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2화
멕시코 해변 마을을 감싸는 따스한 공기 속에서도, 작가 김작가의 마음에는 조국 대한민국에서 불어온 한기가 깊숙이 스며들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태블릿 화면을 통해 목격한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무능한 정치권이 내놓은 절박한 도피처, '북한과의 연방제 표결'이라는 초유의 사태. 이에 대한 국민들의 극렬한 분노와 시위대의 아수라장.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뇌리에 깊이 박힌 것은, 최전방에서 낡은 슈트를 입고 혹한과 싸우다 국가의 마지막 배신에 절규하는 노병들, '실버군단'의 모습이었다.
그의 내면에 자리 잡았던 막연한 불안감은 이제 명확하고 차가운 확신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정치적 위기나 사회 혼란의 범주를 넘어선 것이었다. 수십 년간 쌓여온 좌절과 분노, 국가에 대한 불신, 그리고 방치된 세대의 절망감이 임계점을 넘어 폭발하려는 거대하고 비정치적인 파국을 향한 움직임. 마치 땅속 깊은 곳에서 거대한 단층이 뒤틀리며 지진을 예고하는 듯한 불길한 기운이었다. 잠자리에 들어도 눈은 말똥 했고, 귓가에는 화면 속 시위대의 함성과 노병들의 탄식이 맴돌았다. 평화로운 해변의 파도 소리조차 불안한 배경음악처럼 들릴 뿐이었다.
그의 뇌리에는 정보기관이 '심각성 낮음'으로 치부했던 '노인들의 쿠데타' 농담이 섬뜩한 현실감을 띠고 떠올랐다. 그때는 그저 씁쓸한 자조에 가까운 블랙 코미디였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은 그 농담이 더 이상 농담이 아님을 소름 끼치게 시사했다. 버려진 세대라 여겨졌던 이들의 극단적인 절망감과, 국가가 그들을 마지막까지 배신하려 한다는 인식.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한데 엉켜 폭발한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정보기관은 노인들의 육체적 능력과 와해된 조직력을 근거로 무시했지만, 만약 그들에게 예상치 못한 수단이나 압도적인 힘이 주어진다면? 그리고 그들을 묶어줄 강력한 동기(국가의 배신)와 명분(연방제 저지, 나라 정화)이 생긴다면?
김작가는 더 이상 평화로운 해변 마을의 관찰자로 머물 수 없음을 깨달았다. 조국은 침몰하고 있었고, 그는 그 배에서 뛰어내렸지만, 여전히 그 배의 일부였다.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무능한 정부도, 분노에 찬 시위대도, 해결책이 될 수 없어 보였다. 파국을 막거나, 아니면 이 파국 속에서 새로운 판을 짜기 위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방식의 개입이 필요했다. 그의 마음은 이미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관찰자의 무기력함을 벗어던지고, 이 위험한 흐름 속으로 뛰어들어야만 했다.
김작가는 곧장 스티브에게 연락했다. 평소의 가벼운 대화와는 다른 긴박하고 진지한 어조였다. 영상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김작가는 복잡한 설명을 생략하고 핵심을 찔렀다. 그는 뉴스에 나오는 표면적인 상황을 넘어, 자신이 감지하는 불길한 기운과 예측 불가능한 파국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특히 전방 실버군단의 동향과 국민들의 극단적인 정서를 강조하며, 이것이 단순한 소란이 아닌 물리적 충돌을 넘어선 거대한 사건으로 비화될 수 있음을 역설했다.
"스티브, 이건 단순한 정치 소동이 아니야. 한국에서 뭔가 거대한 게 터지려 해. 엄청난 혼란이 올 거야. 아마도 전례 없는 방식의... 물리적 충돌을 포함한 사건일 가능성이 높아." 김작가의 목소리에는 긴장이 역력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가장 먼저 통신망이 마비될 거야. 정보가 통제될 거고. 국가는 물론이고, 국민들도 고립될 거야. 그때 필요한 게 너의 스타링크야. 전국적인 통신 두절 상태에서, 특정 대상에게만 통신을 열어주거나 필요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능력... 그게 필요해. 네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해."
스티브는 김작가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는 약간의 놀라움과 함께, 복잡한 데이터를 분석하는 듯한 진지함이 스치는 듯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그래프를 그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국가 통신망 마비... 그리고 선별적인 통신 재개. 기술적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해. 스타링크는 지상망과는 독립적으로 작동하니까. 위성 데이터로 특정 지역의 신호를 차단하거나, 미리 등록된 단말기나 사용자의 신원 정보(KYC)를 기반으로 제한적인 통신 채널을 열어주는 것. 복잡하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야. 오히려 우리 네트워크의 진가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일지도... 하지만... 네가 왜 그런 걸 준비하려 해?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거야? 이건 엄청난 정치적, 심지어 군사적 개입이 될 수 있어. 스타링크가 특정 국가 내정에 개입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고."
김작가는 솔직하게 말했다. "아직 나한테 구체적인 계획은 없어. 누가 뭘 하려는 지도 정확히 몰라. 하지만 내 예감이 맞는다면, 이건 역사적인 사건이 될 거고... 그때 네 능력이 세상을 구할 수도,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핵심적인 열쇠가 될 수도 있어. 무능하게 무너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네 능력을 믿어볼 수밖에 없어." 그는 스티브와의 오랜 우정, 그리고 스타링크라는 압도적인 기술력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스티브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눈빛이 기술적인 계산과 함께 알 수 없는 다른 감정을 담는 듯 보였다. "세계를 연결하는 게 내 목표지만, 가끔은 단절이 새로운 시작을 만들기도 하지. 낡고 비효율적인 시스템은 무너지는 게 당연해. 흥미로운 도전이 될 거야. 좋아, 김작가. 네 감을 믿어보지. 필요한 기술적 지원과 백업 시스템은 준비해 두겠다.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통신 통제를 원하는지, 통신을 열어줄 대상은 누구인지 데이터로 공유해 줘.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이건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야. 우리 둘 다, 그리고 스타링크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 있어. 정말 후회 안 하겠어?"
