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천사 군대 탈출기
머릿속에서 차갑고 이기적인 목소리가 속삭였다. 포보스의 목소리였다.
들키면 엄한 벌을 받을 것이라는 공포심이 그를 사로잡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진실을 말하면 자신은 면피하겠지만, 동기는 더 큰 처벌을 받을 것이다. 거짓말을 하고 동기를 덮어주면 둘 다 위험해지거나, 아니면 무사히 넘어갈 수도 있다. 야누스의 기운이 그 선택지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무엇이 옳은 선택인가?
김민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진실을 말하는 것, 그것은 정직함에 해당할 것이다. 동기를 돕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 그것은 선의인가, 아니면 규칙 위반인가? 도와주지 않고 못 본 척하는 것, 그것은 비겁함인가, 아니면 현실적인 판단인가? 복잡하게 얽힌 선택지 속에서 HP/HP의 계산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예측할 수 없었다.
조교가 다시 한번 다그쳤다. “봤어? 안 봤어? 똑바로 말해!”
김민준은 목이 메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동기를 돕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았다. 그저 사실만을 말했다. 가장 안전한 선택이었다. 조교의 눈빛은 여전히 의심으로 가득했지만,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대신 공이를 잃어버린 동기에게 무시무시한 벌이 내려졌다. 연대 책임으로 생활관 전체가 기합을 받을 위기까지 몰렸다.
그 순간.
[ -5 HP ]
눈앞에 나타난 수치. 마이너스였다. 보호색을 택한 결과는 헬페이 적립이었다. 비록 거짓말을 하지 않았지만, 도울 수 있는 상황에서 동기의 위험을 외면하고 자신만의 안전을 택한 것에 대한 벌인 것 같았다. HP 시스템은 그의 ‘방관’을 악행으로 판단한 것이다. 가슴속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헬페이 적립은 처음이었다.
그 후, 조교와 선임들의 압박 속에서 공이를 찾기 위한 필사적인 수색이 시작되었다. 모두가 불안감과 짜증에 휩싸여 예민해져 있었다. 야누스는 이 상황에 기름을 부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총기 부품이 갑자기 이상한 곳에서 발견되거나, 누군가 장난을 친 흔적이 보이거나 하는 등 상황이 계속 꼬였다. 사이코적인 부조리가 현실을 침범하는 느낌이었다.
수색은 늦은 밤까지 이어졌고, 결국 공이는 찾지 못했다. 생활관 전체가 연대 책임을 지고 가혹한 기합을 받았다. 김민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육체적인 고통과 함께 -5 HP를 적립했다는 사실이 그의 내면을 짓눌렀다. 동기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뒤섞였다.
‘봐라. 네가 나섰으면 더 큰일 났을 거야.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었어.’
포보스와 데이모스가 다시 속삭였다. 그의 실패와 죄책감을 파고들며 더욱 깊은 절망으로 끌어내리려 했다. 그들의 속삭임은 너무나 달콤했고,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일었다.
그때, 기합 도중 쓰러질 뻔한 동기 한 명을 다른 동기들이 부축하는 모습이 보였다.
모두가 힘들고 짜증 나는 상황이었지만, 완전히 외면하지는 않았다. 그 작은 행동 속에서, 김민준은 희미한 빛을 보았다. 이 감옥 같은 곳에서도, 인간들은 완전히 서로를 버리지 않는구나. 절망 속에서도 희생하고 돕는 작은 선의가 존재했다.
순간, 눈앞에 다시 수치가 나타났다.
[ +1 HP ]
기합을 받는 와중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김민준의 점수가 올랐다. 왜? 쓰러진 동기를 직접 돕지는 않았지만, 그를 돕는 다른 동기들의 모습을 보고 인간적인 연민과 존경, 그리고 절망 속에서의 작은 희망을 느꼈기 때문일까?
HP 시스템은 정말 그의 내면을 읽고 있었다. 타인의 선행을 보고 느끼는 긍정적인 감정조차 점수에 반영되는 것 같았다.
점수는 예측 불가능했다. 어떤 행동이 높은 점수를 가져오는지, 어떤 감정이 HP/HP를 움직이는지 명확한 규칙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HP/HP는 그가 이 ‘감옥’에서 겪는 모든 순간, 모든 선택, 모든 감정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방해꾼 신들은 그의 약점을 파고들어 헬페이를 쌓도록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었다.
그날 밤, 김민준은 헬페이를 처음으로 맛본 씁쓸함과, 예상치 못한 HP 상승으로 인한 혼란, 그리고 방해꾼 신들의 명확해진 존재감을 안고 침대에 누웠다. 군대라는 물리적인 감옥에 더해, 그의 영혼은 선과 악, 절망과 희망,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초자연적인 존재들의 영향력 속에서 또 다른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100 HP는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그의 첫 번째 환생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위험한 게임이었다.
