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산의 등산로는 매우 평탄했다. 차도 꽤 다니고 군데군데 북적이는 곳도 보였던 무릉농장 풍경과는 다르게 등산로는 들어서자마자 조용했다. 한 걸음에 다른 세상으로 넘어온 것 같았다. 마치 관광객의 영역과 등산객의 영역 사이에 나지막한 울타리가 있어, 우리 둘은 그걸 훌쩍 뛰어넘어 들어온 기분이었다. 공기마저 순식간에 달라져버린 듯했다. 무려 해발 3,886m의 대만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 치고 등로는 싱거웠다. 너덜길도 아니고, 돌계단도 아니었다. 산책하듯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 흙이 잘 다져진 비탈길이 길게 이어졌다.
‘니하오!’ 스치는 등산객들마다 인사를 나누었다. 니하오만 했을 땐 다들 우리가 외국인인 걸 눈치채지 못하시더라. ‘안녕하세요’는 듣는 순간 외국인인 게 티가 나는데, 니하오는 짧고 쉬워서 그런지 티가 덜 나나 보다.
곧바로 중국어로 질문을 던지시곤 했는데, 눈치로 대충 알아듣고 '산리우지우 산리우지우(삼육구 삼육구)' 라며 검지로 산 꼭대기 방향을 가리키면 대단하다고 엄지를 들어 보여주시곤 했다. 어디까지 가냐고 물어보시는 건 한국이나 대만이나 같구나. 삼육구는 원래 우리가 묵을 계획이었던 산장의 이름이다. 유튜브나 블로그를 보니 369 산장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 일찍 정상으로 일출산행을 가는 코스가 기본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퍼밋신청을 하면서 뒤늦게 알게 되었다. 369 산장은 보수공사 중이고 이미 문을 닫은 지 2년이 넘었으며 언제 다시 오픈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산장 위치 앞 쪽에 임시로 캠핑장을 마련해 두어 비박을 할 수 있었다. 사이트 수는 적었지만 신청자가 많지 않아 자리가 여유 있었다. 덕분에 우리의 가방은 무거워졌지만 산에서 캠핑이라니 이 얼마나 즐거운가. 산장도 좋고 캠핑도 좋아 별 불만은 없었다.
대만의 12월 마지막 주는 추울지 더울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인터넷을 찾아보아도 어떤 이는 '누가 패딩 챙기라고 했냐!'며 화내고 또 어떤 이는 '누가 대만 겨울 따뜻하냐고 했냐!'며 화를 내고 있었다. 그래도 산이면 도시보다는 더 추울 것이라 짐작하며 초겨울 산행 정도의 옷차림으로 출발을 했다. 하지만 오르막을 조금 오르자 금세 더워졌다. 한국 날씨로 치면 바람 잘 통하는 얇은 티 하나 걸치면 딱 좋은 선선한 날씨였는데, 대만분들은 많이 추워하시는 것 같았다. 겹겹이 껴입고 오르시는 분들이 많아 보였다. 우리는 온도 딱 좋다며 허세 부리며 산을 올랐다. 이때까진 상상도 못 했지, 눈이 그렇게 쏟아질 줄은.
등산로를 1시간쯤 걸으면 바로 치카산장이 나타난다. 거의 산에 들어서자마자 산장이 나타나는 느낌이다. 하지만 시간은 어느새 점심시간, 나에게는 적절한 위치였다고 할 수 있겠다. 관리인께 취사실을 사용할 수 있는지 여쭤본 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앞서 걷고 있는데 건물 뒤편으로 갈색의 큰 동물이 후다닥 도망치는 것을 보았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갈색의 큰 털동물이 카피바라 같아 보였다. 나는 바로 그에게 뒤돌아 나가자고 했다. 큰 동물을 보았다고, 빨리 건물뒤로 가자고. 그는 영문도 모른 채 건물 뒤로 향하며 무슨 동물이냐고 물었다. 내가 카피바라였다고 하자 그가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다행히 그도 알 수 없는 갈색 동물의 엉덩이를 보았다. 그 동물은 산비탈을 따라 달아나 버렸다. 그는 산양 같다고 했다. 나는 뿔이 없었다며 반박했다. 궁금해서 AI에게 대만 설산에서 카피바라 같은 동물을 보았는데 무엇일 것 같냐고 물어보았다. 돌아온 대답은 카피바라는 절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대만 문사슴'이라는 귀여운 동물사진을 보내왔다. 사진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내가 본 건 이 사슴이었구나. 귀여워...
