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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밍 May 29. 2023

[산티아고술례길]스페인 술집에서 보는 챔피언스 리그

산티아고 순례길 13일 차, UEFA 결승 : 레알 마드리드 - 리버풀






가장 첫 번째 글 : #1 산티아고'술'례길의 시작  https://brunch.co.kr/@2smming/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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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13일 차
2018. 5. 26. 토요일
부르고스(Burgos) - 빌바오(Bilbao) - 부르고스(Burgos)


                                                                                            
 빌바오에서 다시 부르고스로 넘어가니 벌써 저녁 시간이 다 되었다. 오늘은 내가 멈추거나 너무 많이 걷거나 해서 떨어졌던 수지와 웅민이를 다시 만나는 날이다. 그리고 오늘은 2017-18 UEFA 챔피언스 리그의 결승날이다. 경기는 레알 마드리드 vs 리버풀, 스페인 대 영국이었다. 딱 그날에 다들 부르고스에서 만날 수 있어 함께 모여 경기를 보기로 약속했었다.


웅민이는 몸이 좋지 않아 숙소에서 쉬고 수지와 함께 나와 오늘 축구를 볼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결승전은 거의 밤 열 시에 시작하는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분위기가 어제와 확연히 달랐다. 도시에 사는 모두가 거리로 쏟아져 나온 듯 사람들이 많았고 레알 마드리드의 유니폼을 입거나 스페인 국기를 두른 사람들도 있었다. 다들 맥주나 와인 한 잔씩을 걸친 듯 잔뜩 들떠있는데 호탕한 스페인 아저씨들의 웃음소리가 귀를 울렸다. 경기 시작도 전인데 분위기는 이미 레알 마드리드가 이긴 것 같았다.


 


우리도 나름 일찍 움직였는데 이미 바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TV가 설치된 바는 문 밖까지 사람이 꽉 찼다. 구글 맵 평점을 봐가며 찜해 두었던 바 몇 개도 자리가 없었다. 앉을 수만 있는 바를 찾으려 열 번 정도 입장을 거부당했을 때, 운 좋게 TV가 있는 바가 딱 한 자리가 비어 냉큼 들어갔다. 바를 찾는 와중 전반전이 이미 시작해 문밖에서 함성 소리만 듣고 있었던 터라 마음을 졸였는데 아직 아무 골도 나지 않은 상태였다. 다행이었다.

 


오늘 함께할 술은 샹그리아와 맥주! 그리고 patata(감자)라고 써진 어떤 메뉴들을 시켰는데, 볶음과 튀김 사이의 감자요리가 나왔다. 그냥 감자를 요리해 소스만 뿌린 것 같은 단출한 요리인데 자꾸 손이 갔다. 감자 본연의 달큼한 맛에 콕콕 박혀있는 소금, 그리고 고기 맛이 베이스인, 그레이비소스와 닮은 오묘한 소스까지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흥미로운 경기를 보며 하나씩 집어먹는 용으로 맛도, 편리함도 딱이었다. 가장 먼저 시킨 샹그리아와도, 맥주와도 궁합이 좋았다.


 

경기를 보는 대부분은 레알 마드리드의 팬이었다. 레알 마드리드가 공을 잡으면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지고 리버풀이 공을 잡으면 다 같이 입맛만 쩝쩝 다셨다. 레알 마드리드가 한 골 넣자 술집은 거의 광란의 분위기였다. 어찌나 함성이 컸던지 경기가 끝난 줄 알았다. 그 와중에 유난히 표정이 좋지 않은 리버풀 팬이 있었다. 누가 봐도 스페인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보였는데 레알 마드리드가 승기를 잡을 때마다 한 구석에서 맥주를 연거푸 마셨다. 그러다 이내 리버풀도 한 골을 넣었다. 당연히 사람들은 야유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 생각보다 더 기뻤나 보다. 행복한 표정으로 승리의 제스처를 (소심하게) 취했다. 당연히 주변 시선이 고울 리 없다. 몇몇 스페인 사람들은 시비를 걸기도 했다. 그 광경이 너무 웃퍼  한참을 몰래 킥킥댔다. 정말 내 생각보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축구에 더 진심이었다.

