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산에 가기로 했다 - 대만 옥산·설산 프롤로그

by 이사공

열흘의 대만 여행을 계획했다. 열흘 중 절반 이상은 산에서 보낸다. 대만에는 3,000m가 넘는 산이 200개가 넘게 있다고 하더라. 그중 동북아 최고봉이라는 옥산(玉山Yushan, 3,952m)과 대만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인 설산(雪山Xueshan, 3,886m)을 오르기로 했다. 그 외에도 산중 호수인 자밍호(嘉明湖Jiaming lake)와 활화산을 볼 수 있는 양밍산 국립공원(陽明山Yangmingshan), 빨간 산악열차가 지나는 풍경으로 유명한 아리산 (阿里山Alishan) 등 여행 일정에 넣고 싶은 산은 너무 많았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미룰 수밖에 없었다. 일정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대만의 내륙을 잇는 교통이 매우 불편한 것도 이유였다. 대만에 여러 번 다녀온 친구와 이번 여행 계획에 관해 이야기 나누다 친구가 물어왔다. '기차를 타면 훨씬 빠른데 왜 너는 버스로만 계획을 짠 거야?' 왜겠니. 기차가 없기 때문이지. 대만의 각 지역을 잇는 철도는 대부분 해안선을 따라 달린다. 때문에 산에 가려면 버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꼬불꼬불 대문자 S를 쉼 없이 그리며 깎아지른 산악도로를 달리는 탓에 소요시간도 매우 길었다.


하지만 소요시간은 나중 문제였다. 버스 예매부터가 쉽지 않았다. 한자라고는 내 이름 석 자 겨우 적어내는 까막눈이다.- 아니, 사실 내 이름도 안 적은 지 오래되어 자신 없다. 버스 노선은 구글맵으로 비교적 간단하게 검색할 수 있었다. 물론 노선이 없다고 나오거나, 말도 안 되게 환승해서 가라고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퍽 잘 작동하는 편. 문제는 어렵게 어렵게 찾은 이 버스가 예매가 가능한 버스인지, 현장에서 매표해야 하는 버스인지 구분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걸 확인하려면 각 버스 회사의 사이트에 접속해야 하는데 영어와 일본어 페이지-일본어 페이지를 제공하는 대만 사이트가 많더라-를 제공하고 있어도 가장 중요한 버스 정류장들의 이름은 온통 한자였다. 드랍다운버튼을 누르는 순간 기다랗게 나의 모니터 화면 최상단에서 최하단까지 한자로 된 지명이 나타났다. 이 중 어느 것이 샹동푸이고, 이란이고, 무릉농장이고, 타이페이인 것인가. 제미나이 없었으면 어쩔뻔했나 몰라. 나는 드랍다운 버튼을 눌러 화면 가득 찬 메뉴선택지를 스크린샷을 찍어 제미나이에게 보여줬다. 이 중 무릉농장이 어느거야? 왼쪽에서 4번째입니다. 배신감이 드는 것은 무릉농장은 '무릉'이라고만 적혀있었다. 어쩐지 아무리 봐도 4글자가 없어서 이상하다 했다. 이런 작은 차이들이 예매 난이도를 더 높이고 있었다.

정말 화면 끝에서 끝까지

퍼밋신청도 마찬가지였다. 영문페이지를 제공해도 입력을 마치고 다음 절차로 넘어가는 순간 갑자기 중국어페이지가 나타나질 않나. 드랍다운이이나 팝업창 곳곳에 꽁꽁 숨어서 살아남은 한자들이 즐비했다. 검색을 해보아도 정보가 많지 않았다. 찾아낸 정보들 마저도 잦은 변동들로 현재 홈페이지나 신청방식에 적합하지 않은 내용들이 많았다. 퍼밋신청을 진행하고 대만의 산들을 오르며 느낀 거지만 대만 관계부처에서 해외 관광객의 편의를 돕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때문에 오히려 2, 3년 전 정보들도 지금과는 상황이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조금 더 단순하고, 조금씩 더 외국인 친화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 긴 시간의 검색을 통해 느껴졌다. 계속해서 업데이트 중이라 앞으로도 해마다 작고 큰 변동사항이 있을듯하다. 그들의 노고에 감사를.