다시 취사실로 돌아와 어제 마트에서 산 대만 즉석식품을 데웠다. 사실 포장에 그려진 사진만으로 대충 마음에 드는 걸 고른 거라 맛이 어떨지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아주 맛있었다. 심지어 내용물도 실해서 생각보다 근사한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대만 요리들은 낯선 향신료가 느껴져도 베이스가 되는 맛은 대부분 간장 양념이라 한국인 입맛에 잘 맞는다.
옷차림을 좀 더 가볍게 하고 다시 산길로 들어섰다. 두리번두리번 사슴을 찾아보았지만 멀리 도망가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치카산장은 물이 풍부해서 사람뿐 아니라 여러 동물들의 휴식처 역할도 하고 있나보다.
이어지는 산 길은 지루했다. 나무가 우거진 숲이라 조망은 트이지 않고 길은 잔잔했다. 지그재그를 그리며 오래도록 걸어야 했다. 무거운 박배낭을 멨지만 길이 가파르지 않아 힘들지 않았다. 이거 뭐야 생각한 것보다 난이도가 너무 쉬운걸? 참 간사한 마음이지. 세상 쉬운 산은 없다며 내가 헉헉대는 이유에 대해 합리화하다가도 어려울 줄 알았던 산이 쉬우면 또 금방 의기양양 해져서는 '나 산 좀 타나 봐?'싶은 것이다.
일기예보에 비가 있었기에 우중 산행을 할까 봐 걱정을 했는데 오후가 다 가도록 비는 내리지 않았다. 얼마나 다행인지. 설산의 숲은 습하고 우거졌다. 이끼 낀 숲이 신비로웠다. 나무나 바위가 매우 새롭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인 풍경은 어딘가 낯설었다. 다른 나라의 산에 오면 느껴지는 이 낯선 느낌이 좋다. 여전히 산은 산인데 오묘하게 다른 그 느낌이 좋다.
369 임시캠핑장은 생각보다 멀었다. 점점 해가 넘어가고 사위는 어두워져 갔다. 지도로 봐서는 거의 다 와가는 것 같은데도 그런 상태가 지난하게 이어졌다. 조금씩 어두워져 가는 걸 느끼고는 있었지만 귀찮은 마음에 헤드램프를 꺼내지 않은 채로 한참을 걸었다. 순간 주변이 새카매지며 하늘을 뚫을 듯이 높게 선 나무들이 우리를 가득 에워쌌다. 어두워서 나무의 형태만 흐릿하게 가늠이 될 뿐이었다. 조금 무서웠다. 캄캄한 어둠 속에 나이 든 나무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이 숨을 죽이게 했다. 헤드램프를 주섬주섬 꺼내 쓸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369 임시캠핑장 푯말이 나타났다. 멋진 풍경과 함께. 아직 6시도 되지 않았지만 해는 거의 다 져버렸고 길에도 사람이 없었다. 역시 이번에도 우리가 꼴찌인가 보다.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자 우측 아래로 공사 중인 369 산장의 모습이 보였다. 정원이 100명 정도 된다고 알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자그마했다. 현재는 산장을 새로 짓기 위해 이곳까지 물자를 실어 나를 수 있는 궤도 레일을 깔고 있다고 한다. 레일은 거의 다 설치되었지만 산장 완공까지는 적어도 2~3년은 더 걸릴 거라고 한다.
저녁 6시가 되어서야 임시 캠핑장에 도착했다. 할당된 데크를 찾아야 하는데 번호가 너무 작게 표시가 되어 있어서 데크 번호 찾는 게 쉽지 않았다. 게다가 사람들은 벌써 식사도 마치고 잘 준비를 하는 듯 보였다. 헤드램프로 구석구석 비추어가며 겨우 제자리를 찾은 후 우리는 분업을 하기로 했다. 나는 취사용 천막으로 가서 라면을 끓여 오고 그는 이곳에서 텐트를 치고 있기로 했다. 해가 지자 급속도로 추워졌다. 취사용 천막은 앞 뒤로 뚫려 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버너에 손을 바짝 대고 녹여보았지만 그다지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라면물 끓는 게 한세월처럼 느껴졌다. 오들오들 떨며 완성한 라면을 들고 허겁지겁 텐트로 향했다. 라면이 불면 아쉬우니까. 그도 텐트 피칭을 이제 막 끝낸 참이었다. 나는 짐정리 따위는 미뤄두고 빨리 들어와서 라면부터 먹자고 했다.
