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가늘게 뜨고 봐야 겨우 볼 수 있는 날들이 지나가고, 정서적으로도 차츰 안정이 되어갈 무렵 2014년 4월 봄, 세월호 사고가 터졌다.
진도 체육관에 갔다. 물론 정신과 의사는 말렸다. 그런데 갔다. 가야 할 것 같았고 가고 싶었다. 때마침 회사에서도 임직원 자원봉사 모집을 했기에 망설임 없이 손을 들고 갔다.
진도에 도착했을 땐 이미 선체가 침몰한 후 유해 수습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기 시작할 때였다. 당시 여러 기업에서 진도 체육관 앞에 부스를 차려놓고 유가족을 위한 물품 지원을 시작했고, 우리 회사도 그 틈에 끼어 경황없이 내려와 속옷을 못 갈아입는 유가족들에게 속옷을 지급했기에 그 일을 하러 갔다.
목포를 통해 들어간 진도는 5월이 다 돼가는데도 추웠다. 사람들 말이, 아이들이 그리되고부터 바람이 분다 했다. 간이 부스에서 나는 가능하면 입을 닫고, 시선은 바닥에 고정한 채 유가족 분들이 원하는 속옷을 찾아 내 드렸다. 속옷을 달라던 분들 중 더러 유가족이 아닌 분들도 계셨지만, 알면서도 그냥 내주었다. 따지고 들다 혹여 큰소리 날까 싶어 그랬다.
헬기가 뜨면, 전광판의 실종자 수가 줄었고. 아이의 신원이 확인되면, 유가족에게 기별이 갔다. 별생각 없이 화장실에 가다 우연히 비보를 접한 엄마를 보게 됐는데, 그 모습을 보고 사람이 너무 슬프면 짐승처럼 우는구나 했다. 그때 내가 본 어머니의 울음은 태어나 처음 보는 울음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졌다. 그러고 보니 나는 어느새 진도 체육관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눈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저 이는 부모구나, 저 이는 친척이구나, 저 이는 구경꾼이구나, 뒷모습만 봐도 명확하게 구분됐다. 그렇다. 불행은 잔인하도록 선명했다. 셔틀을 타고 팽목항도 가 보았는데 몇몇 스님들이 매서운 바닷바람을 맞아가며 영가를 위해 기도를 올려주고 계시던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
밤에는 자원봉사자가 묵을 수 있는 막사에서 잠을 잤다. 그곳에는 안타까운 마음에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몰려든 자원봉사자들이 있었고, 각자 하는 일이 달랐다. 그에 비해 나는 회사에서 출장비를 받고 편하게 온 처지라 어쩐지 덜 떳떳해 한쪽 구석에 조용히 몸을 누였고, 이때 나는 한 자원봉사자로부터 놀라운 얘기를 전해 들었다.
낮에 팽목항에서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 이름을 적은 풍등을 띄웠는데, 그 풍등이 전부 바람을 타고 잘 가다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북으로 가더란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누군가가 '어머 쟤들 집으로 가나 봐' 했고 그 말에 거기 있던 사람들 모두가 다 울었다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돌아누우며 나는, 설마, 때마침 바람이 그쪽으로 불었겠지, 하다가 문득 어쩌면 그때 바람도 너무 슬프고 안타까워, 뭐라도 해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라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 후로는 모두가 알겠지만, 세월호에 대한 진상 규명을 위한 길고 지난한 여정이 시작됐다. 유가족들은 청와대를 찾아가기도 하고, 단식투쟁도 했는데 정부는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않았다. 결국 그 일이 도화선이 되고 국정 농단과 맞닿아 촛불 민심이 일어섰고, 박근혜 정권은 탄핵되고, 문재인 정권이 들어섰다. 그럼 된 거 아니냐고? 아니다. 비슷한 사건의 경험자로써 말하는데 바뀐 정부에서 죽은 애들을 다시 살려 보내 준다면 모를까, 유가족들에게는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면 피해자 입장에서는 세월호는 하나의 사고가 아니라, 각기 다르게 겪은 개별적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그런 일이 대체 왜 생겼는지 알고 싶고, 그들로부터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싶은 것뿐이다. 그래야 어떻게든 이해를 해 볼 테니까, 이해를 해야 잊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지 않고는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 진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있었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으니 아이들의 죽음이 헛된 것만은 아니지 않냐고? 아니, 그렇지 않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더욱 잊어서는 안 되는 거다. 세상이 사람들이 계속 기억해 줘야 한다. 그래야 억울하지 않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잊으란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냐고, 거기서 더 나아가 없는 집에서 그만한 돈 챙겼으면 됐지 뭘 더 바라느냐고, 추모공원은 무슨 추모공원이냐고, 뭐 좋은 일이라고 기억하냐고 잔인한 말로 자꾸 유가족들의 가슴에 생채기를 낸다.
