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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만언니 Dec 02. 2019

2. 사고 당일 그리고 기억들

1995년, 나는 공식적으로 재수를 하고 있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일상에서 조금씩 일탈을 하고 있었다. 그 무렵 태어나 처음으로 토할 때까지 술도 마셨고 담배도 피웠다. 그도 그럴 게 당시 내게는 방황해야 할 이유가 차고 넘쳤고, 내가 아는 일탈이란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게 전부였다. 게다가 친한 친구들은 그해 모두 대학생이 되었는데  홀로 재수학원에 앉아 있자니, 같은 반 애들은 운동장에 나가 뛰어노는데 나 혼자 벌 받느라 교실에 남아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재수학원에 다니던 친구가 여름에 잠깐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게 어떠냐고 물어왔다. 서초동 법원 앞에 있는 백화점인데 일당 삼만 원이라고 했다. 어차피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우리는 6월 딱 한 달만 학원을 쉬고, 그 시간에 돈을 벌어 쌈박하게 경포대에 다녀온 후, 7월부터 본격적으로 공부에 매진하자 다짐하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이런 연유로 나는 사고가 나던 날인 1995년 6월 29일 오후 6시, 지하 일층에서 친구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친구나 나나 단기 알바로 채용된 터라, 숙련도가 요구되는 일은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덕분에 우리는 유니폼을 차려 입고 지하 슈퍼 앞에 있는 물품 보관대에서 고객들이 편하게 쇼핑할 수 있게 짐을 맡아 주는 일을 했다.
 
사고 당일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그날 백화점이 무척 더웠다는 거다. 온종일 에어컨이 나오지 않아 백화점 안은 찜통처럼 더웠다. 또 5층인지 6층인지 식당가로 이어지는 에스컬레이터는 아예 어긋나 버렸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이 얘기는 그 사이 친해진 동갑내기 엘리베이터 걸이 말해줘서 알았다. 이 친구 말이 에스컬레이터 일은 특급 비밀이니 절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 한데 나는 그 일 자체를 대단하게 여기지 않아서 진짜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설마 하니 건물이 그렇게 어느 한순간 폭삭 주저앉을 거라고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날, 나는 더위를 참지 못하고  물품보관소 근처에 있는 가전코너에 가 선풍기를 쐬는 직원분들하고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그 결에 선풍기 바람을 쏘였는데 당시 내 친구는 평소에도 내가 이러는 걸 아주 질색하는 스타일이라 그 자리에서 번번이 나를 데리고 나왔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 자리에서 나와 함께 선풍기를 쐬던 사람들은 전부 사망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사고가 나기 직전, 식품 코너 쪽에서 누가 갑자기 우리를 불러서 친구랑 함께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때였다. 갑자기 엄청난 폭발음이 들려왔고, 동시에 바람이 무척 세게 불었다. 영문을 모르는 나는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주저앉았다. 나중에 보니, 내가 있었던 물품보관소 자리는 천장과 바닥이 아주 붙어 버렸다.
 
TV를 통해 건물이 무너질 때 왜 그렇게 바람이 불었는지도 알게 됐는데, 건물이 위층에서부터 한 층 한 층 주저앉았기 때문에 내부에서 공기가 엄청난 압력으로 회전해서 그런 거란다. 욕조에 물을 받고 갑자기 손을 집어넣으면, 손을 중심으로 물이 회오리치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보면 된다. 참고로 사고 후 한동안 나는 지하철을 타지 못했다. 승강장 안으로 지하철이 들어올 때 불어오는 바람이 싫어서 말이다.
 
바람이 멎자,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그때 나는 건물이 무너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어둠 속에서 소리로 친구와 서로를 찾고는 서로를 보며 우리도 비명을 질렀다. 둘 다 피투성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걷던 친구는 그나마 나보다 적게 다쳐 이마가 찢어져 피가 턱까지 흘러 있었고 뒤에서 걷던 나는 등 쪽, 그러니까 뒤통수에서 발꿈치까지 무너진 건물의 파편에 얻어맞아 온 몸이 피투성이였다. 하지만 당시엔 너무 놀라서 내가 그만큼 다친 줄도, 아픈 줄도 몰랐다.
 
우리는 얼결에 사람들이 몰려가는 쪽으로 따라갔다. 좁은 출구로 사람들이 몰려드니 서로 먼저 나가려고 아우성이었다. 친구나 나나 그때는 어려서 밀면 밀리고 가라면 가고 하며 사람들을 따라 나갔다. 그렇게 겨우 지상으로 올라서자 먼지로 가득 찬 꽉 막힌 도로변에 부상자를 실어 나르는 미니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우리는 그 차에 탔다.
 
버스에 오르고 보니 내 앞자리 아저씨 머리에 상처가 너무 심했다. 별생각 없이 나는 내 상처를 지혈하고 있던 손수건을 그분께 건넸다. 자랑하는 게 아니라, 문맥상 필요해서 하는 말인데, 사실 이 일이 지금 생각해 보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꽤 어려운 결정이었다. 주변에 정말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허벅지에서 피가 퐁퐁 솟아나는 걸 보고 있으면 어디 가서 돌멩이라도 주워오고 싶은 심정이기 때문이다.
 
