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가빈
많은 이들에게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의 안티테제, 혹은 독재 그 자체로 여겨진다. ‘생산수단의 공유화’라는 목적을 가진 사회주의 특성상 정부에 의한 통제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1970년대 칠레에서, 이런 인식의 틀을 깨고 민주적으로 사회주의 체제를 수립하려 했던 시도가 한차례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그 이야기의 주인공인 살바도르 아옌데 고젠스(Salvador Allende Gossens)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다.
배경:칠레
아옌데의 민주적인 사회주의 정부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알아보기에 앞서 우리는 ‘칠레’라는 나라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알 필요가 있다. 남아메리카 대륙 서남쪽의 위치한 칠레는, 아마 5000km에 육박하는 긴 국토로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이런 지리적인 특징은 칠레를 구리, 초석, 석탄 등 각종 천연자원의 산지로 만들었고, 이런 환경 속에서 메스티소, 백인, 원주민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칠레 사회가 탄생했다. 그리고 2023년 현재, 칠레는 약 2천만 명에 달하는 인구를 보유한 남아메리카 최대 강국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칠레의 본격적인 역사는 아옌데가 등장하기 150년쯤 전에 시작했다. 원래 칠레는 대부분의 남아메리카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였는데, 19세기 초 스페인 본국이 프랑스의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과 싸우는 도중에 칠레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리고 이후 약 반세기 가량 어찌어찌 굴러갔던 칠레는 그 운명을 바꿀 하나의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바로 페루, 볼리비아와의 태평양 전쟁(War of Pacific)이었다. 이 전쟁에서 칠레는 페루와 볼리비아 연합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뒀고, 그 결과 칠레는 남아메리카의 명실상부한 강국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풍부한 천연자원을 얻을 수 있었다.
권위주의적인 독재에 종속되었던 여타 남아메리카 국가들과는 달리 칠레는 19세기 후반 민주적인 의회 공화국을 수립했고, 유지했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성장했다. 그리고 이는 구리, 초석, 요오드 같은 풍부한 천연자원에서 나오는 수입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듯 당시의 칠레는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선진국이라고 여겨질만한 나라였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칠레 내부에서 큰 문제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바로 ‘불평등’이었다. 정부는 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외국인 투자를 무제한으로 허용하였는데, 이는 앞서 말한 구리, 초석, 요오드 산업을 외국 자본이 장악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그 외의 여러 산업들과 전국의 농지들 또한 부유한 몇몇 가문들이 장악하였다. 때문에 칠레가 창출한 부는 외국인, 그리고 소수의 부유한 사람들의 손에 넘어갔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가난한 생활을 지속해야 했다.
20세기 초, 칠레의 이러한 실정과 민주적인 정치 시스템이 맞물려 칠레에서는 정치적인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각지의 노동자들은 부의 재분배를 외치며 사회주의 정당과 공산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정부와 국민들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수도 산티아고(Santiago)에서 쿠데타가 일어나고 남부에서 원주민들의 반란이 일어나는 등 칠레는 혼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정국 안정을 명분으로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그동안 칠레가 품고 있었던 문제들은 더욱 심화되었다. 1936년, 중도좌파부터 공산주의 세력까지 반정부 세력을 모두 아우르는 정당인 인민전선(Frente Popular)이 창당되고 정권을 잡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내분으로 몰락하고 보수적인 정권이 재등장했다. 인민전선 이후 등장한 일부 정권에서는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복지를 늘리고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등 대중주의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소수에 의한 부의 독점이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국민들은 점점 정권 교체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살바도르 아옌데였다.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
살바도르 아옌데는 1908년 칠레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 중 하나인 발파라이소(Valparaíso)의 부유한 엘리트 집안에서 태어났다. 유년기부터 엘리트 교육을 받았던 그였지만,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변호사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하층민의 삶과 칠레 내의 불평등에 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나이 열네살 때, 그는 스승으로 여겼던 이탈리아 출신의 무정부주의자이자 구두수선공 후안 데르마치를 통해 사회주의를 접하고 사회주의에 큰 흥미를 느끼게 된다. 이후 성인이 된 아옌데는 군에서 복무한 뒤 수도 산티아고의 칠레 대학교(Universidad de Chile)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때 칠레 정부의 사회주의 탄압을 목도한 아옌데는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여타 급진적인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과는 다른 젠틀한 면모와 온건한 입장, 처세술과 뛰어난 연설 능력 덕분에 그는 다양한 사상을 가진 학생들의 지지를 받으며 곧 학생운동의 리더가 되었다.