검색해서 정보를 찾는 데에는 걸림돌이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지명의 표기 방식이었다. 옥산을 예로 들면 한자로 구슬옥에 뫼산, 玉山 이와 같이 표기하고 우리는 옥산이라 읽지만 현지인들은 Yushan이라 읽는다. 나는 이것 또한 '유샨'이라 발음되는 줄 알았는데 '위샨'에 더 가까운 발음이더라. 더군다나 영어권 사람들은 뜻을 그대로 옮겨 'Jade Mountain'이라고 적는다. 물론 몇몇 사람들은 'Yunshan'이라고 발음 그대로 표기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나는 이 모든 경우를 다 검색해보아야 했다. 정보가 충분치 않으니 선택지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설산은 검색이 더 힘들었다. 설산으로 검색하면 당연하게도 눈 덮인 겨울 산만 잔뜩 나오기 때문이다. 영어로도 'Snow mountain'이다. 그나마 발음을 표기한 'Xueshan'으로 검색을 하면 동음이의어가 다 필터링되기에 내가 필요한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두 번째로 높은 산, 설산은 정보가 더 귀했다. 결국 몇몇의 버스와 몇몇의 거점 도시를 거치는 선택지들을 찾아내어 퍼즐 맞추듯 버스와 숙소, 그리고 들머리를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사실 하산 후 이란으로 나오는 버스 하나는 결국 미리 예매할 수 없어 현장예매인 것으로 찜찜하게 결론지어버린 했지만 말이다.


버스의 어려움은 또 하나 있었다. 버스를 타고 내리는 방법이 회사마다, 버스마다, 노선마다 조금씩 달랐다. 어떤 버스는 타고 내릴 때 QR코드를 무조건 태그 해야 하고-하차 시 태그를 깜빡하면 기사님께 한소리 듣는다-, 어떤 버스는 종이로 된 표를 발권해서 보여드리면 귀퉁이를 찢어내고 돌려주신다. 현지인들이 사용하는 발권 어플도 있는 것 같았는데, 나도 다운받아 보았으나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난이도가 아닌 것으로 판명 났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버스 예매사이트 주소들

국광객운 예매 사이트 :

https://order.kingbus.com.tw/ORD/ORD_M_1500_HomePage.aspx

원린객운 예매 사이트 :

https://ylbus-shop.fontour.com/




옥산과 설산은 각각 웹사이트를 통해 입산 허가 신청을 해야 한다. 외국인 슬롯이 따로 남겨져 있어 내국인 예약과는 별개로 신청이 가능하다. 일종의 혜택이라고 할 수 있다. 옥산의 외국인 신청 기간은 4개월 전부터 35일 전까지 이며 설산은 4개월 전부터 65일 전까지이다. 다만 이 슬롯도 신청인원이 초과된 경우 추첨으로 예약 여부가 정해지며 그 결과는 한 달 전에 이메일로 알려준다. 각각의 산과 신청 방식(일반 신청 또는 외국인 사전 신청)에 따라 신청기한이 다르니 잘 확인해야 한다. 산행에 퍼밋이 필요한 것은 대충 알고 있었지만 귀찮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가 퍼밋 신청페이지에서 기한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설산은 2달도 더 전에 신청해야 한다는 것을 퍼밋 신청을 하면서 발견했던 것이다. 신청 마감인 줄 알고 얼마나 좌절했던지. 다행히 외국인 신청이 아닌 일반 신청은 5일 전까지 가능하기 때문에 해당 슬롯을 신청하면 되는 거였다. 나는 외국인이라 외국인 신청만 이용가능한 줄 알고 설산에는 못 가는 줄 알았지 뭐야. 큰일 날 뻔했다며 가슴을 쓸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입산 신청 및 산장 예약 현황 확인처

