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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파이 Jan 08. 2024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갈등의 대서사

역사를 통해 바라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김가빈

 2023년 10월 7일 발발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올해 가을을 충격으로 물들였다. 그런데 사실 이 전쟁은 2023년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좀 더 멀리 바라볼 필요가 있다.


2008년 가자 지구 공습 직후 예루살렘에 소재한 히브리 대학교에서 대립 중인 이스라엘 시위대와 팔레스타인 시위대

2000년간의 방랑과 시오니즘의 탄생

 현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스라엘을 구성하고 있는 다수 민족인 유대인의 서사를 알아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아득히 먼 과거인 기원전 11세기, 현재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위치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히브리인들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히브리인들의 후예인 유대인들이 비로소 역사 전면에 등장해서, 팔레스타인 일대에서 위용을 떨쳤다. 스스로를 신에게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여기는 유대인의 종교인 유대교도 이 시기 크게 발전했다.

 

 당시 유대인들의 번영은 팔레스타인의 ‘위치’ 덕이 컸다. 서쪽으로는 지중해, 동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 남쪽으로는 이집트와 맞닿아 있었기에 ‘문명의 교차로’이자 ‘무역의 거점’ 역할을 톡톡히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양날의 검이었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던 고대에서 이런 지역은 강대국에게 공격받기 딱 좋은 위치이기도 했던 것이다. 때문에 팔레스타인과 그곳에 살던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와 로마제국 같은 당대의 슈퍼파워들에게 여러 차례의 공격과 지배, 탄압을 당했고 이를 견디다 못한 수많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각지를 방랑하니, 이를 디아스포라라고 한다.

 제1차 유대-로마 전쟁(66-74) 당시 로마군에 의해 파괴당하는 예루살렘 성전을 묘사한 그림. 

이 전쟁은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를 촉발시킨 원인이기도 하다.


 디아스포라가 시작된 이래로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유럽 각지로 흩어져서 각자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하였고, 고대를 지나 중세 시대까지 대를 이어가며 번성하게 된다. 그런데 중세가 시작되자 반유대주의의 물결이 하나의 기조로써 유럽 사회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이는 유대인들 특유의 선민의식과 배타성에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기독교의 힘이 막강해진 중세의 유럽에서 유대인들은 본인들만의 공동체에서 유대교만을 열심히 믿으며 도무지 기독교 사회에 동화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하물며 당시의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로 몰고 간 민족이 아닌가. 때문에 당시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유대인들을 싫어하게 되었고, 이들에 대한 공공연한 멸시와 차별은 일상이 되었으며, 심지어는 학살까지 간간이 자행되곤 했다. 또한 유대인들에게는 직업에 대한 제한도 있었기에 이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고리대금업같이 천시받는 직업을 택해야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유대인들이 거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원인이 되기도 했다.)

흑사병 창궐의 원흉으로 지목받아 학살당하는 유대인들을 묘사한 그림 (1348-1349)

 이렇게 뿔뿔이 흩어진 채로 박해를 견디며 살아야 했던 유대인들은 하나의 희망에 의존하며 고통을 감내했다. ‘흩어짐은 하나님이 내린 심판이며,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 다시 모일 수 있다.’라는 종교적인 사상이 바로 그 희망이었다. 이는 하나님이 은총을 내려주신다면 모든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다시 돌아가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19세기말, 당시 유럽을 휩쓸었던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한 유대인 청년이 이 사상을 반박하고 나섰다. 그가 바로 테오도르 헤르츨(בִּנְיָמִין זְאֵב תֵּאוֹדוֹר הֶרְצְל), 시오니즘의 창시자이자 훗날 이스라엘의 국부로 일컬어지게 되는 인물이다. 1860년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헤르츨은 젊은 시절, 얼핏 진보적인 것처럼 보였던 유럽 사회에 반유대주의가 만연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적잖은 충격을 받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하나님의 막연한 도움을 기다리기보단 유대인들이 직접 자신들만의 나라를 건설하여야 한다는 사상을 주창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사상이 바로 시오니즘이다. 

