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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밍 Jan 31. 2024

[산티아고술례길] 민첩하고 유난스러운 아침

산티아고순례길 15일 차




가장 첫 번째 글 : #1 산티아고'술'례길의 시작  https://brunch.co.kr/@2smming/52/
이전 글 : #35 와이파이 없는 마을에서의 단상 https://brunch.co.kr/@2smming/165/


산티아고 순례길 15일 차
2018. 5. 28. 월요일
온타나스(Hontanas) - 프로미스타(Fromista)



민첩한 아침

하루 밤 머문 온타나스는 와이파이도, 술도 없는 곳이라 잠도 일찍 들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눈을 뜨니 확실히 다른 마을의 알베르게보다 일찍 채비를 하는 순례자가 많았지만 절반이 넘는 사람들은 자고 있었다. 소리 없이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오늘은 순례길 15일 차. 익숙해질 때도 되었지만 이렇게 부지런히, 새벽부터 조용히 움직이는 날이면 꼭 가져가야 할 것들을 하나씩 빼먹고는 했다. 특히 없어서는 안 될 치약이나 폼클렌징 같은 걸 말이다. 그럴 때면 결국 코를 고는 소리가 들리는 방으로 다시 들어가 사부작거려야 하는데, 최대한 조심해서 간다고 해도 내 소리에 뒤척이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다.


만약 수건이나 속옷을 잊은 채로 샤워실로 갔다면 그건 그거대로 큰일이다. 보통은 다 씻고 나서 발견하는 편인데 물이 뚝뚝 흐르는 머리를 최대한 눌러 짜고 옷으로 몸에 있는 물기를 닦으며 찝찝한 상태로 수건을 가져오거나, 맨몸으로 옷을 걸쳐 입고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는 수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 경우에도 방문을 열게 되니 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울 수 있다.


더 이상 내 불찰로 사람들의 단잠을 깰 수 없다. 그래서 어젯밤에는 방 안에서 가장 덜 사부작거릴 수 있는 효율적인 동선과, 준비할 때 자주 잊는 것들을 놓고 순서대로 정리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이 메모를 보며 차례차례 준비했다. 이렇게 순서대로 준비하니 시간도 단축하고 모든 걸 빠짐없이 챙길 수 있었다. 방 안에서 딱 한 번만 꼼지락거리면 되니 사람들의 잠을 깨울 가능성도 낮아졌다.


메모

❶일어나자마자 어차피 사부작거리는 김에 침낭을 정리해 말아놓고
❷침대 옆에 널어놓아 말린 옷들을 가방에 모두 넣는다.
❸한쪽에 정리해 둔 오늘 입을 옷과 세면도구 꾸러미를 챙기는데, 반창고/속옷/바셀린이 있는지 확인한다.
❹샤워하러 나갈 때 가방을 포함한 모든 짐을 들고 나와 공용 공간에 놓는다.
❺ 샤워를 한 후에는 공용 공간에서 짐을 정리하며 발에 바셀린을 먼저 바른 후 양말을 신는다.
❻ 출발 전 견과류를 먹고, 물을 가방에서 꺼내기 쉬운 위치에 넣은 후 출발한다.


나는 수지와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10분 전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공용 공간에 앉아있었다. 일반적으로는 수지가 나를 늘 기다리는 편이었는데 이런 적은 또 처음이었다. 내겐 모닝 루틴이 필요했던 것이다. 정리만 잘해두면 빠르고 정확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니 이제부터는 더 적극적으로 매일 아침의 할 일을 이렇게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고요한 거실에 앉아 동이 트지 않아 시퍼런 새벽빛이 들어오는 창가를 보며 마음속으로 기뻐했다. 어제보다 오늘 더 민첩해진 것 같다고.





아침 유난

모든 끼니는 함께 먹는 사람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수지는 최고의 친구였다. 잘 먹고, 맛있게 먹으며, 음식을 가리지 않는다. 아침을 먹을 때도 늘 그랬다. 적어도 두 잔 이상의 음료를 시키고 꼭 음식을 시켜 푸짐하게 먹었다. 그리고 어떤 음식이든 진심으로 대한다. 한 입 먹고 나서 '맛있어~!'란 말을 아끼지 않는다. 덕분에 함께 먹는 아침은 매번 더 맛있고 귀하다.