옥산과 설산 입산 허가 페이지 : https://hike.taiwan.gov.tw/en/apply_1.aspx

* 옥산 Yushan National Park Headquarters - 2 Days(Tataka - Yushan Trails -Tataka )(Paiyun Lodge Advanced Application)

* 설산 Shei-pa National Park Ehadquarters - (grade 3) Xue Mountain trail (Foreign Advanced Application)

옥산 배운산장 예약 현황 : https://hike.taiwan.gov.tw/en/bed_6.aspx

설산 369 임시 캠핑장 예약 현황 : https://hike.taiwan.gov.tw/en/bed_1.aspx



우리의 계획은 이랬다. 설산을 먼저 등산하고 그다음 옥산을 오를 것이다. 각각의 산은 들머리 근처에 숙소나 도시가 있는 것이 아니라서 다른 거점 도시에서 아침 일찍 출발해 이동을 하기로 했다.(옥산은 동푸산장에서 묵으면 들머리 바로 앞이긴 하지만 근처에 마트가 없다.) 그래서 설산은 뤄둥에, 옥산은 르웨탄에 숙소를 잡았다. 그러니까 우리의 동선을 나열하면 이렇게 된다.


타이베이 - 뤄둥 - 설산 - 이란 - 타이베이 - 르웨탄 - 옥산 - 르웨탄 - 타이베이


이게 정말 최선이 맞는지 몇 번을 찾아보고 새로 짰는지 모른다. 결국 결론은 이렇게 가는 게 '그나마'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지도상으로 보면 설산과 옥산 사이에 타이중(대만 중부에 있는 두 번째로 큰 도시, 대전 같은 느낌이랄까)이 있다. 설산과 옥산을 바로 잇는 버스가 없으니 타이중을 거치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대만 내륙의 산악지대를 잇는 버스 노선을 복잡한 퍼즐문제를 풀듯 이리저리 연결해 보면 돌고 돌아 같은 결론이 나왔다. 타이베이로 돌아갔다 오는 게 차라리 단순하다는 것. 중부의 타이중으로 가나 북쪽 끝의 타이베이로 가나 드는 시간이 같았다. 그렇다면 교통편 선택지가 훨씬 많은 수도 타이베이로 돌아가는 게 낫겠더라. 정말 이 수수께끼 문제를 풀어내는데 몇 날 며칠이 걸렸다. 아직도 이게 가장 나은 선택이었는지 확신이 없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대만에 도착했다. 대만의 첫인상은 로맨틱했다. 타국에서 온 여행자의 눈에 뭔들 나빠 보이겠냐만 거리거리의 색채가 내가 막연히 상상해 오던 중화문화권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왜 한국엔 수많은 중국집이 있지 않은가. 대충 그런 모습을 상상했던 것 같다. 왕가위, 주성치로 대표되는 홍콩영화들과 어렸을 때 아빠 옆에서 훔쳐보던 의천도룡기, 포청천 같은 중국드라마들. 딱 그 정도 밖에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 대만은 그것들과는 달랐다. 굉장히 예쁘게 낡아있는 모습이었다. 모든 게 새것으로 반짝이는 한국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아름답게 나이 든 도시의 모습. 한 건물에서도 창틀과 난간이 집마다 달랐다. 긴 시간 보수해 가며 사용해 온 흔적이었는데, 그게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다. 오래전엔 인건비가 저렴해서 그런 건지 굳이 용도가 없는 구석구석도 공을 들여 장식을 하고, 건물마다 은은한 색채를 입혀두었다. 오랜 시간 많은 이들의 손길을 탄 건물들이 제각각 다른 얼굴을 뽐내면서도 동시에 조화로웠다.

