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슬픈 눈 빛, 그리고 무심함
순찰차가 덜컹이며 멈춰서는 순간, 김대위는 화들짝 잠에서 깼다. 차창 밖으로 익숙한 명파 소초 입구가 보였다. 피로에 절어 잠시 눈을 붙였던 모양이었다.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어젯밤 늦게까지 이어진 업무와 이른 새벽부터 시작된 순찰 때문이었다. 초여름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중대장님, 명파 소초 도착했습니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운전병이 상기된 목소리로 외쳤다. 동시에 소초 입구에 대기하고 있던 상황병이 순찰차 쪽으로 달려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상황병은 새벽 바다를 배경으로, 피곤에 쩔어 있었지만 지휘관의 도착에 맞춰 긴장한 표정이었다.
“어… 그래. 상황 보고 받고 대기하라.” 김대위는 부스스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입 안이 바싹 말라 있었다. 숨 막히는 피로가 그의 전신을 짓눌렀다. 그는 순찰차에서 내렸다. 차가운 새벽 람이 그의 뺨을 스쳤지만, 정신은 번쩍 들지 않았다.
상황병이 다가와 경례를 올리고는 무언가 망설이는 듯했다.
“충성! 근무 중 이상 없습니다! 현재… 아, 저… 중대장님.” 상황병이 말끝을 흐렸다. “행보관님이… 전화로 급하게 찾습니다.”
행보관이? 이 시간에? 불길한 예감이 김대위의 등골을 스쳤다. 행보관은 웬만해서는 새벽에 직접 전화하는 일이 없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피로에 절어 있던 정신이 순식간에 곤두섰다.
소초 상황실로 급하게 이동했다. 좁은 공간에 무전기 소리와 함께 램프 불빛이 깜빡였다. 수화기를 들고 행보관과 연결하자, 수화기 너머 그의 목소리가 비정상적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평소 그가 강조한 대로 행보관은 핵심 결론부터 보고했다. 그리고 숨 가쁘게 쏟아지는 단어들이 김대위의 머릿속에 박혔다.
“…중대장님! 신병이… 신병이 목을 맸습니다. 용대가 목을…!”
귓가에 박힌 단어는 '신병', '용대', '목을 맸습니다' 세 가지였다. 세상이 순식간에 정지한 듯했다. 머리가 멍해지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용대… 용대 이등병. 지난주 전입 온 신병.
그리고 그 순간, 어제 오후 순찰 중 보았던 용대의 그 눈빛이 뚜렷이 기억났다. 마치 필름처럼 생생하게 그의 뇌리를 스쳤다. 정신 교육 중 잠시 스쳤던 그 눈으로 전해진 느낌.
지난주 전입 신병 면담 중, 유독 어둡고 불안해 보이던 얼굴이던 이등병. 용대였다. 잔뜩 겁먹은 듯하면서도 무언가 간절함이 담겨있던 눈. 그 안에 담긴 슬픔과 체념, 그리고 마지막 희망 한 조각.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좀 들어 주십시오.'
그 눈빛은 분명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슬프면서도, 동시에 세상 무서울 것 없어 보이는 그런 거칠 것 없는 눈빛이었다. 도움을 바라는 것인지, 마지막 하소연인지 알 수 없는 싸인이었고, 김대위는 분명 그 싸인을 인지했다. 지휘관으로서 병사의 이상 징후를 감지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훈련으로 단련된 그의 직감이 경고를 보냈다. 이 병사에게는 무언가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날따라 유난히 일이 많았다. 처리해야 할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오후에는 대대장과의 중요한 회의도 예정되어 있었다.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지금 용대의 이야기를 들어주기 시작하면 언제 끝날지 몰랐다. '그래, 이건 급한 일이 아니야. 나중에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차분하게 들어주는 게 더 좋을 거야.'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상황의 심각성을 축소시켰다. 방해꾼 신들, 특히 데이모스가 그의 피로와 바쁨을 이용해 나른하고 안일한 생각을 심어 넣었음을 그는 그때는 알지 못했다. 야누스는 그의 바쁨을 핑계 삼아 '내일로 미루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라고 속삭이며 그의 결정을 합리화시켰다.
'내가 지금은 바쁘니 내일 오후에 다시 올게. 그때 이야기하자.'
성실한 말투의 눈빛으로 대답을 했다고 생각했었다. '내일 오후에 다시 올게.' 그의 입에서 나간 그 네 마디 말. 그것이 먼저 간 이등병과 김대위가 이 세상에서 나눈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영혼의 저울은 그의 무심한 선택에 반응했겠지만, 당시 김대위는 자신의 HP가 89점이며 그 숫자가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었음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용대를 뒤로하고 콘도 공사 현장으로 이동했다. 사단장이 현장 지도 나오는데 브리핑을 해야 했다. 아마도 군사보호구역 건물 승인 관련 확인을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조직의 중요한 행사, 상급자의 지시가 한 신병의 간절한 눈빛보다 우선순위에 놓이는 군대의 비정한 현실. 그것은 HP 시스템의 관점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소초장 휴가로 대리 근무를 하는 행보관을 통해 이 비극적인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수화기 너머 행보관의 떨리는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채웠다.
