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고 끝은 다가온다
산에 오르면 인터넷이 안 되는 줄도 몰랐던 우리는 종이 지도를 챙기지 못했다. 캠핑장에서 다른 트레커에게 미리 길을 물어보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곳의 기후가 건조해서 그런 것인지 나의 입술은 부르트고 얼굴도 거칠어졌다. 피부가 너무 건조해져서, 갈라져 피가나기도 했다. 생각 없이 걷기만 하느라 거울을 볼 일도 없었다. 산장에 잠시 들렀을 때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건조해진 탓에 얼굴은 할머니처럼 쪼글쪼글해져 있었다. 생각해 보니 뚜르 드 몽블랑에 들어서고 처음 거울을 들여다본 것이었다. 그래도 나름 산사람이 된 기분이 들어 뿌듯해지는 내가 웃겼다. 고생스러운 모든 것에 낭만이 묻은 것처럼 느껴진달까. 그런 기분이었다.
시간이 흐르니 오히려 몸이 가벼워지는 듯 느껴졌다. 등산은 다른 실내에서 하는 스포츠들처럼 매일 같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니, 산을 자주 타는 사람도 장기트레킹에 돌입할 때면 3일째까지는 매번 몸이 고되다고 하셨다. 같은 이유에서인지 우리는 지난날들보다 오히려 피곤함이 덜 해진 기분이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가방의 무게도 익숙해지고, 쉼 없이 다리를 놀리는 것도 고단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몇 날 며칠이고 더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걷는 것은 몸뿐 아니라 마음에도 좋다. 니체는 ‘모든 생각은 걷는 자의 발끝에서 나온다’고 했고, 칸트는 매일 오후 3시 30분이 되면 하루도 빠짐없이 걷기 위해 집을 나섰다. 걷다 보면 얼기설기 뒤얽혔던 생각은 매듭이 풀리고, 세상 가장 무거운 것 같았던 나의 고민과 걱정은 헬륨 풍선처럼 무게를 잃는다. 실제로 하릴없이 걷다 보면 뇌에서 생각을 정리하는 부분이 활성화 된다고 한다. 원시시대 우리 조상들로부터 이어받은 우리의 신체는 걷고 뛰는 동안 불안감이 낮아진다는 글도 보았다. 과거 조상들은 위험한 동물, 상황으로부터 달아나야 했기 때문에 걷거나 뛰는 동안 도파민이 나오는 거라는 설명이 덧붙여 져 있었다. 걷기는 내 몸이 자연스럽게 원하고 있는 것이다. 온종일 걷다 보니 느껴졌다. 아 우리는 이런 시간을 원하고 있었구나.
멀리서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높은 산 위에 있다 보니 시커멓게 드리워진 비구름이 다가오는 것이 눈으로 보였다. 우리는 도망치듯 걸었다. 주변 나무들이 침엽수라 비가 쏟아지면 피할 곳이 없는 처지였다. 조금 더 가면 산장이 있다고 하니 비가 쏟아붓기 전에 빨리 산장으로 피할 심산이었다. 산장이 시야에 들어올 때쯤엔 빗줄기가 거세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산장에 도착해 먹을거리라도 사 먹으며 안에서 쉬고 싶었는데 산장지기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안에 음식들이 보이는데도 팔지 않는다고 하셨다. 이미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다른 트레커들이 산장 밖 처마 밑에 줄지어 서 있었던 이유였다. 우리도 하는 수 없이 그들을 따라 처마 밑, 마지막 남은 두 자리에 비집고 들어가 섰다.
비가 쏟아지니 산 아래에서 풀을 뜯던 소들이 산장이 있는 곳까지 올라왔다. 뚜르 드 몽블랑을 걸으며 방목된 소들을 마주칠 때마다 그들의 여유로운 모습을 하염없이 구경하느라 걸음을 옮기질 못했던 우리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소들과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산장 문 앞까지 다가온 소는 무엇이 그리 궁금한지 목을 쭈욱 빼 내밀고 울타리 너머를 살폈다. 무우- 소 우는 소리가 빗소리를 깨고 울려 퍼졌다. 우리가 여적 비를 맞으며 걸을 일이 없었던 것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언제고 이런 궂은 날을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해 왔었다.
비는 조금씩 줄어들었고, 산장 처마 밑에 어깨를 붙이고 섰던 사람들도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우리도 비가 오래가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걷다가 발밑에 펼쳐진 풍경을 돌아보니 등산로 옆으로 거대한 무지개가 걸렸다. 시야를 간섭하는 것이 없는, 산 위에서 내려다본 무지개는 그 뿌리까지 선명하게 내려다보이더라. 무지개는 금세 흐려지기 시작했지만 산을 내려오는 내내 머릿속에 사진 찍힌 듯 무지개가 떠 있었다.
비가 서서히 그치고 젖은 몸이 추위를 느낄 때쯤 캠핑장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거의 꼴찌로 캠핑장에 들어섰다. 캠핑장의 매점도 곧 문을 닫을 거라 하여 급하게 라면을 몇 봉 사고 자리를 폈다. 저녁 먹을 준비를 하며 오늘 하루를 톺아 보았다. 문득 오늘의 좋았던 일은 산행 중 비가 쏟아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번거로움이 배가되는 비가 어떻게 좋을고 싶겠지만 우리는 더 행복했더라. 다행스럽게 마지막 남은 산장 처마를 얻어쓸 수 있어 그랬고, 비를 피해 산장까지 올라온 소들과 인사 나눌 수 있었던 것이 그랬고, 산꼭대기에 거대하게 걸린 무지개를 만난 점이 그랬다. 비를 만난 덕에 마주할 수 있었던 순간들이다. 참 고마운 비가 아닐 수 없다.
오늘로써 우리가 뚜르 드 몽블랑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바닥났다. 시작을 했으니 언제고 끝은 다가오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마음은 헛헛했다. 우리는 발므 고개까지 오른 후 리프트를 타고 하산하며 이번 여정을 끝내기로 했다. 산장 앞 테이블에 앉아 부러 느린 손짓으로 파이와 커피를 먹으며 조금이라도 마지막 시간을 붙잡으려는 듯 앉아있었다. 산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하루하루가 실감 나지 않을 만큼 행복했다. 포기해야 할까 봐 겁을 먹기도 했고, 부질없던 계획은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의 따스한 친절을 받고, 지나치며 '봉주르' 인사 나눈 이는 모두 헤아릴 수도 없다. 이제 그 이야기가 마무리될 시간이다.
땅에 붙어버린 듯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산을 내려가는 리프트 티켓을 끊었다. 리프트를 타고 내려가며 발밑으로 가까워졌다 멀어지는 산봉우리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울었다. 너무 행복했어서 울었다. 눈물이 자꾸만 쏟아졌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아쉬움만 있는 것도 아니고 슬픔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너무 행복했다. 내가 디딘 걸음과, 마주했던 자연과, 친절한 얼굴들이 떠오르고 떠올랐다. 뚜르 드 몽블랑에서 보낸 일주일이 너무 소중했다. 그 소중한 시간이 마땅히 끝을 맺고 추억이라는 서랍으로 들어가야 하는 시점이 오면 언제나 그렇듯 나는 마음 한구석이 흐려진다. 산속에 포옥 안겨 걸어온 시간이 지나고 보니 긴 긴 꿈을 꾼 듯 벌써 그리워졌다. 그렇게 우리의 첫 장거리 트레킹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