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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밍 Jun 05. 2023

[산티아고술례길]달달하고 쌉싸래한 주정 강화 와인 발견

산티아고 순례길 14일 차, 모스카델 주정 강화 와인을 만나다

 


가장 첫 번째 글 : #1 산티아고'술'례길의 시작  https://brunch.co.kr/@2smming/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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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14일 차
2018. 5. 27. 일요일
부르고스(Burgos) - 온타나스(Hontanas)


첫 날과 사뭇 다른 부르고스 대성당


원래는 웅민이와 수지와 함께 걸을 생각이었는데, 웅민이는 몸 컨디션이 좋지 않아 부르고스에서 하루 더 머물기로 하고 나와 수지는 출발하기로 했다. 다시 같이 걷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떨어진다. 오늘 아침에 본 웅민이의 아픈 얼굴이 영영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이 길은 변수가 가득하다. 이 길을 걷고 있는 나도, 날씨도, 내 컨디션도, 내 부상 여부도, 가방의 무게도 모두 변수다. 오직 놓인 길만 상수인 곳이다. 그렇기에 내가 언제쯤에 어디에 가닿아 있을지 가늠할 수가 없다. 함께 오며 가며 만나는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헤어지며 'See you'나 'Hasta Luego(곧 다시 만나)'라고 말했고 그렇게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만, 점점 산티아고에 가까워져 가며 이제는 '곧 다시 만나'보다는 'Adios'나 '사요나라'의 느낌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오늘은 14일 차, 내가 걸을 길의 중간 즈음에 거의 다가섰다. 이제는 정말 만남에 작별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걸 느낀다.




걸어도 걸어도 끝나지 않는 부르고스



오늘은 온타나스(Hontanas)까지 걷기로 했다. 30km 정도 걷는 적당한 거리라 기운을 내서 시작했지만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부르고스는 큰 도시라 아무리 걸어도 부르고스를 넘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부르고스 대성당을 지나고, 사람들이 운동하는 공원을 지나고, 또 걸어서 1시간 20분께에 드디어 도시의 경계에서 벗어났다.





도시를 벗어났다 싶더니 이제는 한동안 평야였다. 큰 고속도로를 지나고, 여러 논과 밭을 지나도 바(bar)는 하나도 없었다. 이미 침대에서 늦장을 부려 출발한 탓에 보통 아침 먹는 시간은 이미 넘었다. 우리의 대각선 머리 위로 떠오르는 태양은 점점 뜨거워져가고 우리는 점점 배가 곯았다.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드는 것조차 힘들고, 입은 바짝바짝 마르고, 송골송골 맺히는 땀을 손으로 훔치며 배가 고프다는 말을 백 번쯤이야 했을까. 드디어 활짝 문을 연 바를 하나 발견했다. 언제나 그렇듯 허기에 바를 발견하면, 과장이 아니라 정말 울컥한다.


게다가 여기는 진짜 '샌드위치'를 파는 곳이었다. 빵과 빵 사이에 양파와 양상추를 넣어주는 신선한 샌드위치. 이런 곳에서는 또 술도 음식도 든든히 먹어줄 수밖에 없다. 주변 테이블을 보니 낯선 술 하나가 다들 놓여있었다. 이름을 물어보니 '모스까델(Moscatel)'라고 했다. 아니 시킬 수 없다.


모스까델도, 샌드위치도,
카페 콘레체도, 오렌지 주스도 주세요.
네, 음료 세 잔이 맞아요.



금방 테이블에 잔들로 가득 찼고 수지는 음료만 즐비해있는 내 자리를 보고 웃었다. 하지만 말짱한 정신으로 나를 깨워줄 카페 콘레체도, 샌드위치와 함께 먹을 오렌지 착즙 주스도, 남들이 다 시키는 저 '모스까델' 술 중 어느것도 포기할 수 없었다.


갈색이 도는 저 모스까델 술은 기대보다 더 맛있었다. 한 모금 꿀꺽 넘길 때, 첫맛은 분명 달달한데 끝맛에 묵직한 알코올감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청량했다. 이럴 수가. 엄청 무겁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날아가듯 가볍지도 않은 맛이라니. 그러면서 호두파이 같은 고소한 맛이 나다니. 달긴 단데 고고하게 달고, 바디감이 있는데도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알! 콜!'같은 느낌은 없었다.


마시면 마실 수록 자꾸자꾸 마시고 싶은 맛이었다. 지금은 무려 아침 열시 반에 만난 첫 바지만 술을 마신 순간 오늘 여정을 끝내고 싶었다. 여기서 이렇게 한 잔으로 쫌쫌따리 마실 술이 아닌, 좋은 안주와 함께 뒤풀이를 해야 할 것 같은 술이었다. 은은한 취기가 향긋하게 올라왔다.


찾아보니 모스카텔은 포도 품종을 이르는 말이었다. 포르투갈에서 나는 뮈스까(Muscat) 포도 품종인데 주로 주정 강화 와인*을 만든다고 했다. 이 술도 병입 전 오크 숙성을 거친 주정 강화 와인이었다. 주정 강화 와인으로는 포트 와인(포르토 지역)과 셰리 와인(스페인 헤레스 지역)이 유명해 이 두 종류의 주정 강화 와인만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또 다른 지역의 주정 강화 와인을 여기서, 우연히 만나게 되다니. 아무래도 이 길에서 주신(酒神)님이 주신 은혜가 틀림없었다. 믿습니다. 주멘-


*주정 강화 와인이란? : 주정 강화 와인은 일반 와인보다 알코올 도수를 더 강화한 와인으로 프랑스-영국의 백년전쟁과 관련이 깊다. 영국은 백년전쟁 이후 프랑스와 사이가 나빠지며 보르도에서의 와인 수입이 어려워졌다. 차선책으로 찾은 수입처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는데 보르도보다 거리가 멀어 배로 와인을 운송하는 중 변질되는 사고가 많아졌다. 뙤약볕 아래 운송되어야 하는 환경 및 장거리 항해에도 와인맛이 변하지 않을 방법은 더 이상 술이 익지 않도록(효모가 발효되지 못하도록)하는 것이었고, 효모 활동이 멈추는 18~20도의 알코올 도수를 맞추기 위해 브랜디의 원액을 첨가해 운송하게 되었다. 달콤한 맛과 알코올 도수가 높은 게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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