“알았어요! 바로 갈게. 애는, 용대는 지금 어디에?”
“전원 투입해서 찾아봤더니 취사장 공사하는 곳에…” 행보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지금은?”
“내려놨습니다. 상황병들이 확인 중인데… 아무래도…”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김대위는 침을 삼켰다. 가슴 아래서부터 차가운 기운이 올라왔다. 비극의 현실이 그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상황보고는? 나머지 아이들은 요?”
“바로 보고하겠습니다. 막사에 모아 두었습니다. 동요가 심해서.”
“아침 식사 준비시키고 고참 네 명 뽑아 남북으로 두 명씩 투입해 해안선 확인 시키세요. 이상 없는지 철저히 감시하고.”
김대위의 지시는 기계적이었다. 머리가 멍했지만, 수많은 훈련과 경험으로 단련된 지휘관으로서의 본능이 그에게 해야 할 일을 속사포처럼 쏟아내게 했다. 주변은 새벽의 정적만이 흘렀다. 수화기 너머로 병사들의 낮은 신음 소리나 흐느낌마저 들리는 듯했다. 막사에 모여 있을 그들은 얼마나 공포에 떨고 있을까. 다들 토끼 눈이 되어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대대 상황실 연결해!”
수화기를 든 채 다른 손이 떨렸다. 이건 현실일 리 없어. 꿈일 거야. 하지만 떨리는 손의 감각이 현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통신보안! 한 마리 잡아 휴가 가자! 철통 경…계.”
들떠 있는 상황병의 구호가 짜증스럽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한 마리 잡자고? 잡는 건 고사하고 잡히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이럴 때조차 나오는 부대 구호가 역겹게 느껴졌다. 군대라는 조직의 무미건조하고 반복적인 구호가 비극적인 현실과 충돌하며 기이한 부조리함을 만들어냈다. 사이코적인 기운이었다.
“상황실 연결해!” 김대위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통신보안! 한 마리…” 상황병이 구호를 반복했다. 조직의 규율은 개인의 비극 앞에서 멈추지 않았다.
“통신보안 풀어! 상황장교 바꿔!”
“통신보안! 상황장교 정보장…”
“화진포 중대장이야! 상황장교 바꾸라고!” 김대위는 거의 소리를 질렀다. 계급과 권위만이 통하는 조직의 논리 앞에서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지위를 이용했다.
잠시 후 상황장교의 목소리가 들렸다. 피곤함 속에 당혹감이 섞여 있었다.
“예, 중대장님.”
“대진 소초에서 이등병이 목매었다.” 김대위는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사실만 전달하려 했다.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지휘관에게 허락되지 않는 사치였다.
“예?” 상황장교의 목소리가 당황으로 물들었다. 예상치 못한 보고였을 터였다. GOP에서 발생한 총성 사건과는 또 다른 종류의, 내부에서 터져 나온 비극.
“사망했다. 대대장님 어디 계셔?”
“수… 수… 순찰 중이십니다.” 상황장교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 보고가 대대장에게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그 역시 알고 있는 듯했다.
“보고 드려라! 명파에서 현장(대진)으로 이동한다!”
전화를 끊고 나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이제부터 공식적인 절차가 시작될 터였다. 눈치 빠른 상황병이 재떨이를 가져오고 담배를 꺼내 주려 한다. 그의 기계적인 친절함이 오히려 김대위의 마음을 더 무겁게 했다.
“차 대라. 바로 출발한다.”
운전병에게 지시하고, 혹시 모를 동요를 막기 위해 주변 병사들에게도 지시했다.
“평소대로 해라! 오버하지 말고.”
손가락에 끼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익숙한 담배 연기가 폐 깊숙이 들어왔다가 길게 내뿜어졌다. 희부연 연기 사이로 저 멀리 검은색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작은 어선들의 불빛이 흔들린다. 새벽의 바다는 언제나처럼 무심했다. 인간의 비극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거대한 자연처럼.
차에 올라타 대진 소초로 향하는 길.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갔다. 용대의 죽음, 자신의 책임, 그리고 앞으로 겪게 될 조사 과정. 온갖 최악의 시나리오가 스쳐 지나갔다. 그때, 문득 방금 전 보았던 늙은 개의 죽음이 떠올랐다. 어젯밤, 초소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피로와 스트레스, 그리고 용대의 간절했던 눈빛을 외면한 후의 찝찝함이 뒤섞여 신경이 곤두서 있던 그때.
순찰차에서 내리자 상황병이 도열하여 경례를 올렸다.
“충성! 근무 중 이상 없습니다! 현재 소대장은…”
상황 보고를 들으며 막사로 들어가려는데, 늙고 털이 빠진 개 한 마리가 훽하고 막사 안으로 뛰어들었다. 옴이 옮을 수 있다며 예전부터 막사 근처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던 개였다. 불결하다며 멀리하라고 했던 존재.