대충 방석을 깔고 앉아 라면을 한 입 먹는 순간 살 것 같았다. 한국인은 여행에서 라면을 한 입 먹어줘야 피가 돈 달까. 그가 너무 맛있다며 어깨춤을 췄다. 해가 지도록 걸었던 피곤함이 싹 가시는 느낌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매트와 침낭을 꺼냈다. 기온이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추운 날 캠핑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는 동계 캠핑 경험이 없었다. 온도계를 확인해 보니 영하 1도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아주 추운 겨울날씨는 아니었지만 낮동안 따스한 날씨를 걷다 별안간 겨울밤이 와버리니 체감은 더 추웠다. 코가 시려 침낭 후드를 뒤집어쓰면 숨이 답답하고, 그렇다고 숨구멍을 열면 얼굴이 시렸다. 그렇게 최적의 바람구멍을 만드느라 밤새 뒤척였다. 추운 데서 자면 잠이 잘 온다고, 그래서 캠핑 오면 늘 꿀잠을 잔다고 했던 우리인데 너무 추우면 그게 안되더라. 어떻게 해도 불편했다. 그렇게 둘 다 침낭을 열었다 닫았다, 뒤집어썼다 벗었다를 반복하며 잠을 설쳤다.
온도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369 임시캠핑장은 고도 3,000미터에 위치해 있다. 북알프스 트래버스를 할 때 3,000미터를 지나본적은 있지만 이 정도 높이에 하룻밤 머물러 본 적은 없었다. 가만히 누워있으면 카페인을 과다섭취한 날처럼 심장이 방방 뛰고 진정이 되질 않았다. 몸이 피곤한데 잠이 안 오니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 혼란스러웠다. 나중에서야 이것도 고산병 증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둘 다 침낭을 부스럭대며 제대로 잠들지 못한 채 새벽이 왔다. 설산 장상에서 해돋이를 보려면 적어도 새벽 두 시에는 출발해야 했다. 우리는 일어날 시간이 다 되어갈 즈음에야 겨우 선잠에 들었다. 그런데 시끄러운 소리에 그마저도 잘 수가 없었다. 처음엔 빗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중캠핑에서 듣던 내가 좋아하는 빗소리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텐트에 쏟아져 부딪치는 소리가 정신없이 시끄러웠다. 우박이었다. 아니 이 정도는 눈이라고 해야 할까? 스티로폼 알맹이 같은 하얀 구슬들이 텐트 위로 쏟아져 내렸다. 또르르 굴러가는, 눈도 아니고 우박도 아닌 자그마한 얼음덩어리였다.
분명 일출을 위해선 두세 시쯤 출발을 한다 했는데 3시가 지나도 산행을 시작하는 이가 없었다. 그래도 조금씩 인기척이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사람들이 깨기 시작한 것 같았다. 하기사 이렇게 우박소리가 시끄러운데 잠을 잘래야 잘 수가 있어야지.
우리는 일출은 포기하기로 했다. 그보다 정상에 오를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조금 더 기다려보고 날씨가 나아지면 출발하겠노라고 했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가고 날씨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해는 이미 높이 떴고 아침 7시가 되었다. 우리는 주변의 다른 텐트들의 동태를 살폈다. 마주치는 분들마다 오늘 정상으로 향할 예정인지 물어보고 다녔다. 우리 근처에 있던 한 팀-이들 중 한 명은 해가 뜨기도 전에 정상으로 출발했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정상행을 포기하고 하산할 예정이라고 했다. 어쩐지 다들 여유가 넘쳤다. 눈 쌓인 풍경에서 사진을 찍고 느긋하게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도 결국 하산하기로 결정했다. 우박소리에 눈을 뜬 새벽 2시부터 지금까지 매시간마다 포기를 고민했지만 내심 정상을 갈 수 있을 거란 기대를 놓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포기하게 되었다. 우리가 정상을 포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동네 산도 아니고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정상도 못 보고 돌아서자니 속이 쓰렸다.
그래도 출발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하산을 결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제야 텐트 뒤로 펼쳐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눈이 환해졌다. 아침 햇살을 등지고 서서 새카맣게 보이는 침엽수위로 크리스마스 장식 같은 새하얀 눈이 소복했다. 잠시 구름이 걷혀서 나무로 빼곡한 산자락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우박에 텐트가 무너질까 걱정, 정상을 못 갈까 걱정, 정신없이 두근대는 심장 박동을 걱정하느라 잠 못 이룬 채 밤을 보내는 동안 이 산은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을 마련해두고 있었다.