이날 특별히 기억나는 게 또 하나 있다. 버스 안에서 갑자기 어떤 여자분이 유니폼을 입고 있는 날 보고는 덤벼들어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흔들고 울면서 자기가 일층에 있었는데 잡고 있던 아이 손을 놓쳤다고, 우리 아기 어떡하냐고, 괜찮을 것 같냐고 물어왔다. 평소에 나였다면  백 프로 "저도 몰라요. 저한테 왜 그러세요" 했을 텐데, 그날은 뭐에 씌워도 단단히 씌웠는지 그분 손을 꼭 잡고, "저는 지하에서 걸어 나왔어요. 그러니까 괜찮을 거예요. 아기 꼭 찾으실 거예요"라고 했다. 속으로는 어른도 버티기 힘든 데서 세 살 꼬마가 괜찮을까 싶었지만, 그 엄마의 간절한 눈을 보며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했다.
 
겨우겨우 강남 성모병원에 도착했는데,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응급실은 말할 것도 없이, 응급실 앞 복도까지 맨바닥에 피투성이인 사람들이 누워 있었다. 보아하니 내 차례는 내가 죽은 다음에나 올 것 같았다. 해서 친구를 데리고 무작정 병원 외래동으로 가, 지나가는 아주머니 한 분을 붙잡고 가까운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그 아주머니는 선뜻 알겠다면서 자기 차에 우리를 태웠는데 그 차는 아주 작았고, 새 차였다. 아주머니는 초보운전이었는지 10시 10분 방향으로 핸들에 두 손을 가지런히 올리고 눈에 띄게 손을 떨면서 백미러로 내 상태를 중간중간 체크했다. “아가씨 괜찮아요?”
 
당시에 그분이 내게 보여주신 친절과 용기가 어떤 것이었는지 구체적으로는 잘 몰랐다. 큰 맘먹고 새로 뽑은 차 시트가 생면부지 타인의 피로 범벅이 되었을 텐데 그분은 주저하지 않고 기꺼이 우리를 태워 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이지 놀랍다.
 
그분의 도움으로 우리는 역삼동의 작은 병원에 갔고, 곧바로 수술실로 올라가 치료를 받았다. 한데 놀라운 건 그 시간에 퇴근했던 성형외과 전문의들이 전부 병원으로 다시 돌아와 내 수술을 집도했다는 거다. 성모병원에서는 급하니까 의사들이 나 같은 환자를 보면 상처에다 응급용 호치키스를 쾅쾅 찍었는데, 그 병원에서는 의사 둘에 간호사 여럿이 붙어 꽤 오랜 시간, 최대한 정성스럽게 내 상처들을 봉합했다.
 
수술을 마치고 입원실로 올라가 있으니 불과 2~3초 사이에 생과 사를 넘나들었다는 사실도 신기했지만 무엇보다 궁금했던 건, 어째서 나는 성모병원의 응급실 간이침대가 아닌, 강남 한 복판의 이 호사스러운 병원에서 초특급 트리트먼트를 받는 건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물론 간단하게 생각하면 운이 좋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날 하루를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선물을 받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를테면 사고 후 버스 안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보상을 받은 기분, 하여 그날 밤 나는 병원에 누워 미약하게나마 이 우주는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난생처음 했다.
 
그 후로 병문안을 오는 친구들에게 농담처럼, 나는 조금만 더 현명했더라면 사고 직후 이렇게 빈 손으로 나오지 않았을 거라고, 근처에 널려있던 돈 통이라도 하나 들고 나왔을 거라고 했다. 또 나를 병원에 데려다준 분에 대해 말하면서, 아마 나 같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그런 일은 못할 거라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때 나를 병원에 데려다준 그분이 특별한 것도 맞지만, 아마 나는 똑같은 상황을 다시 겪는다 해도 나는 만 원짜리 한 장 집어 나오지 못할 것이고, 나 역시 설령 내 차를 폐차하게 될지라도 피투성이가 되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어린 여자애들의 간청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장담하는데 이 글을 읽는 당신들도 그렇다. 몰라서 그렇지, 악한 짓도 재능이 있어야 하는 거다.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앞서 여러 번 이야기했다시피, 이 사고는 이후의 내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쳤는데, 얼마 전 읽은 황석영의 <수인>에 당시 내 마음을 정확하게 묘사한 문장이 있어 옮겨 적는다.
 
“겪은 것들은 어리숙하지 않다” _36page
“봄날 같은 청춘을 제 지냈다”_123page
 
그냥 당시에 내 마음이 딱 이랬다.
 
말 그대로 어리숙해야 마땅할 나이에 사고를 겪은 후, 나는 청춘을 제(祭) 지내며 보냈다. 그러니 당연히 나는 꽤 오래도록 사랑이니, 영원이니, 결혼이니, 행복이니 같은 말들을 믿지 않았다.
 

*인용및 참조 :  황석영의 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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