 했다. 그날이 마지막이 될 거라고는 차마 상상도 못 했다.


훗날 이 일은 오랜 세월 지독히도 나를 괴롭혔다. 내가 미처 몰랐던 아버지의 고통을 생각하며, 어린 나이에 나는 불행이라는 게 무서울 정도로 개별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의 나는 아버지의 죽음과  삶이 분리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보편적이지 않은 아버지의 죽음은 동네에 금세 퍼졌고, 어쩌다 우리 가족을  사람들은 목소리를 낮추어 수군댔다. 그들이 선의로 그랬든 악의로 그랬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싫었다.


생각했다. 가족을 잃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슬픈데, 어째서 사람들의 시선까지 신경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그 후로 나는 이 일에 대해 더더욱 입을 닫았고, 이후에 만난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공식 사인을 '심장마비'라고 했다. 한데 같은 해, 나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학습하게 된 생의 허무를 공교롭게도 삼풍사고를 통해 마스터하게 되었다. 한순간에 아무런 맥락도 이유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고 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의 죽음에는 예고는 고사하고 납득 가능한 서사조차 없었다. 마치 한 여름 하루살이 한 무리가 살충제 한 방에 후두두둑 떨어지듯 사람이 죽었고, 나는 이 사실을 오래도록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후로 나는 꽤 오래 살아가는 일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생의 모든 일들이 그 거대한 죽음 앞에선 전부 하찮게 여겨질 뿐이었다.


오히려 사고 직후는 괜찮았다. 어려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뉴스에서 종일 내 이름이 나오는 것도 신기했고 내가 티비에서만 보던 환자복을 입고 있다는 것마저 신기했다. 그래서 당시에 나는 병문안을 온 친구들에게 사고 직후 내가 어떻게 살아 나왔는지 재연하며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건물의 잔해더미에 얻어맞아 뒤통수가 깨지고 오만데 크고 작은 외상을 입긴 했지만 그때는 그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뭔가 엄청난 일을 해낸 것 같았다. 해서 매일 밤 붕괴 직전 아무도 없는 백화점을 혼자 걷고 있는 꿈을 꾼다거나 대낮에도 얼굴 없는 귀신에게 가위눌린다거나 하는 일 같은 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무리 무서워도 꿈은 꿈이라 죽음에 비할 바 못 됐기 때문이었다.


이 병이, 훗날 제대로 발현됐다. 사고 후 십 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어느 날 아침에 나는 문득 '더는 이렇게 살기 싫다'라고 생각했다. 뭐라고 해야 하지, 나이 서른을 넘기자, 20대의 막연하던 미래가 어느 정도 정리되고 앞으로 남은 생, 그냥 이런 식으로 살다 죽겠구나 하는 예감이 들자, 모르겠다. 그냥 갑자기 살기 싫었다. 내가 그 상황을 더욱 견딜 수 없었던 건, 내 영혼은 이렇게 갈기갈기 찢어지는데, 이걸 세상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덕분에 나는 매일 밤 홀로 고통 속에 몸부림쳤다.


결국 나는 2006년에 자살 기도를 했다. 마침 우연히 집 근처를 지나던 작은 오빠가 집에 잠깐 들른 바람에 발견되어 바로 병원으로 이송됐고, 그날 밤 나는 또다시 이승의 중환자실에서 눈을 떴다. 엄청난 불빛 속에서 눈을 뜬 나는, 다시 살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감사는커녕 극도의 좌절과 분노를 느꼈다. 어째서 죽는 것 하나 내 마음대로 못하는지 너무도 화가 나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호흡기를 떼자마자 대체 누가 살려내라고 했냐며 생난리를 쳤다.


그때였다. 엄마가 내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소처럼 성실하게 생을 이어가던 엄마가 아버지를 여의고 오던 날에도 우리 용산에 데려가 우리 남매에게 일제 워크맨을 사주며 산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야 한다고 하던 엄마가 링거를 뽑고 난리를 치는 나를 끌어안더니 정말 정신 나간 사람처럼 울며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사는 게 힘들어도 여태 나쁜 생각을 해 본 적 없는데, 너 잘못됐다는 소리 듣고 여기로 오는데, 지하철에 몸을 던지고 싶더라, 얘야 이러지 마라, 나 너 없으면 못 산다."


그때야 비로소 내가 정서적으로 꽤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음을 인지했다. 이 사고를 쳤을 때에도 거의 열흘 가까이 지속되는 불면의 밤을 보내던 때였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해 체중도 10킬로 정도 줄어 있었다. 좋은 생각을 하려야 할 수 없는 상태였다.


퇴원 후 병원을 꾸준히 다니며, 본격적으로 트라우마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의외로 약물치료가 큰 도움이 되었다. 일단 신경안정제를 먹으니 불안증세가 대번에 완화되어 제때 잠을 제때 잘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몸이 나아지자 틈날 때마다 배낭을 메고 산 깊은 암자로 찾아들어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생에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이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보이기 시작했고, 놀랍게도  과정에서 내게 일어났던 불행을 이해하게 됐으며,  후에는 서서히 트라우마에서 전보다 자유로워졌다.


사람들이 느끼는 불행의 정도는 제각기 달라서 그 고통에 절대적인 평가를 매기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내게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불행이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떻게도 이해해 볼 수 없는 불행이 진짜 불행이다"라고.


사실, 불행의 크기나 빈도는 고통과 비례하지 않는다. 생의 어떤 불행이든, 그 일을 이해할 수만 있으면, 설령 그 일이 전쟁이라 해도 잊을 수 있다. 한데 왜 그랬는지, 대체 무슨 이유로 그랬는지, 누가 그랬는지 알 수 없는 불행이 정말 고통스러운 불행이다. 마치 세월호처럼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세월호가 지겹다는 당신에게 삼풍 생존자가 말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