오늘 아침도 그랬다. 우리는 커피와 오렌지 착즙 주스와, 또르띠야(스페인식 오믈렛)를 시켜놓고는 오래오래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카페의 주인은 죽치고 앉아 아침을 먹는 우리가 재밌었던지 우리와 눈이 마주치면 사람 좋은 표정으로 자꾸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커피 정도만 시키고 바삐 발을 옮기는 사람들 속에서 수지와 난, 그 가게에 오래 머무는 유일한 손님이었다. 움직이는 걸 더 중요하게 여겨 걸으면서 씨리얼바나 빵을 먹거나, 아침밥 자체를 건너뛰는 사람들도 많은 곳이 바로 이 길, 산티아고순례길이었다.



사실을 고하자면 한국에서는 고등학교 때부터 아침을 챙겨 먹지 않았다. 밥 한 숟가락 먹고 가라는 엄마의 말에도 꿈쩍 않던 내가 이곳에 와서는 유난이다. 일어나자마자 배가 고프기 시작하고, 걷다가 연 바르(bar)가 없다면 우울해지기 시작한다. 떨어져 가는 에너지가 그 어느 때보다 극심하게 느껴지며 발을 옮기는 게 힘에 부친다. 그러다 아침을 파는 곳을 만나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만약 선택할 수 있는 아침 메뉴가 많다면 더없이 기쁘다.


아침으로는 늘 요깃거리를 할 수 있는 음식과, 졸린 눈을 뜨게 해 줄 카페 콘레체(카페 라테)를 시킨다. 오렌지 착즙 주스는 마지막까지 고민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옵션이다. 거기에 시간이 조금 더 넉넉하다면 맥주나 술을 시킨다. 남들은 산티아고 순례길에 와서 하루 10유로로 삼시 세 끼를 해결한다는데, 이렇게 시키면 아침밥만 10유로가 넘을 때도 있다.


이제 아침밥은 오늘의 시작점에서 내게 주는 꼭 필요한 연료 같은 존재다. 음식도, 커피도, 술도 그렇지만 우연히 만나는 순례자들과의 스몰톡도 그렇다. 오다가다 인사만 몇 번 했던 순례자들의 길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나누는 시간이 소중하다. 왜 이 길에 왔는지, 원래는 무슨 일을 하는지 듣는 게 왜 이리도 재밌는지. 길에서의 인연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이 길에 대한 애정은 더 커져간다.


바르(bar) 주인의 인심을 듬뿍 받는 것도 무한한 응원이 된다. 새벽부터 준비한 아침밥에는 순례자가 배를 든든히 채울 수 있는 정성이 가득 어려있다. 음료를 시키면 잔을 가득가득 채워주며 '누가 어제 위험한 사람을 만났다고 하니 조심해라'와 같은 걱정을 함께 건네준다. 다 먹고 길을 나서는 내가, 혹시 듣지 못할까 'Buen Camino(부엔 까미노)'와 'Take Care' 같은 응원의 말도 큰 소리로 외쳐준다.


이제 내게 아침은 단순히 하나의 끼니가 아닌 중요한 시간으로 자리 잡았다. 걸어내는 단단한 힘을 길러내는 시간이면서도 오늘 걸어갈 길에 대해서 골똘할 수 있는 시간. 나를 예열하는 시간이면서도 순례자들의 이야기로 길에 색이 입혀지는 시간, 그리고 이유 없는 따뜻한 응원으로 가득 채워지는 시간이다. 그래서 이렇게 유난스럽게 아침밥을 챙긴다.




모두가 모이는 바

오늘은 마을과 마을 사이가 애매했다. 아침밥을 먹을 때에도 좋은 때에 연 바르(bar)가 없어서 걸은지 2시간이 넘어서야 배고픈 상태에서 밥을 먹었었는데 점심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쭉 뻗은 길이 계속되다가 오후 1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마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행히 배고픔을 보상받을 수 있을 만큼 다양한 메뉴가 있었다. 보까디요(bocadillo, 거친 질감의 빵으로 만든 샌드위치)만 있으면 어떻게 하지 싶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이곳에는 햄버거도, 샐러드도, 토스트처럼 생긴 샌드위치도 있었다. 오랜만에 먹는 촉촉한 질감의 샌드위치였다.


오늘 길에 바르(bar)가 잘 없는 탓인지 이곳에는 낯익은 순례자들이 계속 들어왔다. 가끔 마주치며 인사 정도만 하던 친구들부터 예전부터 자주 만났던, 일본에서 라멘 회사에 다닌다던 아미꼬도 만날 수 있었다. 아미꼬는 오늘은 그만 걸을 거라며 이 마을에서 짐을 풀었다고 했다. 아미꼬는 막 머리를 감고 나와 몸에서 좋은 냄새도 나고 머리도 촉촉해 보였는데 너무 부러웠다. 앞으로 4시간은 더 걸어야 하는, 땀으로 찝찝해진 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진짜 맛있었던 햄버거와 포켓 샌드위치, 그리고 올리브 샐러드