하지만 우리는 타이페이의 낭만에 취할 겨를이 없었다. 오늘 저녁 뤄둥에 예약해 둔 숙소로 이동해야 한다. 그래야 내일 아침 버스를 타고 설산의 들머리인 무릉농장으로 갈 수 있다. 뤄둥은 작은 도시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버스 터미널이 크고 멋졌다. 6시쯤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이제 대만음식으로 배를 채울 시간. 부지런하게도 우리는 뤄둥 야시장으로 향했다. 숙소에 퍼져버리고 싶기도 했지만 대만 야시장이 그렇게 유명하다는데 당장 구경 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타이페이 인근의 유명 야시장이 아닌 지역색이 있는 자그마한 야시장을 가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숙소를 예약할 때만 해도 야시장이 코앞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걸어보니 꽤 거리가 있었다. 더군다나 비까지 쏟아졌다. 첫째 날이라 이때까진 몰랐지만 대만은 비가 오는 게 일상이더라. 다들 일상적인 얼굴로 우비를 꺼내 입고 걷는다. 비 오는 날은 야시장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조그만 지붕이라도 있으면 그곳엔 영락없이 음식을 손에 들고 비를 피하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런 북새통에도 부지런히 대만 맥주와 대만 안주로 배를 채우고 비에 젖어 식어버린 몸을 온수 샤워로 데운 후 깊은 잠에 들었다.


아침 6시, 부지런히 짐을 챙겼다. 7시, 뤄둥환승센터에서 무릉농장으로 가는 1764번 국광 버스 타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지만 어떤 방식으로 버스를 탑승하는지 그 시스템을 알지 못했다. 이른 아침이라 카운터도 닫혀 있어서-예매해 둔 표는 어제저녁에 뤄둥에 내리자마자 모두 발권해 뒀다- 탑승구 앞에 서계시는 직원분께 버스표를 보여드렸다. 그러자 어느 문에서 타는지 알려주신 후 시간이 되었을 때 오면 된다고 알려주셨다. 대만분들이 친절하다는 걸 많이 들었다. 온갖 유튜브 영상들과 소셜미디어의 피드에서 미담이 넘쳐났다. 하지만 막상 대만에 도착해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살가운 인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인상이 다가 아니었다. 터미널의 직원분께서는 우리가 가방을 부리고 화장실을 다녀오고 근처 편의점에 다녀오는 내내 우리에게서 시선을 거두질 못하셨다. 혹시 우리가 버스를 제 때 타지 못할까 봐 염려하시는 듯 보였다. 역시나 우리가 탈 버스가 도착하자마자 우리 쪽으로 오셨다. 이 버스를 타면 된다고 알려주시러 오신 거였다. 이렇게나 신경 써 주시다니. 하지만 이런 친절은 시작에 불과했다.