1933년, 아옌데는 사회주의 정당인 사회당(Partido Socialista de Chile)에 입당하며 본격적인 정치인의 삶을 시작한다. 5년 뒤, 사회당을 포함한 인민전선이 선거에서 승리해 정권을 잡았고 아옌데는 보건부 장관에 임명된다. 그러나 인민전선은 다양한 이념을 가진 정당들이 모인 연합체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분열되고 만다. 인민전선이 무너진 이후에도 이후에도 아옌데는 활발히 정치활동을 이어가면서 여러 차례 상원 의원에 당선되었고 1952년, 58년, 64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까지 한다.(그러나 모두 낙선했다.) 1969년, 정부에 대한 불만이 최고조에 이르자 그동안 분열되어 있던 좌파세력이 힘을 합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사회당, 공산당, 급진당이 연합한 인민연합(Unidad Popular)이 만들어졌고 그 중심에는 다름 아닌 아옌데가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0년 선거에서 인민연합이 승리하며 아옌데는 드디어 대통령에 당선된다.
대통령이 된 아옌데는 가장 먼저 사회 부문, 혼합 부문, 민간 부문에 걸쳐 개혁에 착수했다. 사회보장제도를 확대하고 전 국민 대상 예방치료 의료보장을 추진했으며 공교육을 강화해 문맹률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이런 개혁들의 가장 큰 특징은, 여타 사회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온건하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진행됐다는 것이다. 아옌데가 가장 강조한 것이 바로 ‘민주주의’였으며, 그는 민주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해 노동자들의 기업 경영 참여와 정치 참여를 추진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아옌데가 진행한 일련의 개혁들은 어느 정도 성과를 보였다. 집권 첫 해인 1970년 한 해 동안 노동자 소득은 무려 50%가 증가 했다. 또한 물가 통제에도 성공하며 인플레이션을 감소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성과 덕에 아옌데에 대한 지지율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다. 그런데, 완벽해 보였던 아옌데 정부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옌데는 소수의 기득권이 모든 부를 독점하는 게 칠레의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1971년부터 본격적으로 토지와 기업들, 그리고 구리, 요오드, 석탄 산업들을 국유화한 뒤 일반 국민들에게 재분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당연하게도 전통적인 상류층들과 자본주의 성향의 엘리트 중산층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원래 이들 중 상당수가 아옌데의 민주적이고 온건한 개혁에 어느 정도 호의적이었지만, 이제 완전히 등을 돌린 것이다. 또한 아옌데의 재분배 정책도 실패했다. 아옌데는 기업인들에게서 몰수한 기업을 노동자들에게 나누어주거나 국가에서 운영하게 하였는데, 이는 생산량의 저하로 이어졌다. 토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는 곧 전반적인 경제 침체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아옌데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다. 아옌데가 궁극적으로는 칠레의 문제를 뿌리뽑고 모두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산티아고에 내리는 비
그런데 아옌데 정부에 가장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세력은 칠레 외부에 있었다. 바로 미국이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칠레에서 가장 큰 산업이었던 구리, 요오드, 석탄 산업은 외국 자본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들 중 대다수가 미국 자본이었다. 만약 아옌데가 구리, 요오드, 석탄 산업을 국유화 시킨다면 미국에 매우 큰 경제적 손실이 닥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리고 미국이 아옌데 정부를 경계했던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는데, 바로 안보와 관련된 문제이다. 당시, 즉 1970년대는 냉전의 한복판에 있던 시기였다. 그런데 미국의 적인 ‘사회주의’ 국가가 남아메리카에 수립된다면 미국으로선 매우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미국에겐 아픈 상처가 있었다. 1959년, 미국 바로 밑 카리브해에 위치한 쿠바에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가 이끄는 공산정부가 혁명 끝에 수립됐다. 그리고 이후 카스트로는 끊임없이 미국을 위협했으며, 1962년에는 쿠바를 두고 한바탕 핵전쟁이 일어날 뻔하기도 했다.(참고로 카스트로는 아옌데의 친한 친구였다.) 그래서 미국은 이런 일이 다시 반복되는 것을 막아야만 했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던 당시 미국의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를 필두로 미국은 아옌데에 대한 본격적인 조치를 취하기 시작한다.
