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 하는 고생
무계획으로 뚜르 드 몽블랑을 떠돌던 우리는 적당히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다가 어떻게든 샤모니로 돌아오자 생각했었다. 호보캠핑장을 떠나 버스를 타고 꾸르마이에르 마을로 이동했다. 이 마을에서 식사를 하고 다시 트레일로 들어설 생각이었다. 밥을 먹으며 계속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조금 더 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스위스 쪽까지 둘러볼 방법은 없을까? 우리는 일단 버스정류장에 가보기로 했다. 그곳에 우리와 같이 큰 배낭을 둘러 멘 커플이 보였다. 어떤 버스를 기다리는지 물어보러 갔다. 그들이 기다리는 버스는 보나띠 산장까지 가는 버스였다. 그들이 주머니에 들어있던 종이 지도를 펼쳐 위치를 보여주었다. 우리가 찾아보았던 버스들 보다 훨씬 멀리까지 데려다주는 버스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잘 하면 남은 기간 동안 걸어서 샤모니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을 따라 무작정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버스는 자그마한 산 앞에 멈춰 섰다. 친절한 그 커플은 버스에서 내릴 준비를 하며 우리도 챙겨주었다. 걸음이 빠른 그들과는 가볍게 인사 나누고 우리는 천천히 산행을 시작했다. 우리는 신났다. 뚜르 드 몽블랑에 할애하기로 했던 일주일이 벌써 중반쯤 접어들게 되자 사실상 한바퀴를 도는 것은 포기한 상태였다. 어차피 다 걷지도 못하는데 한바퀴를 돌든 돌지 못하든 무엇이 문제인가 싶지만 큰 걸림돌이 있었다. 우리는 어찌 되었든 샤모니로 돌아가야 하는데, 샤모니로 가는 방법은 한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조금 더 걸어갈 수 있더라도 샤모니로 돌아가려면 다시 코스 중반으로 돌아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보나띠 산장까지 건너뛸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계획은 다시 수정되었다. 물론 한편에는 아쉬움도 있었다. 시간이 무한하여 대중없이 걷기만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언젠가 다시 뚜르 드 몽블랑에 올 때는 시간 부자가 되어 돌아오고 싶었다.
보나띠 산장을 떠나 엘레나 산장 방향으로 걸었다. 이곳의 길은 프랑스에서 걸었던 길과는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좁은 폭의 오솔길이 이어져 조금 더 아기자기한 분위기가 있었다. 주변의 산이며, 흐르는 물도 조금 더 작아진 것처럼 느껴졌다. 계속해서 비슷한 풍경을 마주할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국경은 아무 의미 없는 인간이 정한 경계일 뿐인데, 그에 따라 풍경이 달라지니 신기했다. 고단한 산행길에는 잠시 앉아 다디단 간식을 먹는 일도 커다란 낙이다. 멋진 산그리메가 걸려 있고 주저앉을 풀밭이 있으면 우리는 이때다 하고 쉬어갔다. 산에서는 인터넷이 거의 되지 않았는데 전혀 허전함이 없었다. 세상 구경이 이리 재밌는데 손바닥만 한 휴대폰 화면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엘레나 산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저녁 시간이 되었다. 텐트를 칠 곳이 마땅치 않아 산장에 양해를 구하고 산장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 이미 다른 트레커들의 텐트가 여러 동 보였다. 마침 텐트를 펴자마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토독토독 빗방울이 텐트에 부닥치는 소리를 들으며 점심에 먹고 남은 차게 식은 피자를 먹는 데 왜 이리 기분이 좋은지. 다 식은 피자도 칠첩반상 부럽지 않게 맛이 좋았다. 마치 긴 여행을 할 때에 숙소로 돌아오면 집에 온 듯 마음이 놓이는 것처럼 이제는 텐트를 펴고 들어와 앉으면 그와 같은 아늑함이 있었다. 텐트가 집처럼 익숙했다. 내일은 스위스로 넘어가니 이제 일정 고민 없이 걷기만 하면 되었다. 한시름 놓은 우리는 편안히 잠에 들었다.
나는 몸을 움직이는 것이 그렇게 달갑지 않은 사람이었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어도 그다지 답답함을 느끼지 않았다. 약속은 웬만해선 잡지 않고 소파에 앉아 하루를 보내도 아쉬울 게 없었다. 힘든 것은 싫었다. 등산은 사서 하는 고생이라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심지어 트레킹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등산은 그나마 정상에 올라 성취감이라도 있는데, 트레킹은 앞으로만 걷는데 무슨 재미로 하는 거예요?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기도 했다. 여하간 등산이건, 트레킹이건 부러 고생을 하러 가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이해라는 것은 경험의 크기와 비례하는 거더라. 모르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경험이 많아지면 이해의 폭도 넓어진다. 그렇게 나는 고생의 단맛을 알아갔다.