“저건 뭐야? 잡아!”
“예! 알겠습니다!”
옆에 서 있던 취사병, 상황병, 운전병들이 후다닥 뛰어 들어가 개를 잡으러 갔다. 김대위의 짜증이 폭발했다. 하루 종일 쌓였던 피로와 스트레스, 그리고 방금 전 용대의 사건(외면했던)으로 인한 내면의 불안감, 그 모든 것이 개의 등장과 함께 터져 나왔다. 그는 가장 약한 존재에게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쏟아냈다.
“너희들은 뭐 하는 놈들이야! 옴 있다고 막사에서 개 치우라는 소리 못 들었어? 소대장 너는 지휘 보고로 치웠다고 했잖아?”
“죄송합니다!” 소대장 대리가 식겁하며 대답했다.
“엎드려!”
“그 녀석이 그리 좋아? 치우란지가 도대체 언제인데, 지휘보고로 치웠다고 나를 속여?” 김대위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렸다. 소대장 대리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숙였다. 방해꾼 신들, 특히 사이코가 그의 분노와 스트레스를 이용하여 예측 불가능하고 파괴적인 행동을 유도하고 있었다. 포보스와 데이모스는 그의 내면의 나약함과 짜증을 부추겼다.
생활관 안에서 왁자지껄 개를 잡는 소리가 나더니, 금세 개를 끌고 나온다. 옴 때문에 더러워진 늙은 개. 털이 빠지고 냄새가 나며 힘없이 끌려 나오는 개의 모습은 마치 세상의 모든 고통과 비루함을 짊어진 듯했다.
'옴 옮기지 말고 밖에서 자유롭게 살지! 이놈아 어이해 몸에 병균을 묻히고 사냐? 너도 늙었구나! 지금 나이가 몇 살이니? 인간으로 하면 7, 80세 노인네처럼 보이는구나. 털도 빠지고 냄새도 못 맡고, 이승의 삶이 거의 끝나는 상태로 보인다.'
김대위는 개를 보며 왠지 모를 서글픔과 동시에 혐오감이 들었다. 친숙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낯선, 이미 병들어버린 눈동자. 그 눈을 마주하자 설명할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 순찰차 들어오기 전부터 보았던 개였다. 십 년 넘게 부대 주변을 맴돌던 녀석이었다. 그의 무관심 속에서 병들고 늙어간 존재.
목줄을 벤치에 묶었다. 개는 힘이 없어 보였다.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했다. 무기력하게 그의 처분을 기다리는 모습.
“묶었어?”
“넵! 단단히 단디 묶었습니다!” 운전병이 대답했다.
“나뭇가지 꺾어 와!”
운전병이 후다닥 달려가 잔가지 하나를 꺾어 왔다. 김대위는 그것을 보며 더욱 화가 났다. 그의 분노는 이미 통제 불능 상태였다. 사이코의 영향은 더욱 강해졌다.
“야! 이게 회초리야? 장난하냐? 엎드려!”
잔가지 하나를 옆으로 홱 던졌다. 동시에 눈치 빠른 분대장이 잽싸게 주워온 각목 같은 굵은 나뭇가지를 가져왔다. 둔탁하고 묵직해 보이는 나무였다. 그의 분노를 만족시킬 도구.
“너희 자식들 말 되게 안 듣는다! 이런 씨~~~”
김대위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 나뭇가지로 개를 툭 쳤다. 정확히는 후려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짜증을 담아 몸을 밀쳐낸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늙고 병든 개는 깨갱 소리도 없이 그대로 푹 스러졌다. 미동도 없었다. 너무나 허무하게.
“헉… 죽은 것 같습니다. 중대장님… 이거…” 분대장이 당황해서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도 공포가 서려 있었다.
김대위도 당황했다. 설마 죽을 줄은 몰랐다. 그저 겁만 주려 했을 뿐이었다. 그의 분노가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했다. 하지만 지휘관으로서의 체면이 있었다. 지금 여기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섬뜩한 느낌이었지만, 별일 아닌 것처럼 애써 태연한 척 나뭇가지를 던지며 돌아섰다. 죄책감이 밀려왔지만, 그는 그것을 외면했다.
“치워라!”
“예… 예. 알겠습니다. 치우겠습니다.”
병사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김대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막사로 향했다. 돌아 나오는 발걸음이 무겁다. 노쇠한 개의 허무한 죽음이 방금 통보받은 신병의 죽음과 겹쳐 묘한 불길함과 죄책감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어두운 밤바다에서는 여전히 철썩이는 파도 소리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마치 그의 마음속 혼란을 대변하는 것처럼. 두 개의 죽음. 하나는 외면한 슬픈 눈빛의 대가, 하나는 터져 나온 분노의 대가. 그의 영혼의 저울은 이 두 사건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