버스를 타고 설산의 들머리인 무릉농장으로 가던 중 버스가 갑자기 멈춰 섰다. 휴게소 같은 곳이었다. 기사님은 우리가 외국인인걸 기억해 두셨다가 콕 집어 10분이라고 적힌 번역기 화면을 보여주셨다. 안 그래도 아침에 먹은 커피 때문에 신호가 오고 있었던 그는 잘됐다며 화장실로 향했다. 나도 느긋하게 화장실로 갔다가 안에 휴지가 없어 다시 나왔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남자 화장실에도 휴지가 없을 건데, 왜 다시 안 나왔지? 카톡으로 물었더니 역시나 휴지가 없다고 한다. 손으로 뒤처리를 하려 했다나 뭐라나. 나는 급하게 버스로 갔지만 기사님이 안보였다. 휴지가 트렁크 안에 있는데 대만의 버스 트렁크는 한국버스처럼 쉽게 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버튼을 조작해야 해서 기사님이 오셔야 했다. 내가 곤란해하고 있으니 비를 피해 처마 밑에 서 계시던 아주머니가 손가락으로 편의점 쪽을 가리키셨다.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랐다. 어쩌지 고민하다 주머니에 충전해 둔 이지카드-편의점에서도 사용 가능한 교통카드-가 떠올랐다. 새 휴지를 사려고 편의점으로 달려갔는데 거기에 기사님이 계셨다. 셔츠가 평범한 스타일이라 긴가민가했는데 가슴에 국광버스 로고를 보고 급하게 번역기를 켰다. 휴식시간 10분이 이미 다 끝나가서 마음이 급했다. 기사님은 번역기 화면을 보시곤 끄덕이셨지만 그대로 서 계셨다. 커피를 기다리는 중이셨더라. 따뜻한 종이컵을 받아 들고 차로 같이 향해주셨다. 나는 빠른 손짓으로 가방에서 휴지를 찾아 화장실로 뛰었다. 남자화장실에 아무도 없길래 냅다 ‘오빠!!’를 외쳤더니 안쪽 칸 문이 스윽 열리더라. 그렇게 휴지를 넘겨주고 대참사를 막을 수 있었다. 급해서 일단 바지부터 내리고 봤다는데 뭔 말이야 정말.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찍어 보낸 기사님의 뒷모습
버스가 들렸던 휴게소, 이후 장거리 노선을 탈 때마다 휴게소가 은근히 기다려졌다.

한참을 달려 드디어 무릉농장이 보였다. 무릉농장에서 내릴 사람은 농장입구에서 내려 돈을 내고 다시 타야 하더라. 기사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알아듣지 못해 자리에 그냥 앉아있었다. 그러다 기사님이 다가와 산에 가는 것이냐고 물으셨다. 그렇다고 하자 그러면 내려서 입장료를 내야 한다고 설명해 주셨다. 우리는 농장 입구에 있는 자그마한 안내소에 230 NTD를 두 명분으로 냈다.


다시 탑승한 버스는 농장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와 우리를 내려주고는 되돌아 나갔다. 무릉농장 정류장에서 화장실도 들리고 채비도 단단히 한 후 들머리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무릉농장은 현지인에게도 인기 있는 관광지이다. 해발 2,000m 부근에 위치한 대규모 삼림 휴양지로 당일치기 여행으로도 많이들 오는 곳이다. 규모가 커서 농장 내에도 대부분 승용차를 타고 이동한다. 농장 안에 고즈넉한 찻집과 여러 뷰포인트들, 오래된 건물과 캠핑장까지 많은 시설이 있어서 차로 돌아다녀도 다 보는 데는 한참이 걸릴 듯싶었다. 때문에 농장 안에서 출발해도 들머리까지 거리가 꽤 되었다. 포장도로로 2시간을 걸어야 한다. 이미 알고 걷기 시작한 길이지만 이걸 다 걸어내야 겨우 등산을 시작할 수 있다니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산이 아닌 아스팔트 길에다 시간을 쓰는 게 아깝기도 했다. 우리는 수줍게 엄지를 뻗어 보았다.


블로그를 검색하다 히치하이킹으로 차를 얻어 타고 들어간 사람들의 글을 몇몇 보았기에 용기를 내보았다. 그가 먼저 수줍게 엄지를 들어 보였지만, 팔을 굽힌 채 가슴께에서 소심하게 들어 올린 엄지가 내 눈엔 그냥 따봉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마치 멋진 차라고 칭찬하는 사람처럼. 역시나 차들은 쌩하니 지나갔다. 나도 팔을 쭉 뻗어 불쌍한 표정까지 지어 보이며 힘을 보태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외길도 아니라 등산로 입구로 향하지 않는 차들은 우리를 태워주려야 태워줄 수도 없었다.

