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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밍 Jun 12. 2023

[산티아고술례길] 날씨가 더우면 맥주 수혈

산티아고 순례길 14일 차, 더운 날씨엔 맥주, 그리고 맥주



가장 첫 번째 글 : #1 산티아고'술'례길의 시작  https://brunch.co.kr/@2smming/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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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14일 차
2018. 5. 27. 일요일
부르고스(Burgos) - 온타나스(Hontanas)



믿을 수 없는 하늘과 풀밭

도수가 센 술을 한 잔 때려 먹고 걷는 기분은 '째진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얼굴도 몸도 후끈후끈하지 아직 술의 향이 입과 코에 맴돌지. 여기가 바로 천국 같다. 한껏 술과 행복에 취해 걷고 있는데 진짜 천국 같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간간이 보이던 낮은 건물들은 모두 사라지고 양옆으로 초록초록한 풀밭이 펼쳐졌다. 구름은 낮게 내려와 드넓은 하늘을 드리웠다. 하늘은 지금까지 걷는 중 가장 파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렇게 하늘은 푸르르고 구름이 예쁘게 보였던 날이 없었다.


첫날부터 비를 맞으며 시작했던 길이었다. 심지어 이상 기후라 산 높은 곳에서는 5월에도 눈이 내렸다. 자주 비가 올 것처럼 구름이 울먹거리고, 소나기를 맞은 적도 많아 어느 새부터 우비는 배낭에서 손쉽게 꺼낼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 이렇다 보니 맑은 하늘을 언젠가부터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여기서부터는 아무 보정도 하지 않은 원본 사진입니다


그리고 느껴졌다. 오늘 보는 이 풍경이 산티아고순례길에서 보는 가장 멋진 풍경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수지와 나는 한 걸음씩을 아껴 걸었다. 한 걸음에 사진을, 한 걸음에 감탄을 하고, 멈춰서 넋을 놓고 있다가 다시 걸었다. 들숨에 '와', 날숨에 '미쳤다'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정경이었다.


항상 서양 회화 작품을 보면서 그림에 그려진 구름이 지나치게 미화되었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화가들은 과장 없이 진짜 구름을 그려냈던 게 맞았다. 동글동글하고 몽실거리는 색이 다채로운 구름이 운을 이루는 모습이 정말로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군데군데 피어있는 노랗고 빨간 들꽃에, 언덕을 넘으면 또 다른 색깔로 펼쳐지는 들판에, 또 다른 언덕을 넘으면 모습을 바꾸는 하늘에 수 천 번쯤 경탄했을까. 이제는 윈도우 바탕화면 같은 비현실적인 경관이 눈에 보였다. 그래픽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오차 없는 언덕의 곡선과 하늘이었다. 여기서는 정말 걷기가 싫었다. 사람들도 여기서는 아예 작정하고 배낭을 내려놓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은근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 모습을 잘 보지 못했는데 이곳은 다들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여기저기서 분주한 셔터 소리가 났다. 따가운 햇볕 아래였지만 모두가 눈을 접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맥주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일장일단(一長一短). 하나의 장점이 있으면 하나의 단점이 있다는 옛 어른들의 이야기가 하나도 틀린 게 없다. 분명히 360도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던 풍경에 거대한 감동을 먹었지만, 이는 나무 하나 우리의 시선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즉, 우리는 두 시간이 넘어가도록 그늘 하나 없는 땡볕 아래 길을 걸었다.


높은 기온에 이미 땀이 난 지는 오래고, 심지어 앉아서 쉴 수 있는 그늘도 없던 탓에 휴식 없이 내리 두 시간을 걸었다. 그냥 길에 철퍼덕 앉아 버릴까 싶었지만 땅의 기온도 높아질 대로 높아져서 '앗 뜨거'하며 일어날 게 뻔했다. 등산화 안에서 발은 발대로 아파오고 있고 가져온 물은 아까 떨어졌다. 나는 따가운 햇살에 선크림을 바르지 않은 팔이 탈까 봐 얇은 겉옷도 벗지 못한 상태였다. 검은 겉옷은 스페인의 맹렬한 햇살을 다 빨아들이는 것만 같았다.


맥주, 빨리 맥주를 마시고 싶었다. 케그에서 콸콸콸 쏟아져 나오는 맥주, 꿀꺽꿀꺽 삼키면 목구멍을 타타탁 치고 지나가는 라거 맥주, 탄산에 코까지 뻥 뚫리는 맥주. 안팎으로 열이 나고 있는 이 증상을 치료해 줄 구원자는 라거밖에 없었다. 아까 풍경의 아름다움을 논하던 입은 금세 세속적으로 변했다. (인간이 이렇게 간사하다) 내가 떠올리고 뱉을 수 있는 말은 오직 맥주뿐이었다. 내 걸음마다의 염원도 '맥주'에 담았다. 걸음 하나에 라거와/걸음 하나에 레몬 맥주와/걸음 하나에 맥주 순수령과/걸음 하나에 하면 발효*와/걸음 하나에 mahou, mahou**


문이 닫힌 바에 두 어번쯤 실망하고, '넥슨님 맥주 좀 뿌려주세요'와 같은 허무맹랑한 말을 지껄이기 시작할 때! 드디어 만났다, 맥주집.


얼른 맥주 한 잔을 사뿐히 원샷으로 목구멍에 흘려보냈다. 단전에서부터 캬- 소리가 절로 나왔다. 햇볕에 달궈졌던 몸이 일순간 식었다. 역시 맥주는 술의 탈을 쓴 부루펜임에 틀림없다. (부루펜 로고와도 색이 닮았다)


*하면 발효 : 라거의 발효 방법. 저온에서 발효하면 효모가 발효 탱크의 바닥에 가라앉아서 이름 붙여졌다. 반대말은 상면 발효이고, 에일이 상면 발효로 만들어진다.

**mahou :  스페인의 맥주 브랜드. 산티아고순례길 프랑스 길에 있는 바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드디어 만난 라거와 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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