"후회 안 해." 김작가는 숨을 내쉬었다. 첫 번째 관문은 넘었다. 이제 스티브와 그의 스타링크는 다가올 폭풍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무기가 될 터였다. 그의 결정은 돌이킬 수 없었다.
스티브와의 대화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작가에게 또 다른 연락이 닿았다. 이번에는 스티브처럼 익숙한 상대가 아니었다. 극도로 보안이 강화된, 추적 불가능한 방식으로 연결된 통신 채널. 암호화된 음성 변조를 사용했으며, 발신자의 신원은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상대는 자신들을 '국가를 바로 세우려는 극소수의 핵심 세력'이라 소개했다. 그들은 다가오는 연방제 표결 당일, 국회를 장악하는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 계획에 김작가, 정확히는 김작가와 연결된 스티브의 스타링크 통신망 제어 능력이 필수적임을 역설했다.
"작가님께서 오래전 '실버군단'이라는 아이디어를 처음 제시하셨을 때, 저희는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비록 그때는 묻혔지만, 작가님의 그 정신은 저희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이제 그 아이디어가 현실이 될 때입니다. 국가는 썩어 문드러졌고, 정치인들은 조국을 팔아넘기려 합니다. 젊은 세대는 무기력하고, 기성세대는 방치되었습니다. 더 이상 이대로 둘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국회를 장악하고, 이 나라를 근본부터 정화할 것입니다." 목소리는 감정을 배제한 채 단호하고 확신에 차 있었다. 마치 오래도록 이 순간을 기다려온 듯했다.
김작가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정보기관이 농담으로 치부했던 '노인 쿠데타'가, 상상 이상의 구체적이고 치밀한 계획으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국회 장악. 현직 국회의원 500명 감금. 상상만으로도 엄청난 규모이자, 국가 시스템을 뿌리째 흔드는 행위였다.
"우리의 계획은 오직 순간적인 기습으로만 성공할 수 있습니다. 국회 경비 병력이 제대로 대응하고 외부 지원을 요청하며 상황을 외부에 알리기 전에 모든 것을 끝내야 합니다. 단 몇 분 안에 모든 것을 결정지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선 작전 개시와 동시에 전국적인 통신망 마비가 필수적입니다. 국회 안팎의 통신을 포함하여 외부의 어떤 정보도 오가지 못하도록 완벽히 통제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작전을 지원하거나 최소한 방해하지 않을 소수의 '우호 세력'에게는 제한적인 통신 채널을 가동해야 합니다. 이 역할은 지상망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스타링크만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스타링크의 최고위 인물과 깊이 연결된 작가님만이 이 핵심적인 통신 통제 부분을 성공시킬 수 있습니다."
그들은 김작가의 오랜 이상과 현재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파고들었다. 그가 느꼈던 무력감과 분노를 건드렸다. 조국이 파멸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자, 썩어빠진 시스템을 정화하고 새로운 시작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설득했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광적인 확신과 절박함이 뒤섞여 있었다. 성공하면 구국 영웅, 실패하면 역적. 극단적인 도박이었다.
김작가는 심각한 갈등에 휩싸였다. 이건 단순한 조력이 아니었다. 명백한 국가 반란에 가담하는 것이었다. 그의 평화로운 유목 생활은 끝날 것이고, 그의 목숨은 물론 친구 스티브의 명성과 경력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화면 너머로 보이는 조국의 벼랑 끝 상황, 무능한 정치인들, 배신당한 노병들의 절규, 그리고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국민들의 무기력한 눈빛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파멸을 막거나, 판을 새로 짜거나. 선택지는 극단적이었고, 이미 파국은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의 손에는 이미 스티브의 약속, 즉 거대한 통신망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들려 있었다. 이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지켜보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방치이자 죄악처럼 느껴졌다.
긴 침묵 끝에, 김작가는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조국을 향한 마지막 책임감, 혹은 자신이 뿌린 아이디어의 그림자를 외면할 수 없다는 알 수 없는 의무감이 그를 움직였다. "좋습니다. 협력하겠습니다. 통신 통제 부분은 내가 맡겠습니다. 스티브와의 협력을 통해 작전 실행에 필요한 통신 지원을 제공하죠.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무고한 희생은 없어야 합니다. 최소한의 피해로 목표를 달성해야 합니다."
상대방은 짧고 건조하게 승낙했다. "감사합니다. 작가님의 도움은 계획 성공의 열쇠입니다. 작가님의 조건은 존중하겠습니다. 세부적인 작전 실행 정보와 정확한 통신 통제 시점 및 대상을 곧 암호화된 채널로 공유하겠습니다. 이제 작가님은 단순한 관찰자가 아닙니다. 새로운 대한민국의 탄생에 함께하는 동지입니다."
연결이 끊겼다. 멕시코의 햇살은 여전히 따스했지만, 김작가는 심장 속까지 스며드는 차가움을 느꼈다. 그는 방금, 조국에서 벌어질 전대미문의 쿠데타에 핵심적인 역할을 약속했다. 인터넷 노매드에서 국가 반란의 공범으로. 그의 손에는 이제 그의 오랜 친구의 압도적인 기술력이 들려 있었다. 다가올 폭풍 속에서 그는 어떤 역할을 하게 될 것인가. 그의 결정은 2035년 대한민국의 운명을 뒤바꿀 시작점이었다.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가 삐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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