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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여행 : 뚜르 드 몽블랑(TMB) 백패킹(1)

실패에 가까이 다가선 여행

by 이사공

이번 유럽 한 달 여행을 준비하며 가장 기대했던 것은 뚜르 드 몽블랑 트레킹이다. 우리의 첫 장기 트레킹. 뚜르 드 몽블랑(TMB)은 알프스의 최고봉인 몽블랑(4,810m) 둘레를 한 바퀴 일주하는 트레킹 코스로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세 국가에 걸쳐있다. 총 170km에 달하는 코스로 보통 열흘 정도의 시간을 들여 걸어 나간다. 우리는 여행 일정 때문에 중간중간 코스를 건너뛰어 일주일 안에 한바퀴 도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몇 날 며칠을 자연 속에 파묻혀 걷기만 한다니, 얼마나 행복할까. 수도 없이 사진과 영상들을 찾아보며 손가락을 꼽아 기다렸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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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도시 샤모니는 뚜르 드 몽블랑의 시작점이 있는 도시이다. 도시에 들어서자마자 아웃도어 의류로 무장한 사람들이 잔뜩 보였다. 이곳은 아크테릭스와 파타고니아가 교복이었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자, 주변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방수 재킷을 꺼내 모자를 눌러썼다. 거리에는 온통 등산복과 캠핑용품을 파는 가게들이었다. 마치 산악인만 모여 사는 마을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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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르 드 몽블랑을 가기 위해서 무엇부터 준비해야 할지 참으로 막막했다. 더군다나 열흘 이상 되는 일정을 일주일로 줄이자니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도 모르겠더라. 그러던 중 그가 일주일짜리 코스가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는 해외 블로그를 하나 찾았다. 이거다. 우리는 이 계획서를 그대로 따르기로 하고 더 자세히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무작정 뚜르 드 몽블랑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이때는 몰랐다. 그렇게 자세하게 안내되어 있던 블로그가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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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 없는 짐들은 숙소에 맡기고 조금 가벼워진 가방을 둘러멨다. 트레킹 코스에 들어섰을 때 그는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날 것 같다고 했다. 나의 마음은 한도 끝도 없이 부풀어 올랐다. 너무 설레고 신나서 마구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뚜르 드 몽블랑은 7, 8월이 성수기라고 하여 등산로가 붐비진 않을지 걱정했었는데, 그건 우리가 이곳의 크기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광대한 자연 앞에서 우리는 열심히 앞을 향해 걸어가는 개미와 같았다. 한국 사람들은 빨리 빨리다. 굼뜬 나는 그게 그렇게 힘들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드넓은 대자연을 걷는 지금 되려 그것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캠퍼들은 소위 ‘명당'이라 불리는 자리를 잡기 위해 분주하다. 좋은 자리를 잡으려면 몸을 재게 놀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은 모든 곳이 명당이다. 어디에 자리를 펴건 멋진 풍광이 걸려있다. 이러니 여유가 생길 수밖에. 서두를 이유가 없더라. 우리는 모자란 자원을 빼곡한 사람들이 서로 나눠 갖느라 너무나 치열하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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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것은 물론 힘들었다. 우리나라의 산들과 달라서, 오르막이 한 번 시작되면 이 길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지다가, 다시 내리막이 시작되면 마찬가지로 몇 시간이고 내리막만 걸어야 했다. 뚜르 드 몽블랑을 걷는 것은 매일매일 한라산을 하루에 한 번 오르내리는 것과 비슷하다는 얘길 들었다. 거대한 고개를 넘고 나니 실제로 그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한 걸음은 작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걸으면 어느새 내가 지나온 고개들은 까마득히 뒤로 물러나 있더라. 한참을 걷다 뒤돌아본 능선은 내가 이렇게 거대한 산을 넘어왔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을 정도로 멀게 느껴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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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외 블로거의 7일짜리 계획을 믿는 구석으로 한시름 놨다고 생각했던 우리 앞에 나타난 현실은 냉혹했다. 첫날 트레킹 중 마주친 한국 분들이 오늘은 어디까지 가냐 물으셨다. 우리는 해맑게 말씀드렸다. 라 발므 산장이요. 그러자 그들의 표정에 당혹감이 보였다. 오늘 안에 거기까지 가기엔 너무 멀다는 것이었다. 