 

경기는 두 골을 더 넣은 레알 마드리드의 3-1승으로 끝났다. 승리가 확정되자 사람들은 미쳐(?) 갔다. 밤이 늦었는데도 다들 잠을 잘 생각이 없는 듯 휘파람을 불고, 노래를 부르고, 학생인 것처럼 보이는 청소년들은 뛰어다녔다. 이국에서 느끼는 이 분위기가 못내 흥겨워 우리도 거리의 분위기에 합세했다. 끝나버린 경기의 여운을 느끼며 지도도 보지 않고 어두워진 부르고스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아무렇게나 걷다 보니 어떤 한 작은 가게에 줄이 늘어서있었다. 모두 여기에 사는 로컬 주민처럼 보였다. 밤 12시가 넘은 시간에 늘어선 줄이라니, 분명 맛집일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구글 맵을 켰다. 역시나 리뷰도 많고 평점도 좋은 샌드위치 가게였다. 수지랑 나란히 샌드위치를 들고 나오는데 딱 기본적인 샌드위치였다. 도톰한 치아바타 같은 빵에 적당한 속재료가 마요네즈와 함께 들어있는 깔끔한 샌드위치. 기대 없이 한 입 베어 물었는데, 세상에 이런 맛은 처음이었다.


 

우선 소스가 그냥 마요네즈가 아니었다. 시중에 파는 마요네즈에서 느껴지는 신맛이 전혀 가미되지 않은 깔끔한 맛이었고, 고소하지만 개성 넘치는 맛이 느껴졌다. 먹어본 맛 중 비슷한 소스를 찾자면 갈릭 트러플 마요네즈인데, 그것보다 훨씬 감칠맛이 있었다. 아무래도 직접 소스를 만드시는 게 틀림없었다. 속재료를 감싸고 있는 도톰한 빵은 기정떡 같은 찰기가 있으면서도, 씹으면 바게트 속과 같이 부드럽게 부서졌다. 속재료는 조금 빈약하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쫀득하고 부드러운 빵과 어울리게끔 적당한 크기로 썰려 있어 아삭거리는 식감이 재밌었다. 버무린 소스는 속재료 전체를 덮으면서도 빵에 적당히 스며드는 묽기로 샌드위치를 다 먹을 때까지 빵이 축축해지거나 소스를 바닥에 질질 흘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야말로 맛집이었다.

 

샌드위치로 행복하게 배를 채우고 나서 또 한참을 걷다 보니 저 멀리서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넓은 광장에서 밴드 공연을 하고 있었다. 축제 같은 날에 흥겨운 사람들은 야외 공연장 앞에도 많았다. 모두가 남을 신경 쓰지 않고 각자가 느끼는 대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내 앞에 있는 사람과 그 옆에 있는 사람의 몸짓이 각양각색으로 달랐다. 우리도 드럼과 베이스 소리가 쿵쿵 울리는 음악을 들으며 마음껏 소리 지르고 마음껏 춤췄다. 속사포처럼 ‘걷는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축제를 마주하다니 우린 정말 운이 좋은 건가 봐.’라는 말도 종종 했다.



춤을 추면서 흔들리는 밤하늘이 퍽 낭만적이라서, 밴드의 드럼 소리에 울리는 땅의 진동이 그대로 내 몸을 타고 심장을 울리는 것 같아서, 춤을 추며 마주하는 사람들의 눈빛에 행복이 꾹꾹 눌러 담겨 있어서 이 순간이 더없이 귀했다. 쉴 새 없이 터지는 웃음이, 사람들이 내뿜는 행복한 에너지들이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밤이었다.


내일 다시 걷기 위해서는 얼른 숙소로 돌아가야 했지만 오늘은 좀 더 춤추며 즐기기로 했다. 여기도 어찌 보면 행복한 산티아고 순례길이니까!


너무 놀고 마시는 것 같지만, 그래도 여긴 산티아고 술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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