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반년 만에 통화를 하게 된 L양으로부터 캐나다 이민 얘기가 흘러나왔다.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사연을 물어보니 얼마 전에 캐나다로 이민 간 선배 언니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현지에서 L양처럼 교육 경력이 있는 미술 선생을 구하고 있다면서 구체적인 상황을 알고 싶으면 건너와서 면접을 보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곧 가기로 했다는데, 얘길 들으며 ‘아! 가는구나’하는 예감이 피어올랐다.
L양은 우리 대학의 디자인과 첫회 졸업생으로서 지금은 H전문학교의 선생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입학생이 무척 줄어서 상당히 곤란한 지경이라는 얘길 벌써부터 듣고 있던 터였다. 저간의 얘기를 나눈 다음 만남을 약속하고 전화기를 내렸는데 이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하고 기이한 일이었다.
H전문학교엔 2000년도 초반 L양과 더불어 그 동기인 S양이 함께 선생으로 부임을 했다. L양이나 S양 모두 성실하고 능동적인 성격이긴 했지만, 당시 두 사람이 함께 응모 서류를 냈다는 얘길 듣고는 내심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이들은 수 십 대 일의 경쟁을 뚫고 여덟 명의 합격자 가운데 끼게 된 것이다. 응모자 거개가 외국대학의 꼬부랑글씨 학력을 갖고 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학벌이나 경력이 만만찮은 이들이었다는데 여기에 L양과 S양이 자리를 함께 하게 된 게 신기했고 반가웠다. 그러면서 이런 외적인 조건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게 이네들의 독특한 인품 덕이라고 생각했다. 이때에도 나는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학교에 근무를 하게 된 사실을 상당히 묘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나로 하여금 인연이라는 문제를 골똘히 생각해보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두 사람이 학교에 응모하기 전, 모 디자인 사무실에서 2년 정도 같이 근무를 해왔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 사무실에서 원래는 한 명만 뽑는다고 해서 한 사람은 곁다리로 따라간 것인데 두 사람 모두 마음에 든다고 하여 함께 취업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L양이 임신 때문에 몇 개월 쉬고 있는 사이 불쑥 H전문학교 선생 공모가 있었고 이에 새로운 직장을 갖게 된 것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이 둘은 디자인 사무실에 취업하기 전에도 두 해 정도 함께 미술 학원을 운영했으며 이게 어려워지자 취업을 하게 된 거라는데, 또 학원을 운영하기 전엔 둘이 모 디자인 학원의 강사로 근무한 일도 있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건 이들이 같은 고등학교 1년 선후배간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L양은 재수를 하여 동급생이 되었는데 두 사람이 고등학교 때 웅변을 하여 S양은 입학 신체검사 당시 L양을 먼저 알아보았다고 한다. 더구나 둘은 서로 성장해온 얘길 주고받으며 자신들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불과 20~30분 내의 거리에서 살아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L양의 이민 얘기에 놀라게 된 건 그간 S양도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외국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던 L양에게 이렇게 뜻밖의 일이 먼저 일어나 어쩌면 비슷한 시기에 이 땅을 떠날 것 같으니 정말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입생이 줄어 학교가 어려워지자 여러 선생 가운데 쟁쟁한 학력의 소유자 모두가 퇴임을 당했음에도 두 사람만 끝까지 남게 된 것도 그러하거니와 이제 폐교가 임박한 학교를 떠나게 되는 것도 자연스레 새 직장이나 배움터로 이동하는 모양새가 되었으니, 이것조차 두 사람이 동시에 움직이게 되는 걸 보며 기묘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둘이 가게 될 도시가 북미대륙의 가까운 곳으로써 국경을 중심으로 남북 두세 시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있는 곳이니 어쩐지 평생을 더불어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한 상상은 아니리라.
인연이란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다. 그것이 선연(善緣)이든 악연이든 우리 인간의 만남과 헤어짐은 우리의 의지나 선택과 무관하여 하늘이 연출해내는 일이 아닌가 한다. 아니 꼭 사람 간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일껏 선택하고 노력을 기울인 게 순식간에 모래집처럼 허물어지는가 하면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았음에도 불처럼 일어나는 일도 있다. 때론 최상의 조건이라고 안심하고 있을 때 불의의 재앙이 닥쳐오는 일 또한 다반사이니 바둑돌 한 점 한 점처럼 우리가 최선이라고 만들어나가는 일의 성쇠는 우리의 머리가 헤아릴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 있는 것 같다.
L양과 S양의 경우만 하더라도 이것이 단지 둘 사이의 우정에서 비롯되는 일만은 아닌 것이, 저간의 삶의 과정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정이든 결혼이든 아니면 계획된 만남이든 아니든 이 모든 건 우리의 의지나 이성 밖의 일로 보인다. 이것이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전생의 업에서 비롯되는 것이든 아니든 인연이란 우리가 모르는 필연인 것만 같다. 더구나 이것은 우리가 볼 수 없는 대본과도 같아, 어디엔가 홀로그램 필름처럼 존재한다고 확신케 만들어주는 L양과 S양의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