그분들의 설명을 듣고서야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 있었다. 빠른 속도로 우리를 지나쳐가는 유럽의 트레커들. 그들은 우리의 걸음걸이와는 차원이 달랐다. 길쭉한 다리로 성큼성큼 우리를 지나쳐갔다. 이 길 위를 걷는 사람들 중 우리가 가장 느린 것 같았다. 그가 찾아낸 블로거는 그 빠른 사람들 중에서도 빠른, 괴물 같은 트레커였던 것이다. 그가 작성해 놓은 일주일 짜리 뚜르 드 몽블랑 일정은 박배낭까지 짊어지고 걷는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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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단났네. 우리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직 오늘의 목적지가 한참 더 남았는데 해가 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코스를 메우던 사람들도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어느새 길 위엔 우리 둘 뿐이었다. 이대로 얼마나 더 걸어야 할까. 우리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우리의 깜냥에 되지도 않을 어려운 도전을 시작해 버린 것은 아닐까. 이대로 하루 만에 뚜르 드 몽블랑을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머릿속은 점점 더 좌절에 가까운 모습이 되어갔다. 사위는 어느새 어두워지고 우리는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해서 한걸음 한걸음 내딛었다. 우리가 몇 시간째 걷고 있지? 아침 9시에 출발했으니 12시간째 걷고 있는 셈이었다. 첫날부터 혹독했다. 새카만 밤중이긴 했지만, 다행히도 비박지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텐트 칠 자리는 딱 하나 남아있었다. 텐트에 다리를 뻗고 누우니 살 것 같았다. 하지만 내일이 걱정되기도 했다. 오늘 이렇게 걷고도 내일 또 하루 종일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내 다리가 튼튼할까? 아쉬운 대로 자그마한 텐트 안에서 이리저리 다리를 주무르고 스트레칭도 한 후 에라 모르겠단 심정으로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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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중없이 무작정 걷다 보니 끼니때를 맞추기도 어려웠다. 두세 시가 되어 느지막이 점심을 챙겨 먹곤 했다. 걷느라, 자연을 보느라 정신이 없어 점심때가 되었는지도 몰랐다. 샤모니에서 미리 사 온 간편식들은 뜨거운 물을 파우치에 부어 먹는 방식이었는데, 둘째 날 점심을 먹을 때쯤엔 담아온 물이 바닥이 나 있었다. 길가에 흐르는 물을 받아먹곤 했는데, 받아두었던 빙하 물을 다 마셔버렸던 것이다. 우리는 잠시 고민했다. 점심을 굶어야 하나, 아님 딱딱한 밥알을 씹어 먹어야 하나. 그러다 그가 바닥에 얼어붙은 눈을 발견했다. 저거라도 퍼서 먹는 것은 어떻겠냐고 하였다. 우리는 바닥에 눈을 살살 긁어 담아 녹였다. 물 위에 무언가 떠다니긴 했지만, 신경 쓸 형편이 아니었다. 그렇게 주먹구구로 챙겨 먹는 점심도 즐거웠다. 모든 게 추억이 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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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날 목적지까지 걷지 못했으니, 둘째 날 목적지로 되어 있던 엘리자베타 산장까지 이튿날 도착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불가능했다. 돌연 우리는 무계획으로 뚜르 드 몽블랑에 온 사람이 된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이곳은 걷다 보면 적어도 하루 한 번 이상은 산장을 만나고 비박지나 캠핑장도 쉽사리 찾을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뚜르 드 몽블랑 정규코스를 따라 일단 걷자고 했다. 사람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찌저찌 되겠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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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은 금방 잊혀졌다. 눈앞에 놓인 풍경들을 보느라 너무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풍경이었다. 정말 어떤 때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게 내가 직접 보고 있는 것이 맞는 건가? 걷다 힘들면 아무 바위에나 걸터앉아 쉬고, 목이 마르면 바위틈으로 흐르는 물을 받아 마셨다. 미리 세웠던 계획을 놓아주고 나니 여유가 찾아왔다. 걸을 수 있는 만큼만 나아가기로 정리하고 나니 오히려 편했다. 우리의 걸음은 느긋해졌고 그만큼 주변 자연을 맘껏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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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까마득히 이어진 내리막을 걸어 내려왔다. 공기가 맑아 그런 것인지, 눈앞에 시야를 가리는 게 없어 그런지 가까워 보이는 산 아래 산장도 당도하기까지 몇 시간이 걸리곤 했다. 다리가 묵직해지는 게 느껴질 때쯤 도착한 산장. 그곳에서 마시는 시원한 맥주는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한 보답인 것 같았다. 오늘은 해가 지기 전에 텐트도 쳤다. 괜히 하루 만에 부쩍 성장한 기분까지 들었다. 얄팍한 마음은 금세 뒤집어졌다. 이곳에 오길 참 잘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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