아미꼬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이 바에는 계속해서 순례자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작은 마을에 있는 금방 북적대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오며 가며 얼굴을 익혔던 순례자가 하나 더 있었는데 가방에서 신기한 게 하나 나왔다. 바로 작고 동그란 마사지볼이었다. 그는 마사지볼을 바닥에 놓고, 양말을 벗은 맨발로 볼을 굴리고 있었다. 수지랑 내가 관심을 갖자 너무나 흔쾌히 한 번 해보라고 말했다. 작고 단단한 마사지볼 위에 내 체중을 싣고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찰나의 욱신거림뒤로 시원함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사실 자신의 마사지볼에 남의 발이 닿는 걸 좋아할 사람은 없으니 오래 올라서있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발의 아치를 궁굴릴때마다 한 겹씩 없어지는듯한 통증에 체면은 잊고 근육을 푸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공을 밀어낼 때마다 다리가 날아갈 듯이 가벼워지고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와서 이렇게 발이, 다리가 가벼운 적은 처음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올 때 어떤 준비물이 필요한지 철저하게 확인하지는 않았었지만, 어떤 글을 봐도 마사지볼을 가져갔다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올 때 꼭 잊어서는 안 되는 준비물이 바로 마사지볼이었다. 절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말이다.


점심에도 빠질 수 없는 맥주



홀로 또 같이

수지는 프로미스타(Promista)까지는 걷지 않고 그 앞 마을에서 머문다고 했다. 나는 '곧 다시 만나!' 씩씩하게 이야기하고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혼자 걷는 길이 쓸쓸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전에는 지극히 혼자인 채로 걷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사람들과 함께 걷는 것도 물론 좋지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의 총량이 줄어든다고 생각했다. 막상 걸어보니 사람들과 같이 걷는다고 해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하루의 공간이 침해받는 건 아니었다.


만약 오늘은 좀 고요하게 걷고 싶다면 이야기만 하면 되었다. '오늘은 천천히 걸을게.'라고 하거나 '내일이나 모레쯤 숙소에서 만나'라고 이야기해도 되었다. 같이 걷는다고 해서 무조건 같은 속도로 걸을 필요는 없었다. 순례자들은 이 길 위에서의 의도적이면서도 우연한 만남을 이해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함께 걷지 않았는데 몇 번 마주치다가 결국 같이 걷게 되는 사람들, 같이 걷기 시작했지만 모종의 이유로 따로 걷는 사람들, 걷는 것은 각자 걷되 숙소에서만 만나는 사람들, 아예 처음부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만나자고 하고 걷기 시작한 사람들, 어디서 만나자고 했지만 만나지 못하고 엇갈려버리는 사람들... 다양한 걷는 관계가 이곳에서는 자연스러웠다. 나도 와글거리며 함께였다가 오롯이 혼자인 상태를 넘나들었다.



같이 걸으면서 느낄 수 있는 좋은 점들도 분명 존재했다. 걸음이 처지기 시작하면서 점점 땅을 보기 시작할 때 아름다운 광경을 보라고 손짓해 주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면서 걸음에 가속도를 붙여주는, 다른 이의 삶의 궤적을 듣는 귀한 시간이 그랬다.


몇 해전, '한 사람이 내게 온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이 온다는 것이다.'라고 적혀있던 광화문 교보문고의 현판을 기억한다. 있는 거라고는 길과 나무와 하늘밖에 없는 이 길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털어놓고는 했다. 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하나씩의 인생이 다가왔다. 어떨 때는 어머니의 병환에 희망을 찾기 위해 본업도 그만두고 이곳에 떠나온 이의 간절함, 지금의 연인이 진정한 짝인지 아닌지를 마지막으로 확인하러 오는 사람의 미묘한 확신, 자신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던 이의 혼란함, 심장병이 있지만 링거를 맞으면서도 길을 걷는 강인함, 아빠와 딸이 함께 걸으며 오손도손하는 다정한 마음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럴수록 절대적인 평범함은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사람마다의 삶이 모두 달랐다. 그리고 이를 활자가 아닌 일상 속에서 마주하고 느낄 수 있는 건 행운이었다.

 

순례길의 절반을 향해가고 있었다. 길을 걸을 때나 성당에 갔을 때, 바에 갔을 때마다 괜히 사람이 있으면 아는 사람일까 한 번 더 쳐다보곤 했다. 벌써 길에서 보고 싶은 얼굴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벌써 길이 끝나고 나서는 못 볼 얼굴들에 서러워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프로미스타에 홀로 도착해 추천받아 산 리오하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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