미국은 구리 보유분을 방출하여 구리값을 내리고, 칠레에 대한 강력한 경제제재를 하는 방식으로 아옌데 정부를 무너뜨리려 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조치 때문에 칠레의 경제는 급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인플레이션은 심각해졌고, 상류층과 중산층은 정부에 대한 대대적인 저항에 돌입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것 때문에 아옌데 정부가 무너지지는 않았다. 경제가 추락하는 와중에도 다수의 국민들은 여전히 아옌데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결국 최후의 방법을 쓰기로 결심한다.
당시 칠레 군부의 요직은 상류층 출신이 차지하고 있었고, 많은 이들이 아옌데 정부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이들을 이용해 쿠데타를 일으켜서 아옌데 정부를 전복시킬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이 쿠데타의 적임자로 떠오른 인물이 바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우가르테(Augusto Pinochet Ugarte) 총사령관이었다. 그런데 원래 피노체트는 정치적 신념을 표명하지 않고, 꿋꿋하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던 유능한 군인이었다. 1973년 6월에는 다른 군인이 아옌데 정부에 대하여 일으킨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진압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3년 9월, 미국과 접촉한 피노체트는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마음먹게 된다.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가 이끄는 군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아옌데는 소식을 듣자마자, 친구이자 쿠바의 지도자였던 피델 카스트로에게 선물받은 AKM 소총을 들고 대통령궁으로 향했다. 쿠데타에 맞서 직접 싸우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윽고 노동자들과 공산당원들이 아옌데를 지키기 위해 대통령궁으로 모였다.
대통령궁에 당도한 피노체트의 군대는 아옌데 측에 항복을 요구했으나 아옌데는 투항을 거절했다. 그리고 그는 칠레 국민들에게 마지막 연설을 했다. “조국의 노동자 여러분! 저는 칠레와 칠레의 운명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반역이 우리에게 강요한 이 잿빛의 쓰디쓴 순간도, 누군가는 반드시 이겨낼 것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리 머지않은 장래에, 자유로운 인간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당당하게 걸어갈 드넓은 길을 열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칠레 만세! 인민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마지막 말입니다. 제 희생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적어도 제 희생을 통해 범죄자와 비겁한 자, 반역자는 반드시 처벌받아야 한다는 도덕적 교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연설이 끝나고, 아옌데는 소수의 무장한 병사들과 함께 대통령궁에서 저항을 이어갔다. 얼마 후, 칠레 공군 소속 호커 헌터 전투기가 대통령궁을 폭격했고, 탱크들이 대통령궁 안으로 진입했다. 아옌데는 직접 대전차포까지 쏘며 저항했지만 군인들이 대통령궁 내부로 진입하기 시작하자 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잠궜다. 그리고 들고있던 AKM으로 자신의 머리를 쏴서 자살했다.
아옌데의 죽음과 동시에 아옌데가 3년 동안 구축한 민주적인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졌다. 아옌데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것은 사실이나, 많은 수의 칠레인들은 아옌데의 최후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당시 한 방송에서는 피노체트의 쿠데타에 대해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한편, 쿠데타 이후 칠레에서는 피노체트가 정권을 장악했고,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을 펼치며 16년간 집권했다. 아옌데만큼이나 평가가 엇갈리는 피노체트 정부를 뒤로하고, 1990년 칠레는 민주화를 맞이했지만 더 나은 정부와 더 나은 삶을 위한 칠레 국민들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아옌데 정부의 의의
아옌데가 일생을 다해 꿈꿔왔으며, 1970년부터 3년 동안 구축했던 체제에는 문제점도 많고, 한계도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고 뚜렷한 성과를 거뒀다는 점에서 아옌데 정부를 의미 있다고 평가한다. 또한 아옌데는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의 모범사례가 되어서, 세계 각지에서 아옌데의 노선과 정책들이 재탄생하기도 했다. 특히 아옌데가 살았던 칠레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중,남아메리카 각지의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아옌데의 길을 따라가고자 하고 있다.
자료 출처
라틴아메리카의 역사, 벤자민 킨 저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 빅터 피게로아 클라크 저
Britannica - Salvador Allende
Britannica - Augusto Pinoch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