청주에 암벽 등반을 하러 갔던 날이었다. 예보에도 없던 비가 갑자기 쏟아져 돗자리며 짐이며 모두 머리 위에 짊어지고 내달린 적이 있다. 함께 간 일행들 모두 정신없이 비 피할 곳으로 내달리는 와중에 뒤따라오고 있던 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활짝 웃으며 이야기 했다. 추억이 생겨서 좋다고. 이것도 추억이라고. 오랜 시간 함께 하며 그런 그에게 많이 배웠나보다. 나도 이젠 여러 우여곡절도 추억이란 색채를 칠해 오롯이 간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어느날은 문득 고생이 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무난한 일상 속에서 고생을 그리워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불현듯 놀랐다. 그는 자주 이야기하곤 한다. 힘들어야 더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정말 맞는 말이다. 부러 고생 거리를 만들어내지는 않지만 우리는 하루하루 체력을 전부 소진할 만큼 부지런을 떤다. 그렇게 지친 몸으로 숙소에 돌아오고 나면 소중한 우리의 하루가 여행으로 또 한 번 가득 채워졌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무리해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하루를 이루는 일 분, 일초의 시간들을 모두 감사히 여기는 마음으로 보낸다. 나와 그가 함께 보내고 있는 이 시간이 사무치도록 소중하다.
뚜르 드 몽블랑을 걸으면서도 우리는 여행에만 빠져 사는 사람들처럼 앞으로 떠날 여행들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곤 했다. 특히 이곳에 와서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자연을 만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동안 우리는 도시에서 도시로만 이동했다. 도시 여행도 물론 매력이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그 안에 스며들어 보는 시간이 귀하다. 하지만 이제 도시는 볼 만큼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직 못 가본 다른 문화권의 나라들을 여행하게 된다면 또다시 도시를 거닐 테지만, 자연만큼 색다른 경험을 안겨주는 곳은 없었다. 사람 사는 곳 다 똑같다고 하지 않던가. 비행기로 한참을 날아 당도한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은 닮아있게 마련이다.
예전엔 반대로 생각했었다. 산은 다 똑같고, 도시는 모두 다르다고 말이다. 그것은 내가 머리로 그려낼 수 있는 산의 모습이 다 똑같았기 때문이다. 나의 상상력의 결핍이 그려낸 똑같은 모습의 자연들, 그것이 전부라 여겼다. 하지만 자연에 머무는 시간이 늘면서 자연에 대한 나의 인상은 달라졌다. 이렇게나 다채로운데, 이 지구를 다 둘러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벌써부터 아쉬워 몸서리가 쳐졌다. 우리는 욕심쟁이가 되었다. 자연을 탐내는 욕심쟁이. 더 깊이, 더 많이 자연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 뚜르 드 몽블랑을 걷고 있는 이 순간에도 더 많은 풍경이 탐난다. 조바심 비슷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가고 싶은 곳이 많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일주일짜리 국내 여행을 계획할 때에 더 이상 가고 싶은 곳이 없어 애먹은 기억이 있다. 물론 국내에도 좋은 곳들이 많고, 우리보다 멋진 곳을 많이 여행하신 선배님들은 우릴 보고 웃을지도 모르지만, 그동안 가고 싶던 곳들을 부지런히 다니다 보니 어느새 조금씩 우리가 작성했던 국내 여행 리스트가 동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지구에는 아직 우리가 갈 곳이 천지다. 바닥날 걱정도 없다.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이곳을 여행하면서도 다음 여행을 상상해 보는 우리는 정말 답 없는 여행중독이다.
스위스에는 한참동안 포장도로를 걸어야하는 구간이 있다. 우리는 그 구간을 버스를 타고 건너뛰어 캠핑장으로 바로 이동했다. 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목재로 지어진 집들을 보자 이 곳이 스위스라는 것이 체감되었다. 우리는 캠핑장에 도착하자마자 텐트를 허겁지겁 펼치고 바로 걸어 나왔다. 캠핑장 근처에 호수가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호수에서 수영을 해 본 적이 없는 우리는 이번 여행에서 꼭 한 번 호수 수영을 해보자고 다짐했었다. 이번 한달여행에서 처음 만나는 호수이니 만큼 안 가볼 수가 없었다. 캠핑장 직원은 아직 물이 찰 거라고 했지만 막상 호수에 오니 금방 수영을 마친듯한 청년들이 보였다. 우리도 용기를 내어 물에 들어가 보았다. 물은 생각보다 더 차가웠다. 나는 몸이 얼어붙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는 사이 그는 풍덩 몸을 담갔다. 수건을 뒤집어쓰고 물가에 앉아 쉬던 청년들이 그에게 용기 있다고 박수를 쳐주었다. 물에 몸을 담그는 것 만으로도 하루가 다채로워지니 참 신기한 일이다. 우리는 따뜻한 물로 샤워를 마치고 개운한 기분으로 4일 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