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잠을 잔 라윤이와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칭얼대는 태율이를 달래어 등원시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건널목 앞에 서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린다. 몸은 멈추어 서있지만 마음은 빠르게 집에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을 정리한다. 먼저, 아침 설거지하고, 세탁기 돌리고, 그다음엔 청소 후딱 해야지.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날이니까 분리수거 꼭 하고, 개키다만 빨래도 마저 개자. 은행 볼일 봐야 하니까, 참 어제 주유 안 했지? 그래도 빨리빨리 움직이면 수업시간에는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어, 그런데 밥 먹을 시간이 있을까?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뀐다. 걸음을 재촉하다가 온몸으로 쏟아지는 강한 햇살에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어느새 여름이다. 다시 시선을 옮기려는데 마주오는 유유한 걸음과 마주친다. 스무 살 남짓 되었을까? 안이 살짝 들여다보이는 하얀색 블라우스에 폭이 넓은 남색의 반바지를 입은 여자가 샌들을 신고 걸어온다. 그녀의 시선이 쇼윈도에서 가로수로, 다시 다음 쇼윈도로 향한다. 마치 여행자가 그러하듯 세상을 구경하며 걷는 그 걸음 앞에서 나의 걸음도 늦추어진다. 나는 왜 이렇게 바삐 걷는가? 엄마니까, 라는 답이 불쑥 올라온다. 하지만 금세 수정한다. 나는 늘 바삐 걸어왔다. 나의 이십 대는 매일 커다란 책가방을 메고 어디론가 바삐 걸어갔던 시간이었다.
"소정씨, 우리 교수님이 그러셨어요. 자기는 젊어서 반쪽짜리 자기만 사랑한 것 같다고요. 나는 소정씨가 그런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연구실에만 있지 말고 얼굴도 예쁘게 꾸미고 연애도 해요." 나와 같은 연구실에서 공부하던 남자 선배의 마음을 사로잡은, 영문과 여학생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저는 지금 헤어진 남자 친구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에요."라며 선배의 마음을 거절한 그녀, 나는 그녀가 좋았다. 그녀도 그랬던 걸까? 우리의 접점이라고는 그녀에게 보기 좋게 차인 연구실 선배밖에 없었는데, 선배와는 별개로 우리는 몇 번인가 더 만났다. 그리고 그녀가 전한 한 교수님의 이야기는 이따금씩 내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올라 나의 생활을 돌아보게 했다. 오늘 길에서 자유로운 걸음과 마주쳤을 때도 그랬다. 지금의 나는 어떤가? 나는 나를 온전히 사랑하고 있는 걸까?
전에 없이 느리게, 해야 할 일을 반도 다 못한 채 센터에 도착했다. 요가복으로 갈아입고 홀을 정리했다. 잠시 데스크에 확인할 것이 있어 들렀다가 아는 분을 만났다. 얼마 전부터 직장을 휴직을 하고 대학원에 다니며 이것저것 관심이 가는 일에 도전을 하고 계신 분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대화의 끝에 그분이 말씀하셨다. "요즘에는 그냥 집에서 아이들만 키우시나 봐요."라고. 악의 없이 한 말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마음이 어두워져 버렸다. 맞다, 나는 그냥 집에서 아이들만 키운다. 그런데 실상은 그냥 집에서 아이들만 키우는 것도 벅차다. 집안일은 반복되고, 아이들의 요구는 진화한다. 동동거리지 않고 여유롭게 그 일들을 해나가며 자아를 실현해나가는 일이 가능할까?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해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제멋대로 해석된 말을 가슴에 쇳덩이처럼 품고 나는 하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