사실 어떤 감정은 지식과 달라서, 겪어보지 않으면 평생 모르는 감정이 있다. 이해한다. 그런데 말이다. 이해를 못 하겠으면, 서로의 마음을 입장 바꿔 헤아려 보면 안 될까? 그도 안 되면 그냥, 누구네 집 아빠인지 어느 집 엄만지는 몰라도 자식 잃고 저렇게 슬프다는데, 집에 가서는 도저히 잠이 안 온다는데, 태평양 한가운데도 아니고 진도 앞바다에서 아이들이 죽었는데, 해경은 대체 그때 뭐했는지 선체가 완전히 가라앉을 때까지 왜 다들 못 구했는지 알고 싶다는데, 그 배를 몰았던 선원들은 다들 살았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뭐가 이상한데 그 누구도 제대로 된 설명을 안 해주니, 그 마음 답답해서 길에 좀 나와있겠다는데 거기 있으면 좀 낫다는데, 우리 그냥 이 사람들 거기 좀 있다 가게 두면 안 될까? 세상을 향해 화난 마음 식을 때까지 우리 좀 기다려 주면 안 될까? 그럴 수 있잖아. 별 거 아니잖아.
나도 내가 겪은 일에 대해 이해하는 데 20년이 걸렸는데, 이 사람들 이제 시작이잖아, 아직 믿을 수 없는 시절이잖아.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그런 연유로 나는 처음 딴지일보 자유게시판에 <세월호를 잊으라는 그대에게 삼풍 생존자가 말합니다 >라는 글을 썼다. 이 글이 화제가 되자 개인적으로 '극우세력'이라는 사람들에게 말도 못 하게 시달렸다. 해서 한동안 대체 내가 그런 걸 왜 썼나 후회했다. 한데, 나는 이 일을 통해, "지겹다"라고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일부인데 목소리가 좀 클 뿐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글을 보고 함께 울고 아파했다는 걸 알았다. 그러자, 태어나 처음으로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위로를 받았다. 너무너무 따뜻한 경험이었다.
사실 어떤 형태든 불행의 진면목은 '고독'이다. 누가 내 마음을 누가 알기나 할까 하는, 고독감 말이다. 한데 많은 사람들이 내 말에 공감해 주니 그게 그렇게 위로가 될 수 없었다. 감사한 일이다.
해서 하는 말인데, 나는 세월호가 안 지겹다. 하나도 안 지겹다. 대체 뭐 하나 제대로 밝혀진 게 없는데 뭐가 지겨운가, 같은 논리로 나는 80년 광주도 안 지겹고 제주 43도 안 지겹다. 아무것도 지겹지 않다. 그래서 나는 끝까지 이 일을 물을 거고, 평생 기억할 거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어른으로서 그런 세상을 만들게 두고 그런 배에 아이들을 태우게 했다는 일말의 죄책감을 갖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 잊지 말자. 진짜 그러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