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days in America #5
칸쿤 공항에서 도착한 시간은 이미 저녁 7시경이었다. 서머타임으로 인해 칸쿤과 하바나에 1시간 시차가 생긴 것을 감안하면 8시가 넘은 늦은 시간이었지만 시내로 가는 택시 대신 버스를 택했다. 옵션이 있다는 게 좋았다. 40유로를 환전했고, 공항에서 ADO 버스를 타고 칸쿤 시내로 나와 도보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숙소로 가는 길에 평점 좋은 식당에 들어갔다. 메뉴가 많아 선택이 어렵게 느껴졌지만 각자 마음에 드는 타코 2개씩에 맥주 한 병씩을 시켰다. 곧 서비스로 나오는 나초와 여러 종류의 소스, 라임이 등장했다. 이런 걸 서비스로 준다니 기분이 좋아졌다. 다양한 소스 덕에 다채로운 맛을 즐길 수 있단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하바나 공항에서 느꼈던 선택권 없던 노답의 설움이 떠오르며, 가장 큰 자유는 역시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라는 것을 상기했다. 만족스러운 저녁을 마치고 카드로 계산을 하려고 하니, 친절하던 종업원이 카드기기를 내밀려 10%, 15%, others의 옵션 중 어떤 팁 옵션을 선택하겠냐고 물었다. 팁이요? 잘 먹긴 했지만, 선택권이 주어지긴 했지만 팁을 강요받는 느낌이 들었다. 약간은 찜찜한 기분으로 수줍게 10%의 팁을 선택했다. 서비스 나초를 먹긴 했지만 작은 타코 2피스에 맥주 1병의 가격이 1만 5천 원이 넘는다는 사실이, 우리가 가볍게 먹은 저녁이 3만 5천 원이 넘는다는 게 조금 비싸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칸쿤은 맛있는 게 천지였지만 밥값이 무척 비쌌다. 게다가 팁이 붙으니 더 비싼 기분이 들었다. 식당에서 뭔가 나쁘지 않게 먹었다 싶으면 인당 2만 원은 기본이고 4만 원까지도 나왔다. 그렇다고 음료를 한잔 이상 마신 것도, 과식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왜지? 왜 멕시코가 한국보다 물가가 더 비싸게 느껴지지? 첫번째로 찾은 답은 환율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1페소에 50원대이던 멕시코 환율은 현재 70원대를 훌쩍 넘은 상태였고, 관광지인 칸쿤의 환율은 주변 지역보다 더 나쁜 듯 했다. 두번째로 찾은 답은 칸쿤이 특별히 물가가 비싼 동네라는 것이다. 외식비가 올라간 반면, 마트 접근성은 좋아져 우리는 장을 봐서 하루 한 두 끼를 숙소에서 가볍게 해 먹기 시작했다. 월마트에는 온갖 과일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온 제품들이 있었다. 한국에서 누리던 그 당연함을 쿠바에서 한 달간 잃었다가 낯선 곳에서 다시 접하니 새삼 감격스러웠다. 마트의 과일 가격이 시장의 가격보다 쌀 리 없을 텐데도, 정확한 저울로 무게를 달아 계산하는 망고나 라임의 가격은 물가 싼 쿠바에서 사는 것보다 저렴하게 느껴졌고 무엇보다 “나만" 외국인이라는 이류로 부당한 가격을 지불하는 것 같은 부당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매일 마트 과일을 먹고 살았다. 종목도 옐로 망고, 애플 망고, 바나나, 라임, 토마토, 아보카도 등 조금 더 익숙하고 마트에 어울리는 녀석들로 바뀌었다. 아보카도랑 나초가 싸서 매일같이 손쉽게 해 먹을 수 있는 과카몰리를 먹었다. 사실 과카몰리는 멕시코에서 어딜 가나 쉽게 시켜 먹을 수도 있는 김치 같은 녀석이라 하메는 며칠 만에 과카몰리가, 아보카도가 실증난 듯한 반응을 보였다. 나도 뭔가 기묘한 기분을 느꼈는데 그것은 감사라는 감정이 빠진 음식에 대한 나의 정서에서 기반한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쿠바에서 괜찮은 과일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과일을 살 수 있는 큰 마트는 본 적이 없고 대부분 작은 과일 상점이나 농산물을 파는 가판대들이 몰려있는 중간 규모의 시장에서 살 수 있었는데 작은 가판대에서 파는 물품은 구아바, 파파야, 토마토, 파인애플 정도로 과일 항목이 거의 한정되어 있었고, 가끔 길이나 큰 시장 근처에서 운 좋게 뉘 집에서 따다 파는 듯한 철 이른 망고, 처음 먹어 보는 마메이(mamey), 체리모야(cherimoya, custard apple), 까이미토(caimito, star apple), 구아나바나(Guanabana, Graviola) 등을 만나면 설렜고, 상인이 추로 파운드(lb)를 쟤는 것마저 생략하고 무게로 적혀있는 과일을 가격을 개당 가격으로 이야기해도 속으로는 억울했지만 어차피 할 수 있는 말이 없음으로 맛이나 보겠다는 심산에 그래도 이런 과일이 어디냐며 감사함으로 과일을 사곤 했다. 그 결핍에서 비롯되었던 감정이 멕시코에 온 지 일주일 만에 사라진 것이다. 이제 나는 다시 과일과 음식을 접하는 상황에서 감정이 아닌 비용을 지불하는 나의 일상 세계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리브해를 나누어 가지고 있는 바로 옆나라 멕시코와 쿠바는 서로 2023년, 경제적으로는 아주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비슷할 거 같은 두 나라의 경험은 비교적 상이하다. 나는 사람들이 쿠바 대신 칸쿤을 택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누군가 1주일 정도의 여행지로 둘 중 어디를 추천하겠냐고 물으면 나도 쿠바 최고의 휴양지 바라데로가 아닌, 멕시코 칸쿤을 추천할 것 같다. 하지만 내가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다른 친구들을 만났을 때 쿠바가 아닌, 혹은 쿠바에 비해서가 아닌 온전한 칸쿤 여행기를 막 떠드는 일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멕시코 칸쿤에서 느낀 다양하면서도 전반적으로 매운 소스의 맛은 정확하게 자본의 맛이다. 내게 너무나도 익숙해서 그것이 통각임을 모르지 않음에도 계속해서 찾는 그 맛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