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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cas Apr 23. 2023

비와 소년

비와 소녀

어제도 오늘도 비가 내렸다. 장마철이라며 내일도 모레도 계속 내릴 거라는 예보이다. 한 여름에 내리는 비는 시원하다. 무더위를 한 번에 날려 버리고 탁하고 거친 공기를 씻겨 주기도 한다. 세상을 깨끗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름비를 좋아한다.

한 낮에 내리는 시원한 빗줄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인데 그 느낌은 너무나 다르다. 지금에 와서야 깨달았지만 꽃다운 시절, 청춘이라 불리던 그 때는 가슴 속에서 주체할 수 없이 타오르던 모든 종류의 뜨거움을 식혀 주었다.

열정이 사라진 지금은 다르다. 한 낮에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한 숨 자는 낮잠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꿀잠이다. 그 달콤한 휴식 때문일까? 밤이 되어도 계속 내리는 빗소리는 크게만 들린다. 사람들은 주변이 소란스러우면 집중이 되지 않는다고도 한다. 여름밤 비도 그럴까? 빗줄기 소리가 커질수록 이런저런 기억들을 떠오르게 하는 이상한 힘이 있다. 그 굵어지는 빗줄기처럼 더욱 선명해진다. 

그 끝을 쫓아가는 감정은 애틋한 선물을 거저 받는 것 같은 사치일 수도 있다. 창가에 부딪히는 빗방울은 헝클어지고 어수선해진 가슴 속으로 스며 들기도 한다. 

마치 바짝 마른 대지를 적시고 생명을 불어 넣는 빗줄기와도 같다. 푸석한 감정 세포들을 흠뻑 적시고 갈라진 땅 속에 묻혀 있던 그리움의 싹을 움트게 하는 듯 하다. 

빗소리가 전해 준 낮잠 덕분에 몸과 뇌는 피곤하지가 않다. 온종일 쉬기만 했던 이성과 감성은 변덕스러운 빗줄기와 이상하게 어울려 오래된 풋사랑의 추억을 자연스레 소환해 준다. 

중년 아저씨를 소년으로 만들어 버리고 비와 소녀, 첫사랑과 그리움 등으로 취하게 해서 시도 한 편 쓰게 한다. 역시 비는 대단한 친구이다.

장마철 하루 중에 늦게나마 뭔가를 했다는 뿌듯함에 고취되어 잠시 비가 그친 틈을 타 밖으로 나와 보았다. 이슬비인지 가루비인지 뭐라 딱히 부르기도 애매하게 잔잔히 내린다. 

이런 빗속에서는 우산이 있거나 없거나, 쓰거나 말거나 누구라도 어울린다. 하지만 남녀가 같이 걸을 때는 말이 달라진다. 같은 길을 가는데도 한 우산을 안 쓰면 이상하게 보인다. 거기에 더해 우산이라도 없다면 배려심이 없는 남자가 될 수도 있다. 남녀가 각각 우산을 쓴다면 멋쩍은 사이거나 모르는 관계로 본다하더라도 억지 주장은 아닐 것이다.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좀 멀찍이서 맑고 생그런 목소리가 들린다. 등에 가방을 멘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녀학생의 대화 소리이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같다.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혹시나 방해될까 가로등 그림자 속으로 반사적으로 숨는다.

아마도 공부하다가 집에 갈 시간을 맞춘 것 같다. ‘그 몇 분 안 되는 시간이라도 같이 하고 싶어서 일거야’라고 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아파트 단지 내이기 때문인지 손도 잡지 않았다. 요즘은 중학생만 되어도 이성교제를 공식적으로 한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 낮 길가에서 스킨십을 하는 학생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던 기억이 난다.

‘이 시간까지 공부하고 오는 저들은 모범생이라 그런가? 이팔청춘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몽룡과 춘향이는 할 것 다했는데... ’

여러가지 생각들을 떠오르게 한다. 단정히 걷는 여학생, 그 옆에서 멀어졌다 가까워졌다하며 걷는 남학생, 하지만 눈길만은 여학생에게서 뗄 줄을 모른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걷는 모습, 손짓, 간간히 들리는 목소리만으로도 두 사이가 짐작이 되었다.

'이번 시험 끝나고 영화보러갈래?'
'맛있는 떡볶이 집이 새로 생겼다는데... '
'내일 도서관에 몇 시에 갈거야?'  

둘만이 하고 싶은, 할 수 있는 것들에 관한 내용일거라 짐작된다. 같은 시간, 장소에 둘이 함께 한다는 조건만 채운다면 뭘 해도 좋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만난 감각보다는 설레임이 더 끄는 힘이 크다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부러웠다. 부러우면 진다는 말도 있던데 이기고 지는 것이 뭐가 중요할까? 두 학생이 만들고 있는 미래의 추억에 방해될까봐 더 짙은 그림자 속으로 조심조심 몸을 숨겼다.

30년도 훌쩍 지난 그 설레던 때, 지금 생각만으로도 미소 짓게 되는 그 때로 데려 가 준, 그들이 준 선물에 대한 작은 성의일 것이다. 오늘처럼 비오는 날은 가슴이 두근거린다.

‘우산을 같이 쓸까? 말까? 불쑥 같이 쓰자고 하면 뭐라고 할까?’

용기를 내어 내 우산을 접고 같이 쓰려고 했었다.

 ‘와? 하나만 쓰노? 비맞게!’

처음으로 같이 우산을 쓰려하다가 맞은 핀잔이 아직도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요즘처럼 장마 때였던 같다. 그 후로 그 아이가 우산을 들고 있는 것을 볼 때면 가지고 있던 우산을 친구에게 주었다.

저 학생들은 갈림 길에서 헤어지지 않고 한 참을 이야기 한다. 비가 좀 굵어지기 시작했는데도 그대로이다.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훔쳐보는 이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잠시 후 여학생의 동생쯤으로 보이는 눈치 없는 아이가 우산을 들고 와서야 둘의 대화가 끝났다. 혼자 가는 남학생의 발걸음이 좀 전과 달랐다. 우산이 없어서 일까? 좀 더 추억을 만들지 못해서일까? 저 아이도 언제인가는 이 순간이 그리워질 때가 올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산 속 그 긴머리 여학생의 뒷 모습이 어디서 많이 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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