그러다 가까스로 차 한 대가 섰다. 아니 정확하게는 3대였다. 한 대가 길가에 정차한 채 우리의 행선지를 묻고 이것저것 확인 하시는 동안 뒤에 차 두 대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 대화가 길어졌다. 그럴수록 점점 뒤에 대기하고 있는 차들에 죄송해 안절부절못했다. 알고 보니 차 세 대가 모두 일행이었다. 조금 더 앞 공터에 주차한 뒤 그들은 자리를 옮겨 우리가 함께 탈 수 있도록 차 한 대를 비워주셨다. 몇 번씩 감사하다고 인사드리며 차에 올랐다. 손짓 발짓과 모자란 영어와 번역기를 동원해 이야기를 나누며 이동했다. 그런데 잘 달리던 차가 갈림길에서 엉뚱한 도로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가 구글맵으로 위치를 확인하며 불안해했다. 나는 그냥 다른 길이 있는 거겠거니 하고 기다렸는데 갑자기 주차장에 멈춰 서서 깜짝 놀랐다. 뒤 따라온 차 2대도 멈춰 섰다. 다 같이 주차장에 모여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의 행선지를 오해하신 거였다. 그가 우리의 행선지를 설명할 때 지도 어플까지 켜서 보여드렸었다는데 어디서 대화가 꼬였던 걸까? 첫 번째 도착하는 산장인 '치카 산장'을 이야기하고서야 다들 환하게 웃으며 그쪽이라면 안심이라고 차에 다시 올라타셨다.


다시 차를 타고 이동하며 이야기를 들어보니 처음에 행선지를 잘못 듣고 우리가 굉장히 위험한 코스로 간다고 오해를 하신 거였다. 그는 운전해 가는 내내 번역기를 써서 우리를 말리려고 애쓰셨다. 본인들도 산행을 포기하고 무릉농장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거라고, 산에는 눈도 쌓여있고 길도 찾기 힘들고 절벽구간도 있다고 강조를 하셨다. 나중에 우리가 1박 2일짜리 쉬운 일반적인 코스를 간다는 걸 깨달으시곤, 환종주를 하면(이런 코스가 있는지도 몰랐다.) 너무 위험해서 친구들이 우릴 말리라고 했다며, 캠핑장으로 우릴 초대하려고 하셨다고 했다. 어쩐지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즐거운 시간'을 보낼 거라고 자랑하셔서 얼마나 즐거울 예정이시기에 그러시나 싶었지 뭐야.


가까스로 일행분들의 허가를 얻어낸 우리는 다시 차에 오르고 편안해진 마음으로 이동했다. 가는 길에 서로 오해했던 것이 우습다고 이야기 나누었다. 그러다 운전대 앞에 놓여있던 나무 조각을 나에게 건네주시며 선물이라고 하셨다. 잭나이프로 직접 깎아 만든 나무 산이었다. 나는 드릴 게 없는데 차도 얻어 타고, 선물까지 받아 버리다니. 어떻게 보답할 수도 없는 처지의 우리는 감사함에 마음이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분께서는 환한 미소와 함께 말씀하셨다.


'나는 산을 좋아하고, 너희도 산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너희를 돕는 것이 좋다.'


설산의 등산로 입구 바로 옆에는 네모난 콘크리트 구조물에 물이 가득 받아져 있다. 원래는 농업용수 저장 용도라고 하는데, 잔잔한 수면에 무릉농장 관리센터 건물이 비쳐 보이는 모습이 아름다워 유명한 포토 스팟이다. 차를 태워주신 분께서는 이곳까지 우리를 따라오셨다. 이곳에서 사진을 많이들 찍는다고 알려주시며 우리 둘을 찍어주셨다. 지나가던 분께 부탁하여 셋이서도 사진을 찍었다. 우리 휴대폰으로 찍은 것이 아닌 데다 교환했던 라인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메시지 전송이 되지 않아 그 사진은 아쉽게도 받아볼 수 없었다. 우리는 서로의 안전을 빌며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고 등산로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