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14일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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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14일 차
2018. 5. 27. 일요일
부르고스(Burgos) - 온타나스(Hontanas)
산티아고순례길을 걷다 보면 마의 4km 구간이 있다. 하루에 30km든, 40km든 아무렇지 않게 걷는 편이지만 몇 km를 걷든, 심지어 20km를 걷는다고 하더라도 마지막 4km는 정말 힘들다. 4km는 보통 걸음으로 딱 한 시간 정도 걷는 적당한 거리인데도 말이다. 발과 무릎은 불이 나듯 후끈후끈해지고 배낭은 어깨를 꽈악 짓누르며 땅으로 나를 누른다. 다리에는 점점 힘이 풀려 자꾸 삐끗거린다.
그런데 몸보다 힘든 건 마음이다. 핸드폰으로 지금 위치가 어디인지 확인하는 빈도가 높아져만 간다. 이 정도면 많이 걸었다 싶어 핸드폰을 다시 확인해 봐도 고작 400m 걸었고, 또다시 확인해 봐도 목적지까지는 아직 많이 남았다. 줄어들지 않는 km에 속이 탄다. 당장 샤워하고 누워있고 싶다. 그만 걷고 택시나 타고 싶은 마음을 걸음마다 죽이고, 죽이고, 한참 죽여야만 저 멀리 마을이 보인다.
그런데 아무리 걸어도 오늘 머물 마을 온타나스가 눈앞에 보이지 않았다. 지도 앱을 보니 3km 남아있었다. 보통 이 정도 남았으면 저 멀리 마을 비스무리 한 게 보일법도 한데 시선 끝엔 넓은 평야뿐이었다. 길을 잘못 들어버린 건 아닐지 두렵기 시작했다. 만약, 잘못 들었다면 얼마나 더 걸어야 할지도 걱정이었다. 핸드폰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방향을 다시 확인해 봤는데 분명 방향은 맞았다. 함께 걸었던 수지도 점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50걸음에 한 번씩 불안을 뱉었다.
"우리 잘 걸어가고 있는 거 맞겠지?"
이런 막막하고 두려운 마음을 산티아고 순례길 첫날에 느껴본 적 있다. 아무리 걸어도 걸어도 숙소에 도착할 수 없었던, 결국 거의 저녁이 되어서야 도착한 첫날에 말이다. 지금 상황이 딱 그 꼴이었다. 두렵고 초조한 마음을 우리는 '아씨오 온타나스' 같은 아무 말로 승화시켰다. 그러다 수지가 '저기 있다'하고 외쳤다. 손가락 끝을 따라가 보니 한참 아래를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가 걷고 있는 길에서 아래 지대에 마을이 위치하고 있어서 안 보이던 거였다. 에이, 난 또 진짜 더 걸어야 하는 줄. 정말 다행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맥주로 해갈하고 주린 배를 햄버거로 달래고 마을 한 바퀴를 돌아보았는데 마을이 생각보다 아주 작았다. 슈퍼처럼 보이는(술을 구매할 수 있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 통신이 거의 터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숙소에서도 와이파이가 한 칸, 두 칸을 와리가리 하더니 자꾸 통화 가능 표시가 꺼졌다. 어떻게든 통화 신호를 받아보려고 핸드폰을 쭉 내밀며 마을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저 멀리서 누가 나를 불렀다. 바로 일주일 전쯤 로스 아르코스에서 만났던 포르투갈 부부, 빌레니랑 바뇨*였다.
빌레니랑 바뇨를 이렇게 작은 마을에서 만날 줄 몰랐던 나는 소리를 꺅 지를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함께 나눴던 이야기를 마음속에 새기며 걷고 있는 중이었다. (가끔은 혼자 벅차올라 울기도 했다.) 우리는 너무 반가워서, 여기서 만났다는 사실이 너무 소중해서 서로를 와락 안았다. 나를 안고는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정감이 느껴졌다.
빌레니와 바뇨에게 순례길이 끝나면 포르투갈로 여행을 갈 거라고 하니 혹시 여유가 있다면 자신들의 집으로 오라는 초대를 받았다. 이메일도 교환하고 한참 이야기를 하다가 이 마을은 와이파이가 거의 터지지 않을 거라는 슬픈 이야기를 들었다. 술을 살 수 있는 곳도 찾지 못했다는 슬픈 소식 하나를 더 들었다.
설마 하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와이파이 표시가 분명 있긴 하지만 카카오톡이 잘 보내지지 않았다. 네이버 홈화면 진입도 거의 불가능했다. 프런트로 가보니 직원이 퇴근했는지 술을 살 수도 없었다. 여기는 와이파이도, 술도 없는 자연 그 자체였다.
