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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여행 : 뚜르 드 몽블랑(TMB) 백패킹(2)

가장 단순하고 질리지 않는 놀이

by 이사공

뚜르 드 몽블랑에서 보내는 셋째 날이 밝았다. 처음엔 꼼꼼하게 쌌던 가방도 이제는 대충 욱여넣어 둘러메면 그만이다. 도시에서의 여행과 다르게 고민 없이 그저 길을 따라 걸으면 되는 자연에서의 여행이 너무 좋다. 산 위에는 하얀 눈이 보이고, 발치에 흐르는 물은 얼음물처럼 차지만 바지런히 걷는 우리는 금세 더웠다. 바보 같이 긴바지를 여러 벌 챙겼던 우리는 후회했다. 오늘은 처음으로 걸어서 국경을 넘어가는 날이다. 국경은 세이뉴 고개를 기점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나뉘어 있다. 어제 긴 긴 내리막을 내려온 만큼 오늘은 거대한 오르막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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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사람들은 모두 표정이 밝았다. 우리를 포함한 모두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일 터였다. 마주치면 반갑게 봉쥬르! 인사 나누고, 서로가 가진 정보도 간단히 나눈다. 3일째가 되니 모두 비슷한 기간 이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인지라 마주치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시간도 길어졌다. 여러 번 마주치는 사람들은 은은한 친분 같은 것도 생겨, 산장에서 다시 만나곤 할 때마다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 반갑게 인사 나누기도 했다. 이곳에는 생각보다 아시아인이 많지 않아 우리를 먼저 알아봐 주는 서양인 친구들도 몇몇 있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유럽사람들을 마주친 탓에 기억을 되짚어 보아야 겨우 알아보곤 했는데, 먼저 반갑게 불러 인사해 주니 고맙고도 미안했다. 모두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이라 말하지 않아도 공유되는 감정 같은 것이 있었다. 우리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마냥 좋았다. 우리가 지금 행복한 만큼 이곳의 사람들도 행복으로 가득가득 채워져 있을 거라 생각하니, 이 공간 전체가 따스한 기운으로 가득 찬 듯 느껴졌다. 주변에 공기처럼 채워진 온화한 분위기가 마음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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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뉴 고개가 가까워질수록 바람이 엄청나게 강해졌다. 돌을 쌓아 만든 자그마한 표시 석이 전부인 국경이었지만, 그래도 이제 이탈리아로 넘어간다고 하니 괜스레 더 의미 있게 느껴져 사진도 찍고, 구름을 넘어선 산봉우리들도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다. 한 커플이 멀찍이 보이는 눈 덮인 산봉우리를 보며 사진을 찍고 기뻐하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다가가 물어볼 것이 있다고 하자 무엇을 물어볼지 벌써 아는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혹시 저 산봉우리가 몽블랑인가요? 그들은 내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활짝 웃는 얼굴로 그렇다고 대답해 주었다. 가까이서 바라보는 몽블랑은 양옆으로 펼쳐진 수많은 봉우리 가운데서도 그 위엄을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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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모니에서 뚜르 드 몽블랑 트레일로 이동하기 위해 탔던 버스에서 등반 짐을 짊어진 클라이머들을 많이 보았다. 특정 정류장에서 우르르 내리는 것을 보니 우리도 따라가고 싶었다. 이번 한 달 여행에서는 캠핑 장비도 있고, 챙겨야 할 짐을 백팩 하나에 모두 욱여 담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등반 장비까지 챙기는 것은 무리였다. 고민을 안 했던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클라이밍 장비까지 챙겨 들고 오는 것은 힘들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