우리는 눈을 처음 보는 강아지처럼 신이 났다. 언제 출발한 건지 알 수 없는 등산객들이 몇몇 캠핑장에 도착하기에 그분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물론 말이 잘 통하진 않았지만 다들 정상을 포기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인중에 허옇게 콧물이 얼어붙은 채로 도착한 등산객은 이 캠핑장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기뻐 보였다. 그래 우리도 이제 슬슬 짐정리하고 하산을 하자.
눈은 내리지만 기온은 높아서 장비에 쌓인 눈들이 금방 녹아서 물이 됐다. 물건들이 젖기 전에 최대한 서둘러 짐을 싸고 싶었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눈송이가 더 크게 더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가방 바닥부터 짐을 넣느라 잠깐 옆에 내려둔 텐트나 파우치들은 금방 눈에 뒤덮여버렸다. 적당히 눈을 털어내고 조금이라도 빨리 가방에 넣는 게 최선이었다.
그렇게 눅눅하게 젖은 배낭을 짊어지고 하산을 시작했다. 눈이 쌓였으니 크램폰을 착용하고 걷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발이 무거워졌다. 뭐가 붙은건지 발을 내려다보니 크램폰 밑으로 눈이 뭉쳐 어마어마한 두께로 들러붙어있었다. 발을 세게 굴러 눈을 다 떨쳐내도 다시 몇 걸음 걸으면 금세 눈으로 된 신발굽이 하이힐보다도 높게 만들어졌다. 뭉쳐진 눈 무게 때문에 크램폰이 축 축 늘어졌다. 우리는 얼마 안 가 크램폰을 제거해야 했다.
생각해 보니 눈이 내리고 있는 와중에 산행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설산은 여러 번 가봤지만 등산하는 동안 눈이 오진 않았다. 게다가 이 눈은 흔히 젖은 눈이라 말하는 습설이었다. 어쩐지 아침에도 텐트 지붕이 몇 번씩 내려앉아서 눈을 털어냈더랬다. 이 눈이 유난히 더 무거운 눈이어서 그랬구나 싶었다. 아닌 게 아니라 등산로도 자취를 감췄다. 무거운 눈의 무게 때문에 가지가 쳐져서 길을 다 막고 선 탓이었다. 눈이 쌓일수록 점점 더 그 정도는 심해져서 우리는 눈더미를 헤치며 걷는 셈이 되었다. 와중에 어깨와 가방과 머리에는 접착력이 좋은 습설이 잔뜩 쌓였다 녹기를 반복하며 물에 빠진 생쥐 꼴을 재촉했다.
그는 윗옷은 그래도 하드쉘 덕분에 버티고 있었지만 바지는 이미 속절없이 젖어 속옷까지 다 젖었다고 했다. 몸은 점점 식었고 걸을수록 추워졌다. 장갑도 잘못 낀 탓에 장갑 안에 물이 찼다. 주먹을 꽉 쥐면 물이 주르륵 쏟아졌다. 추울수록 빨리 움직여야 그나마 추위가 가실 텐데, 몸이 점점 굳다 보니 걸음은 느려지기만 했다. 오직 치카산장만을 생각하며 젖은 옷의 찝찝함과 무게도, 오들오들 떨려오기 시작하는 추위도 이를 악 물고 참았다. 산을 내려올수록 눈은 점점 사라지고 진흙길이 나타났다. 바지 밑단은 진흙에 물들어 갔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가능한 빠르게 산장을 향해 걷고 또 걸을 뿐이었다.
마침내 멀찍이서 산장이 나타났을 땐 맥이 탁 풀렸다. 아 드디어 쉴 수 있겠구나.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구나. 산장에 도착해서 우선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이전에 야쿠시마 등산에서 가방 속 짐까지 쫄딱 젖어본 적이 있기에 이번엔 김장비닐로 단단히 채비를 했던 터였다. 다행히도 가방 속 짐들은 뽀송뽀송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기분 나쁜 젖은 양말도 벗어던지고 편안한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그것만으로도 한결 몸이 가벼워졌다. 챙겨 온 즉석식품을 따뜻하게 데워 단숨에 해치웠다. 몸에 다시 생기가 도는 게 느껴졌다. 우리의 얼굴도 화색이 돌았다.
힘든 산행을 하다 보면 내 몸이 기력을 소진했다가도 자그마한 간식과 시원한 물 한 모금에 금방 다시 회복하는 게 고스란히 느껴진다. 내 몸이 참 기특하고, 평소에 내가 얼마나 나의 몸이 보내는 메시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지내왔는지 새삼 반성을 해본다. 긴긴 산행에서 지쳐갈 때에 나는 내 몸과 대화를 한다. 어디가 아프진 않은지, 비뚤어진 곳은 없는지, 그리고 참 고생 많다고 칭찬을 해준다. 힘내자. 이제 조금만 더 가면 하산이다.