5화 유혹의 시험, 더욱 명확해진 목소리
훈련소 생활은 시간이 갈수록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압박의 강도를 더해갔다. 처음에는 낯섦 때문에 힘들었다면, 이제는 익숙해진 고통이 주는 지긋지긋함, 그리고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주는 절망감이 그를 짓눌렀다. 매 순간, 조교의 날카로운 눈과 고함이 그의 움직임을 통제했다.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고, 주더라도 오직 다음 명령에 복종할 준비만을 하도록 강요받았다.
김민준은 이제 더 이상 이곳이 단순한 감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곳은 거대한 시험장이자, 그의 영혼을 둘러싼 치열한 전쟁터였다. 눈앞에 나타나는 HP/HP 수치, 그리고 귓가와 내면에서 들려오는 알 수 없는 목소리들. 그것들은 명확하게 그에게 속삭였다.
가장 빈번하게 들려오는 것은 차갑고 끈적한 목소리였다. ‘포기해. 어차피 넌 안 돼. 여기서 버텨봤자 뭐가 달라지는데?’ 그의 심장을 죄어오는 불안감과 함께 나타나는 목소리. 작은 실수에도 세상이 무너질 듯한 공포심을 불어넣고, 안전하고 쉬운 길만을 선택하도록 유혹했다. 데이모스는 그에게 끊임없이 나약함과 절망감을 주입하려 했다.
때로는 두 개의 상반된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이건 불합리해. 따를 필요 없어.’*라고 속삭이는가 하면, 곧이어 *‘아니야, 규칙을 따라야 해. 그래야 문제없어.’*라며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혹은 분명 옳은 행동인 줄 알았는데, 상황이 꼬이거나 예상치 못한 결과로 이어지며 ‘무엇이 진짜 옳은 것인가’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게 했다.
야누스의 영향이었다. 그의 이중성은 상황을 모호하게 만들고, 인간관계를 뒤틀며, 김민준이 누구를 믿고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끊임없이 헷갈리게 했다.
가장 예측 불가능하고 불쾌한 것은 기이한 웃음소리나 황당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목소리였다. ‘크크크··· 그냥 웃어버려. 이게 다 코미디잖아.’ 조교의 비상식적인 명령, 동기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혹은 훈련 과정 중 벌어지는 예측 불가능한 사고들은 종종 사이코의 소행 같았다. 모든 것을 우스꽝스럽거나 무의미하게 만들어, 김민준이 진지함을 잃고 영혼의 싸움 자체를 시시하게 여기도록 유도하는 듯했다.
그들은 명확하게 김민준, 즉 미카엘의 영혼을 노리고 있었다. 그의 약점(인간으로서의 두려움, 혼란, 분노)을 파고들어 헬페이를 쌓게 만들고, 결국 100 HP를 채워 지옥으로 떨어뜨리려는 사냥꾼들이었다. HP 시스템은 그 싸움의 스코어보드였다.
하루는 각개전투 훈련 중이었다. 낮은 포복으로 진흙탕을 기어가고, 모래주머니를 들고 언덕을 오르는 고된 훈련이었다. 몸은 천근만근이었고,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바로 옆에서 기어가던 동기 하나가 조교 몰래 잠시 멈춰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완전히 질려 있었다.
그때, 앞서가던 분대장이(선임 훈련병 중 조교를 보조하는 역할)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이 김민준과 마주쳤다. 분대장은 입모양으로 김민준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보고해.’ 조교에게 동기의 열외를 보고하라는 신호였다.
김민준의 내면에서 거센 폭풍이 일었다. 보고하면 그 동기는 열외 되어 편해질지 모르지만, 김민준은 동기를 배신하는 행위가 된다. 그리고 보고하지 않으면 분대장에게 찍히고, 조교에게 들키면 연대 책임으로 자신까지 벌을 받을 위험이 있었다.
‘보고해. 네가 살 길이야. 괜히 동정심 부리다가 같이 망하지 마.’
‘아니야, 의리 없게 그러면 안 돼. 동기잖아. 모르는 척해. 분대장에게 거짓말해.’
포보스가 안전한 길(보고)을 유혹했고, 야누스가 동기와의 의리(거짓말/방관)라는 또 다른 선택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무엇이 헤븐페이를 얻는 길이지? 동기를 팔아넘기는 것? 아니면 동기를 위해 규칙을 어기고 거짓말을 하는 것?
‘크크크··· 뭘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해? 그냥 상황 재밌게 만들어봐. 분대장에게 ‘조교님!’하고 소리치면서 저 녀석이 ‘꾀병 부린다!’고 외치면 어떨까? 상상만 해도 웃기지 않아?
푸핫!’