*빌레니, 바뇨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 18화, 부엔까미노
작은 마을은 어둠도 빨리, 짙게 깔렸다. 다른 마을의 알베르게보다 훨씬 이른 시간인데도 숙소의 불이 꺼져있었다. 알베르게의 내 방으로 조용히 돌아온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우선 침대에 누웠다. 원래 같으면 숙소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핸드폰을 만지는 소리가 나는데 다들 핸드폰이 터지지 않는지 잠에 든 사람들이 많았다. 여기서도 늦게 잠에 드는 편인 난 멀뚱멀뚱 천장만 쳐다보고 있다가 이참에 생각을 좀 정리해볼까 싶었다. 핸드폰 플래시 빛이 삐져 나갈까 봐 이불을 쓰고 정말 오랜만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2018. 05. 27. 일요일
1. 길을 걷는 삶은 생각보다 더 심플하다. 오늘 하루 한 일을 정리해 보자면, 일어나서 준비하고-걷고-쉬고-생각하고-먹고-걷고-씻고-빨래하고-빨래를 말리고-내일 목적지를 정하고-잘 준비를 하는 거다. 크게 나누면 걷고, 생각하고, 쉬고, 먹고, 씻고, 빨래하는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그런데도 시간이 많이 든다. 이렇게 단순한 일들을 이렇게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일인지 몰랐다. 한국에서는 늘 이렇게 살지 않았던 까닭이다. 생각보다 우리가 삶을 잘 영위하려면 하루의 부분 부분에 그만큼 마음과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사실이 생경하게 다가온다. 삶에 대한 가치관이 점점 변해가는 걸 느낀다. 여태까지는 이렇게 살아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다.
2. 걸으면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보다 '나의 상태'다. 처음에는 순간마다 나를 챙겨야 하는 게 썩 어색해 생각을 건너뛰곤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몸은 가시적인 결과를 보여준다. 물집이 생기거나, 접지르거나, 허허벌판에서 갑자기 화장실을 가고 싶다거나, 컨디션이 급격하게 저하되거나.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순간순간 확인해야 한다. 지금 목이 마른 지, 배는 적당히 불렀는지, 걷는 자세가 비뚤어지지는 않았는지, 심지어는 신발끈을 동여맨 압력과 배낭의 끈을 얼마큼 당겼는지도 내게 영향을 준다.
길을 걸으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을 두 개로 압축해 보자면, 'Buen Camino(안녕)'과 '괜찮아?'다. 나를 지나쳐 가는 모든 사람이 내게 그 말을 한다. 처음에는 으레 던지는 인사말이겠거니 싶었지만 알고 보니 이 길에서 가장 중요한 물음이었다. 그리고 그 물음을 받았을 때는 제대로 답변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냥 '나 괜찮아' 하고 넘기지 말고 정말 내가 괜찮은지 돌아봐야 한다. 체력이 약한 것처럼 보일까 봐 오기로, 습관적으로 괜찮다고 말하면 언제나 좋지 않은 결과로 나타난다. 정말 내 몸 상태를 꼼꼼하게 생각해야 한다.
3. 나도 그랬고 사람들도 산티아고순례길을 어렵고 힘든 길이라고 생각하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그렇지 않다는 걸 느낀다. 정말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이 길을 걷는다. 몸이 좋지 않으신 분들도 약을 먹어가며, 버스나 택시를 중간중간에 이용해 가며 걷는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걷는 것에 욕심부리지 않는 것에 있다.
전에 해녀는 하나만 더 잡고 뭍으로 올라가야지 하는 욕심을 부리는 순간 화를 입고 만다는 걸 들은 적이 있다. 해녀에게는 각자마다 정해진 '숨'이 있어서 그 숨만큼만 물질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욕심을 끊어내지 못하고 바다 안에서 물숨을 쉬게 된다면 그대로 바다에 가라앉아 생을 달리한다고 했다. 그때는 어떻게 사람이 당장 숨을 못 쉴 것만 같은데 욕심을 부릴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산티아고순례길을 걷는 이제야 그 마음이 가늠이 된다.
통상적으로 1시간 정도를 걸으면 5~10분 정도 쉬어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걷다 보면 쉽게 멈춰지지 않는다. 바짝 올라온 걷기 페이스가 무너질 것 같아서도 두렵고 쉬는 게 귀찮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뒤처지는 것도 싫고, 빨리 도착해서 쉬고 싶은 마음도 크다. 그러다 보면 30분만 더 걷고 쉬어야지, 저 나무를 지나면 쉬어야지 하면서 계속 걷게 된다.
등산화 안으로 자갈이 들어가거나 끈을 제대로 동여매지 않았을 때도 마찬가지다. 멈춰서 자갈을 빼고, 제대로 끈을 묶고 걸어야 하지만 자꾸 앞으로 치고 나가고 싶은 마음이 내 눈과 마음을 가린다. 결국 물집이 생기거나 물집을 피하기 위해 엄한 곳으로 땅을 디뎠다 몸을 다친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져 목적지보다 한참 덜 가서 멈추기도 한다. 나도 그랬고, 점점 몸이 좋지 않아져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 길은 걷는 것보다 멈추는 게 더 중요한 길이다. 해녀들의 숨처럼, 딱 내가 걸을 수 있는 걸음만큼만 걸어내야 한다. 욕심을 버리고 겸허한 마음으로 걷자. 그래야만 다시 내일의 걸음을 걸을 수 있다.
오늘은 덜 술람찼지만 보람찼던, 여기는 산티아고순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