시오니즘의 창시자, 테오도르 헤르츨(1860-1904)

 그런데 시오니즘은 유대교의 교리보다 민족주의를 우선시한 사상이었고 이 때문에 헤르츨을 필두로 한 시오니스트들은 유대인 사회 내에서 ‘좌파’ 혹은 ‘세속주의자’라는 비난에 직면해야 했다. 당시 시오니즘에 경도되어 팔레스타인 등지로 실제로 이주한 유대인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결국 이런 상황 속에서 헤르츨은 유대인 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채 1904년 44세의 나이로 요절하게 된다. 


팔레스타인, 그리고 이스라엘의 건국

 유대인들이 세계 각지에서 비극적인 서사를 써 내려가는 동안 유대인들이 ‘약속의 땅’이라 불렀던 팔레스타인 어떤 길을 걸었을까?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히브리인의 후예라고 여겨지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생물학적으로는 유대인에 가깝지만, 7세기 이슬람 세력에게 종속된 이후부터 이들의 종교, 언어, 생활양식 등을 받아들이며 아랍인이 되었다. 유럽에서 시오니즘이 태동한 19세기말에도 팔레스타인인들은 스스로를 아랍인으로 여기며 오스만 제국(튀르키예를 기반으로 한 당대의 강대국)의 신민으로 살고 있었다. 

19세기 베들레헴(현재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 위치)의 모습

 20세기 초 몇몇 시오니스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을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은 평화로워 보였다. 대부분의 팔레스타인인들과 유대인들은 서로를 존중했고, 큰 분쟁 같은 건 전무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이들의 운명이 바뀌게 된다. 당시 오스만 제국과 피비린내 나는 싸움 중이었던 영국은 오스만 제국의 신민이었던 아랍인들로 하여금 오스만 제국과 싸우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영국은 아랍인들에게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면, 전후에 그들만의 나라를 건설하게 해 주겠다’라는 약속을 하게 된다.(맥마흔 선언, 1915년) 하지만 이 약속이 체결된 지 2년 후 영국은 부유한 시오니스트들의 로비 공세를 맞고 유대인들에게도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의 나라를 만들어주겠다’라는 약속을 하고 만다.(밸푸어 선언, 1917년) 그리고 이 두 개의 상충되는 약속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의 단초를 제공했다.

텔아비브 해안에 상륙하는 유대인 난민들 (1939)

 아마 영국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팔레스타인인들과 유대인들이 어떻게든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밸푸어 선언에 힘입어 수많은 유대인들이 밀물처럼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자 영국의 계산이 빗맞았음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을 휩쓸었던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로 인해 더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고 이 무렵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사회는 팔레스타인인 사회에 견줄 정도가 되었다. 이쯤 되니 영국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고, 결국 영국은 1947년 팔레스타인 문제를 국제기구 UN에 넘기게 된다. 1947년 11월 29일, UN은 총회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의 영토 중 56%를 유대인들에게, 44%를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할양한다는 안을 발표하였다.

UN이 제시한 팔레스타인 분할 안. (파란색이 유대인에게 할양된 지역, 주황색이 팔레스타인인에게 할양된 지역이다.)

 하지만 이 안은 유대인들에게도, 팔레스타인인들에게도 큰 불만을 남겼다. 두 집단 모두 팔레스타인 땅에 ‘자신들만의’ 나라를 세우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는 당연하게도 두 집단 간의 갈등을 야기했고, 팔레스타인 각지에서 무력 충돌과 학살이 벌어졌다. 이런 상황이 반년 동안 이어지다가 1948년 5월 14일, 유대인들은 비로소 자신들만의 국가 건설을 선언하게 된다. 이 나라의 국명은 성서 속 유대인의 기원에서 따온 이스라엘이었다.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의 한 미술관에서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언하는 다비드 벤구리온 총리

 이스라엘의 건국은 팔레스타인인들뿐만 아니라 주변 아랍 국가의 분노를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이슬람을 믿는 이들의 입장에서 이스라엘은 이교도였으며, 이들이 이슬람의 성지인 예루살렘 옆에 나라를 세운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스라엘이 건국된 지 바로 다음날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등으로 구성된 아랍군대 가 이스라엘을 공격한다.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한 것이었다. 