우리는 사실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아니 싫어했다. 10년 전에는 불암산을 오르다가도 포기할까 여러 번 고민했을 만큼 등산에 소질도 없었다. 그런 우리가 클라이밍을 만났다. 자연 암벽을 찾아다니는 것에 재미가 들려 대중교통으로 찾아가기 번거로운 곳도 버스며, 기차며, 택시까지 이용하여 반나절을 걸려서라도 찾아가곤 했었다. 한 번은 인천의 하나개 암장을 가던 날이었다. 하필 비가 쏟아져 아쉽게 등반을 멈추고 짐을 챙겨 나오게 되었다. 등산길을 따라 내려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등반은 얼마 못했지만, 이것도 재밌는 경험이라 생각되었다. 자연을 벗 삼으려면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했지만, 버스는 올 생각이 없었다. 해수욕장이 있는 곳이라 휴가철엔 차가 어마어마하게 많은 곳이었다. 정류장에 앉아 계신 분께 여쭈었더니 2시간째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셨다. 우리는 걷기로 했다. 무의도에서 나오는 길은 인도가 없어 도롯가를 걸어야 했다. 나가는 차들이 끝없이 줄지어 있었다. 멈춰 선 차들을 지나쳐 몇 시간을 뚜벅뚜벅 걸었다. 멀리 바닷소리가 들리고 길녘에는 잡풀이 무심히 자라 있다. 우리가 걷는 속도에 맞춰 천천히 표정을 달리하는 풍경에 지루할 새가 없었다. 간간이 시골 개들이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걷는 것이 무엇이길래 이리도 기분이 좋을까. 등반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은 애저녁에 잊어버렸다. 이렇게 재미나게 걷고 있는데 뭐가 더 필요하리. 이날 깨닫게 된 우리의 두 가지 취향으로 말미암아 백패킹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첫째는 밖에서 머무는 게 좋다는 것, 둘째는 무한정 걷고 싶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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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면 해가 지고 뜰 때까지 밖에서 머무는 백패킹. 우리는 마치 오래 묵은 갈증이 해소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상황이 허락한다면 가능한 밖으로 나섰다. 주말이 다가오면 이번엔 어디로 떠날지 고민하느라 바빴고, 캠핑을 다녀오고 나면 우리 너무 행복했지 하며 추억을 나누는 일로 일주일을 또 보냈다. 거의 중독되다시피 했던 것 같다. 미처 캠핑을 하기 어려운 때에는 가까운 산으로라도 나섰다. 등산이라도 하고 와야 속이 풀리는 듯했다. 그렇게 자연에 홀리듯 우리의 시간은 흘러 여기 뚜르 드 몽블랑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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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르 드 몽블랑을 걷는 동안 정말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우리는 오늘밤 호보 캠핑장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이곳에 오게 된 것도 모두 길 위에서 만난 친구 덕분이었다. 이 캠핑장은 뚜르 드 몽블랑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오는 곳이지만 정규 루트에서 조금 벗어나 있어 사전에 정보가 없으면 찾아오기 쉽지 않은 곳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오늘밤을 보내야 할지 막막한 찰나에 혼자서 뚜르 드 몽블랑을 걷고 있는 한국인 친구를 만났다. 그의 뒤를 따라 안락한 캠핑장까지 올 수 있었다. 우리는 3일 만에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벼락같이 금방 샤워를 마치는 그도 이날만큼은 한참이 걸렸다. 뜨거운 물이 너무 기분 좋아서 한참을 씻었다고 했다.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바에서 맥주도 한잔 사서 마시니 트레일에 들어선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휴식을 취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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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식사를 마친 후 길에서 마주쳤던 한국인 트레커들끼리 한 상에 모여 앉았다. 같은 길을 걷고 있지만 서로의 경험은 달랐다. 우리가 미처 가보지 못한 고개를 넘어온 친구, 멋진 호수를 발견하여 몇 시간을 그곳에서 쉬다 겨우 걸음을 돌려 내려오셨다는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역시나 모두가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던 이야기, 여러 도시를 여행했던 경험을 이야기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러버렸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우리도 앞으로의 시간을 더욱 멋진 여행으로 가득 채워야겠단 욕심이 마음에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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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날이 밝고 우리는 다시 짐을 쌌다. 일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필요한 것이라곤 걸을 수 있는 다리와 짐을 짊어질 어깨가 전부인 이 단순함이 사랑스러웠다. 밖에 있는 게 너무 좋다. 지붕 없는 곳이 좋다. 등반 여행을 다니며 여러 날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안으로 들어가기 싫었다. 등반을 마치고 식당에 자리를 잡을 때도 가능하면 야외 테이블로, 그도 안되면 밖이 보이는 자리를 잡곤 했다. 그렇게 우리는 끊임없이 밖으로 나가길 원했다. 바깥의 바람, 온도, 소리, 냄새 모든 것이 좋았다. 콘크리트 안에 박혀 있기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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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질리지 않는 놀이는 걷는 것이다. 걸으면서 보는 풍경은 끊임없이 변화무쌍하다. 지루 하려야 지루할 수가 없다. 눈에 밟히는 것들을 모두 들여다보고 이야기 나누고 기록하려면 걷는 속도가 가장 좋다. 걷는 속도에 이미 익숙한 뚜벅이 여행자인 우리는 차창으로 지나는 재빠른 풍경에 혼이 쏙 빠진다. 보고 싶은 것 원 없이 보고, 마음에 드는 곳에 머물며 놀기 위해 우리는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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