경험으로 배우는 거니까. 습설엔 아이젠을 안 끼는 게 더 낫다는 거, 눈에 옷이 속절없이 젖으면 체온관리가 안된다는 거, 그래서 귀찮더라도 단단히 채비를 하는 게 좋다는 거. 이번 산행에서는 많이도 배웠다. 다시 출발하려고 하는데 취사실에서 쉬고 있던 대만 등산객이 말을 걸어왔다. 영어가 아주 유창하고 날렵하게 마른 체구의 산행 경험이 많아 보이는 분이었다. 너희 오늘 밤 이곳에서 자고 마저 하산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산장에서 자면 무료이고 젖은 옷가지들을 말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하산하면 있는 무릉농장 캠핑장을 예약해 둔 상태였다. 사실 설산에 오기 전에 지도로만 봤을 땐 치카산장의 위치는 애매해 보였다. 등산로에 들어서서 1시간 조금 넘게 걸으면 바로 산장에 도착하기에 369 산장에서 자고 다음날 바로 하산하는 게 가장 적절해 보였다. 하지만 그때는 이렇게 고생해서 하산할 줄 몰랐지. 산장에서 채비를 다시 하고 밥도 먹고 쉬다 보니 시간이 훅 지나 있었다. 우리는 그에게 조언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나누고 예약해 둔 캠핑장으로 마저 걸었다. 그와는 다음날 아침 이란으로 가는 버스를 탈 때 다시 만나 이런저런 도움을 받았다.
걷다보니 등산로에서 탐방센터의 사람들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정말 다 내려왔구나 생각하는 순간 걸음을 헛디뎌 계단에서 한 바퀴를 굴렀다. 나는 진흙길에 정말 취약하다. TMB에서도, 일본 구주산에서도 진흙길에 어김없이 넘어졌다. 더 주의해서 걸었어야 하는데 그렇게 여러번 진흙을 굴러놓고도 이번에 또 넘어지다니. 박배낭을 메고 있다 보니 무거운 가방이 휘몰아치며 나를 땅에 메다꽂았다. 심지어 계단이라 다리나 손을 짚기가 애매해 넘어지는 순간에 허둥대다 말 그대로 공처럼 굴렀다. 손을 털며 일어나자 그가 물었다. '왜 안 멈췄어?' 나도 멈추고 싶었죠.. 하여간 나는 넘어져도 하필 진흙만 골라 넘어지니 몰골이 말이 아니다.
하산을 마치고도 거대한 무릉농장 산책로를 한참을 걸어야 캠핑장이 나왔다. 이곳은 무려 온수샤워가 가능하다. 유료 캠핑장이니 당연한 것이지만서도 이게 얼마나 감사한지. 특히 진흙에 한바탕 구른 나에겐 단물 같은 샤워였다. 퇴수구가 있으니 짜파게티처럼 물을 비워내야 하는 음식도 먹을 수 있다. 국물을 다 먹어내지 않아도 된다.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콸콸 나온다. 양치질도 할 수 있고 비누도 쓸 수 있다. 별게 다 호사스럽게 느껴진다. 산을 걷는 동안 어느새 겸손을 조금 배웠나 보다.
오늘 아침 텐트를 접고 있을 때 369 캠핑장 직원분께서 비가 아니라 눈이라 다행이지 않냐고 하셨다. 퍼붓는 눈 속에서는 정신이 없어 몰랐지만, 산행을 끝내고 펄펄 끓는 온수로 샤워까지 마치고 나니 그제야 생각이 들었다. 눈이어서 참 다행이었노라고. 빗속이었으면 얼마나 더 서러웠을까. 대만에 와서 이렇게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맞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펄펄 끓는 샤워를 마치고 배도 두둑이 채우고 벌건 볼을 하고서 침낭에 몸을 뉘었다. 그러자 오늘 아침 얼어붙은 몸을 꾸역꾸역 일으켜 텐트 지퍼를 열고 밖으로 나섰을 때 기대하지도 않았던 새하얀 설산 풍경을 선물 받은 순간이 떠올랐다. 마치 세상에 형광등이 켜진 듯 온 세상이 환하게 밝아진 것 같았다. 설산의 걸음들은 축축하고 춥고 힘들었지만 찬란하게 아름다웠다. 눈물 그렁그렁할 만큼 예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