제1차 중동전쟁 당시 갈릴리 지역에서 교전을 벌이는 이스라엘군

 이때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그저 팔레스타인인들의 핏자국 위에 세워진 사상누각 정도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스라엘인들은 이들의 예상보다 훨씬 더 강한 의지를 가지고 맞서 싸우기 시작했고, 이스라엘군에 비해 오합지졸이었던 아랍군은 결국 전쟁에서 패배하고 만다. 이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국가의 기반을 공고히 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으며 100만 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신들의 땅을 유대인들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PLO의 저항

이스라엘이 중동 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위치로 자리매김하는 동안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는 이를 데 없이 커졌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이하 PLO)의 창설은 이를 보여주는 가장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1964년 6월 2일, ‘무장투쟁을 통한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기치로 내건 무장단체인 PLO가 이집트 카이로에서 창설됐다. 그리고 창설 직후부터 PLO는 이스라엘과의 게릴라전에 돌입하여, 그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리기 시작한다.

PLO 휘하의 무장단체인 파타의 열병식 (1970)


PLO는 꽤나 극단적인 방식으로 저항을 이어갔다. 1972년 9월 5일, PLO와 연관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무장단체인 검은 9월 단의 조직원들이 뮌헨 올림픽 선수단 숙소로 잠입하여 이스라엘 선수들과 코치, 심판 11명을 인질로 사로잡았다. 뮌헨 올림픽 참사로 일컬어지는 이 사건은 테러범들에게 사로잡힌 인질들이 모두 살해당하는 결과를 낳았고, 이후 PLO는 세계적인 빈축을 사게 된다.

 


뮌헨 올림픽 참사 당시 선수단 숙소를 장악한 테러범들의 모습


PLO의 테러리즘적인 행보가 전 세계로부터 비난을 받기 시작하자, 당시 PLO의 의장이었던 야세르 아라파트(ياسر عرفات)는 그간의 투쟁 방식에 대한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1974년, 결국 아라파트는 PLO가 국제 테러에 개입하지 않을 것을 천명했으며, 동시에 국제사회에 PLO를 팔레스타인인들의 대표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아라파트의 이런 ‘평화적 저항’ 정책은 PLO가 아랍연맹의 회원국이 되고, 세계 여러 나라들로부터 ‘정부’로 인정을 받으며 결실을 맺게 된다.

PLO를 이끈 야세르 아라파트(1929-2004)


오슬로 협정과 찾아온 평화. 그러나…

PLO가 점차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지만, 이스라엘 입장에서 PLO는 여전히 ‘테러단체’에 불과했다. 그러던 1987년, 상황을 반전시킬 하나의 사건이 팔레스타인 내에서 발생한다. 당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으로 분류되던 지역에 유대인의 정착촌을 건설하며 팔레스타인을 점진적으로 병합해나가고 있었는데, 여기에 불만을 품었던 팔레스타인인들이 1987년 12월 9일 팔레스타인 내의 가자 지구에서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제1차 인티파다(انتفاضة الحجارة)라고 일컬어지는 이 봉기는 1994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이스라엘 정부에 적잖은 위협을 주게 된다.

제1차 인티파다 당시 이스라엘군을 향해 돌을 던지는 팔레스타인 소년 (1989)


제1차 인티파다가 발발하자 PLO는 이를 하나의 기회로 보고 봉기를 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이때 이스라엘의 총리이자 온건파로 분류됐던 이츠하크 라빈(יִצְחָק רַבִּין)은 PLO와의 협상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통감하였고,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협상에 돌입했다. 1993년 8월 20일, 마침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평화협정인 오슬로 협정(Oslo Accords)이 체결된다.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자치 정부 설립을 허가한다’는 것이 오슬로 협정의 내용이었다. 


오슬로 협정의 체결된 후 백악관에서 만나 악수하는 이츠하크 라빈(왼) 이스라엘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오) PLO 의장. 중앙에 있는 인물은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