사이코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상황의 심각성을 조롱하고, 그의 고민을 무의미하게 만들며, 충동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을 유도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훨씬 또렷해져 있었다. 마치 그의 바로 곁에서 속삭이는 것 같았다.
세 명의 방해꾼 신들이 그의 영혼을 동시에 공격했다. 공포, 혼란, 그리고 광기. 그들의 속삭임은 너무나 강렬하여, 김민준은 자신의 생각이 무엇인지,
신의 뜻이 무엇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HP/HP 수치는 요동치고 있었다. 어떤 선택을 하든 큰 점수 변동이 있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몸은 진흙탕에 박혀 있었지만, 그의 영혼은 세 갈래의 유혹과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포기하고 싶었다. 그냥 쓰러져서 의무실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지난번 -5 HP의 기억이 그를 붙잡았다. 비겁함의 대가는 너무나 씁쓸했다.
그때, 극심한 혼란 속에서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 희미한 빛이 일었다. 마치 새벽의 차가운 공기처럼 맑고 고요한 기운이었다. 복잡한 생각과 감정, 방해꾼들의 속삭임이 일순간 멀어졌다. 그것은 어떤 목소리도, 어떤 이미지도 아니었다. 그저 *‘바르게.’*라는 순수한 끌림,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라는 직관적인 깨달음이었다. 메티스의 기운이었다.
그 끌림은 강렬한 유혹들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도록 그를 이끌었다. '바르게'. 단순히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진정으로 옳다고 느끼는 것. 후회하지 않을 선택. 동기를 파는 것도, 동기를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도, 그의 영혼은 '바르다'고 느끼지 않았다.
김민준은 진흙투성이인 얼굴을 들었다. 분대장의 눈빛이 재촉하고 있었다.
그는 결심했다.
“분대장님!”
그의 목소리는 힘들었지만 분명했다. 조교들이 일제히 그를 돌아보았다. 분대장의 눈이 커졌다. 동기는 사색이 되었다. 방해꾼 신들의 속삭임이 일순간 멎었다.
“김민준 이병! 뭐 하냐!” 조교의 고함이 터졌다.
김민준은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방금 잠시 멈춰서 숨을 골랐습니다!”
그의 말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자신은 괜찮은 척하면서 동기를 보고하리라 생각했던 분대장은 물론, 실제로 열외 하려던 동기, 그리고 다른 모든 훈련병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교의 표정은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뭐? 네가 멈춰? 봤어, 분대장?” 조교가 분대장을 다그쳤다.
분대장은 완전히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말을 잇지 못했다. “아··· 아니, 저는··· 김 이병이 보고하려···”
그때였다.
[ +10 HP ]
눈앞에 나타난 수치. 이전의 어떤 점수보다 훨씬 높았다.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혹은 자신에게 향할 비난을 알면서도, 진실을 말하고 스스로의 잘못을 고백한 것.
비록 사소한 잘못일지라도, 가장 안전한 선택(가만히 있거나 동기 보고)을 버리고 가장 위험하고 정직한 선택(스스로의 잘못 고백)을 한 것에 대한 HP였다. 방해꾼 신들의 유혹을 이겨내고, 메티스의 이끌림대로 '바르게' 행동한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
조교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뭐라고?! 이 자식이!”
김민준은 혹독한 연대 기합을 예상하며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조교는 그에게 다가와 얼굴을 확인하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허··· 하필 네가··· 오늘 컨디션 안 좋은 건 인정한다. 하지만 다음부터 이따위로 하면 알지?”
의외의 결과였다. 조교는 분명 화가 났지만, 예상보다 훨씬 약한 처벌(혹은 경고에 가까운)로 넘어갔다. 사이코의 영향일까, 아니면 메티스의 조력일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의 선택이 HP를 크게 올렸다는 사실이었다.
진흙투성이 몸으로 다시 포복 자세를 취했다. 방해꾼 신들의 속삭임은 잠시 멎은 듯했지만, 그들의 기운은 여전히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들은 분명 다음 유혹을 준비할 것이다.
김민준은 깨달았다. 이 게임은 단순한 선행/악행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두려움과 혼란, 광기의 유혹 속에서 자신의 영혼이 지향하는 '바름'을 선택하려는 의지 그 자체에 대한 점수였다. 군대라는 감옥은 그의 영혼을 단련하고 시험하는 무대였다.
아직 갈 길은 멀다. 100 HP는 아득하다. 하지만 그는 처음으로 HP를 크게 올리는 방법을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그리고 방해꾼 신들의 목소리가 더욱 명확해진 만큼, 자신의 내면을 지키고 '바르게' 나아가려는 의지 또한 강해졌다.
진흙탕을 기어가는 그의 육체는 고통스러웠지만, 영혼의 저울은 방금 전의 선택으로 인해 아주 조금, 천국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이 기나긴 시험의 끝이 어디일지는 몰랐지만, 그는 계속 나아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