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성 미네랄의 역설
'모든 것은 독이다. 다만 그 양이 그것을 독으로 만들 뿐이다.'
한 시대를 꿰뚫은 연금술사 파라켈수스의 이 짧은 문장은
생명을 관통하는 어떤 진실을 함축하고 있다.
진실은 언제나
역설적인 얼굴을 하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이라 믿는 것,
멀리해야만 살아남는다고 배운 것,
그것이 때로는 우리를 살게 한다.
우리의 몸은 살아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늘 선택한다는 것...’
완벽하지 않은 환경, 불균형한 자원, 예측 불가능한 삶의 조건 속에서
몸은 스스로에게 늘 의문을 제기하고 대답해 나간다.
'이 결핍된 환경 속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살아야 할까?'
칼슘이 부족하면 몸은 납을 택한다.
마그네슘이 모자라면 알루미늄이 그 자리를 메운다.
이상적으로는 아연을 원하지만,
그의 빈자리에는 수은이 대신 앉는다.
그렇게 몸은 항상 가장 '좋은 것'이 없을 때
'차선' 또는 '차악'을 선택하며 삶의 끈을 붙잡는다.
몸은 그것을 ‘생명 유지를 위한 발버둥’이라 부를지 모르겠다.
'나는 지금 이렇게라도 버티고 있다라며...'
삶은 본디 완전하지 않기에
몸 역시 완벽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불완전 속에서도
몸은 자신만의 해답을 찾으려 부단히 노력한다.
마치 고사리처럼
서양에서는 독초라 하여 감히 먹지 않지만,
굶주림의 세월을 견뎌야 했던 우리 조상들은
그 '독'을 삶으로 바꾸어 귀한 나물로 삼았다.
독은 독이지만
그 독조차 삶의 일부로 끌어안았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독'이라 부르는 것들 중 많은 것들이
실은 생명을 잇게 하는 도구이며,
몸이 스스로 택한 임시의 해답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몸속 어딘가에 깃든 깊고 오래된 지성의
조용한 의지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묻는다.
‘독’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해 만들어낸 낙인인가?
비바람이 모든 나무를 쓰러뜨리지 않듯이,
'독' 또한 모든 생명체에게 동일한 아픔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용량과 타이밍과 같은
맥락의 산물이다.
그리고 '무엇이 결핍되었는가?'라는 질문 속에서
그 의미는 끊임없이 변한다.
그러므로, '독'은 단순한 해악이 아니다.
생명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응급조치다.
이러한 관점은 미네랄 균형과도 맞닿아 있다.
몸은 스스로에게 필요한 것을 잘 알고 있다.
몸이 필요로 하고 선호하는 미네랄이 주어졌을 때,
더 이상 차선책을 택하지 않는다.
수은은 물러나고, 납은 배출된다.
강제도, 억지도 아니다.
단지 몸의 자발적 선택으로 인해 일어나는 결과일 뿐...
이것이 진정한 회복이다.
일부러 '해독'이란 것을 고집할 필요 없이,
몸이 본래의 조율 상태로 돌아가는 것...
모든 존재는 쓰임이 있다.
모든 원소는 배역이 있다.
무대가 다르고 각본이 달라질 뿐,
독이라 불린 자들도 언젠가는
약이나 영양이란 옷을 입고
생명 활동의 무대 위에 참여한다.
몸의 선택을 부정하기보다,
그 선택의 배경을 이해하고
몸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공급하자.
그러면 몸은 스스로
더 이상 필요 없는 것들을 보내줄 것이다.
이것이 생명을 대하는 가장 온전한 태도,
몸을 지배하지 않고,
몸을 경청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 방식이야말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잃어버린 건강의 미학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