그러나 오슬로 협정은 평화의 시작이 아닌, 또 다른 비극의 서막이었다. 그리고 그 비극은 1995년 11월 4일, 이츠하크 라빈 총리의 평화노선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한 유대교 근본주의자에 의해 라빈이 암살당하며 본격적인 막을 올렸다. 라빈의 피살과 동시에 온건파가 힘을 잃었고, 그 결과 1996년 치러진 총선에서 대(對) 팔레스타인 강경파였던 베냐민 네타냐후(בִּנְיָמִין נְתַנְיָהוּ)가 총리에 당선되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한 것이다. 네타냐후는 만약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의 평화 유지를 위해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확대시키거나 팔레스타인 영내의 이스라엘 정착촌을 철수시킨다면 이스라엘이 막대한 손해를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중심적인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고, 당연하게도 이는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96년 총리 당선 이후 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네타냐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킨 또 다른 요인은 바로 이슬람 극단주의였다. 사실 원래 PLO를 위시한 여러 팔레스타인 독립운동 단체는 민족주의, 혹은 공산주의 계열이었기에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의 종교적 성향은 그다지 짙지 않았다. 그러나 1979년 이란에서 급진적인 이슬람 혁명이 성공한 이후 이슬람 극단주의가 세계적인 트렌드로 자리 잡았고, 그 결과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에도 종교적 색채가 깊게 배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7년, 이 기세에 편승해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인 하마스(حماس)가 결성되었다. 결성 이후 하마스는 제1차 인티파다에 참여해 세력을 키웠으며, 오슬로 협정 이후에도 자폭테러나 민간인 학살 등의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오슬로 협정 이후 벌어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첨예한 대립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제2차 인티파다(الانتفاضة الثانية)이다. 2000년 9월 28일,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강경파 정당이었던 리쿠드의 의장이었던 아리엘 샤론(אֲרִיאֵל שָׁרוֹן)이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성지인 성전산에 방문하자 이에 반발한 팔레스타인인들이 봉기를 일으키며 제2차 인티파다가 발발했다. 이후 하마스를 위시한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까지 가세하며 봉기는 더욱 커졌고, 곧 팔레스타인 전역이 전쟁터로 전락했다. 봉기는 4년 넘게 이어지며 3000여 명의 팔레스타인인들과 1000여 명의 이스라엘인들을 죽음으로 내몰게 된다.


제2차 인티파다 당시 서안지구 라말라에서 대치 중인 이스라엘군과 팔레스타인인들


제2차 인티파다가 종식된 이후 이스라엘 정부는 평화를 위한 몇 가지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2005년 이스라엘 총리 아리엘 샤론이 팔레스타인의 월경지인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 정착촌의 철수를 선언한 것이 그 첫걸음이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총선에서 비롯된 일련의 갈등 이후 2007년, 하마스가 가자 지구를 장악하면서 분쟁이 다시 심화되었다. 


가자 지구에서 치러진 하마스 고위 간부의 장례식을 호위 중인 하마스 대원 (2007)


하마스와의 대립이 계속되던 2008년,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군사 도발에 맞서 가자 지구에 대규모 공습을 가했다. (제1차 가자 전쟁) 이때부터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공습을 주고받는 것은 일상처럼 자리 잡았으며, 당연하게도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2012년 제2차 가자 전쟁에서 최소 6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으며, 2014년 제3차 가자 전쟁에서는 2000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들과 60명 이상의 이스라엘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차츰 분쟁에 적응해 나갈 때쯤,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2023년 4월 5일, 이슬람과 유대교 공동의 성지인 예루살렘 알아크사 사원에서 무슬림 참배객들과 이스라엘 경찰 사이의 충돌이 발생한 것이다. 


2023년 알아크사 충돌 직후 알아크사 사원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팔레스타인 시위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팔레스타인인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여론이 심각하게 나빠지게 되었으며, 하마스는 이를 명분 삼아 이스라엘에 대한 유례없는 총공격을 계획했다. ‘알아크사 사원에서 발생한 충돌을 설욕한다’라는 의미에서 알아크사 홍수 작전(عملية طوفان الأقصى)이라고 명명된 이 공격은 10월 7일, 종내 개시되고야 말았다. 


하마스의 이스라엘 침공 직후 무력화된 이스라엘 전차 위에서 팔레스타인 국기를 흔드는 팔레스타인인들


보편적으로 이스라엘 - 하마스 전쟁이라 일컬어지는 이 전쟁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역에 참혹한 광경을 연출했다. 전쟁 발발 직후 하마스는 민간인들을 상대로 끔찍한 전쟁범죄를 행했으며, 이후 벌어진 전투와 공습의 피해자도 대부분이 민간인이었다. 게다가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이스라엘군이 가자 지구에 진입하기로 결정하면서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것은 이제 기정사실이 되었다. 


전차의 포신에 기대어 휴식을 취하는 이스라엘 군인



폭격으로 폐허가 된 난민 캠프 한가운데 앉아있는 팔레스타인 소년




하마스에 의해 희생된 이스라엘 민간인의 시신을 껴안고 통곡하는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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