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기대며 사는 동물 같다. 홀로 단단하게 살다가도 파도가 치면 어김없이 쓸려나간다. 그러다 무어라도 붙잡고 싶어 팔을 휘적인다. 세상엔 사람을 현혹시키는 수많은 중독들이 있지만 그저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허둥지둥 붙잡은 썩은 동아줄이 아닐까 싶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놓지 못하는 건 바로 '사람'이다.
힘들 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서른 살 성인에게 ‘의존’은 달갑지 않은 단어다. 독립. 성숙. 안정. 초연함과 가까워지고 싶어서 나름 부단히 수행 아닌 수행을 하며 살아왔는데,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나는 엄마에게 가겠다고 떼쓰는 어린이집 첫날의 아이가 된 것만 같다. 스스로 답답하고, 실망스럽고, 어쩐지 외로울 때 나는 타인과 연결되고자 발악하는 뜨거운 욕망을 발견한다. 내 얘기를 좀 들어줘. 나 좀 위로해 줘. 내가 듣고 싶은 말 좀 당장 꺼내 줘...! 어찌나 뜨거운지. 도무지 그 열기를 감당하기가 힘들어 오른손에 쥐었다 왼손에 쥐었다 다시 품에 안고 방안을 빙빙 돈다. 엉덩이가 뜨거워서 어쩔 줄 모르는 송아지가 따로 없다.
나도 싫은데 남은 어쩌겠어!
어찌어찌 시간이 흐르고 마음이 진정되고 나면 고요하고 서늘한 공허함이 느껴진다. 아니, 그럴 거면 그냥 아무한테나 털어놓으면 되는 거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당장 폭발할 거 같은 마음을 어찌 다뤄야 할지 몰라 나조차 당황스러운데 남들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싶다. 감정을 전염시키고 싶지 않을뿐더러 내 마음속에서 일어난 소용돌이들은 대부분 시간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들이었고, 어쩌면 상대가 나보다 더 강한 소용돌이를 품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매 순간 느끼는 것들을 내뱉지 않고선 참기가 힘든 나에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침묵이 주는 얇고 위태로운 평화를 배우는 것 같다. 터질 듯 말 듯 조마조마하지만 결국 참아내면 조용해지는 그런 평화말이다.
나에게 기댈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보며
나를 가장 잘 아는 것도, 나와 가장 가까운 것도, 나를 다스릴 수 있는 것도 나다. 머리론 알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내가 못 미덥다. 수많은 실패를 경험했고, 그렇게 옆에서 만류를 해도 기어이 저지른 뒤 후회하고 질책받아온 삶이 너무도 길다. 좋다면 좋고 경험이라면 경험이겠지만 효율과 생산이라는 안경을 쓰고 지난 삶을 되돌아보았을 때 불필요한 사치와 연민이 가득했다. 그런 스스로가 무언가를 지탱한다는 모습이 사실 잘 상상되지 않는다.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아등바등 노력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이 마저도 성공한 날보다 실패한 날들이 더 압도적이다. 하지만 늦어도 삶이 끝나기 전 언젠가 힘든 순간에 오롯이 혼자 서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살아있는 한 기회는 무한하니까. 언젠가는 상대에게 퍼붓고 답을 듣고자 하는 욕망이 사그라들고, 가만히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를 안아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