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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쾌재 Apr 01. 2022

아홉 살 아이의 너튜브

                           사진 = pixabay


 “아빠, 나도 너튜브에 채널 만들어 주세요. 구독, 좋아요, 받고 싶어요.” 느닷없이 아홉 살 아이가 내 손을 붙잡고 조른다. 동생이랑 노는 모습도 찍고, 종이접기 하는 것도 찍어서 영상을 올리고 싶다는 것이다. 다른 친구들이 그걸 보고 구독과 좋아요를 눌러주면 너무 좋을 것 같다며 말이다.


작년, 개인적인 작업을 위해 태블릿을 하나 구입했다. 태블릿으로 작업을 하다 짬이 나면 가끔 너튜브에 들어가 영상을 접했다. 평소 좋아하는 유럽 축구며, 내 집 마련에 대한 꿈을 위한 부동산, 코로나 이후로 옛 일이 되어버린 영화관을 대신한 영화 하이라이트 보기 등등. 태블릿을 구입하기 전 나는 너튜브와는 담을 쌓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새 너튜브에 속박된 일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내가 너튜브를 보고 있으면 첫째 아이가 옆으로 다가와 슬쩍 앉았다. 뭐 딱히 아이에게 해가 될 것이 없으니 함께 보게 했다. 조금 지나니 아이가 장난감이나 종이접기 같은 자신이 좋아하는 콘텐츠를 찾아서 보기 시작했다. 특히 장난감을 소개하고 그 장난감으로 다양한 놀이를 제공하는 콘텐츠는 내가 봐도 혹 할만 했다.


그런데 그 콘텐츠가 잊지 않고 강조하는 것이 있었으니 ‘여러분, 구독 좋아요 꾹꾹 눌러주세요.’ 라는 말이었다. 어찌나 맛깔난 목소리로 강조를 하는지, 나라도 눌러주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았다. 그것으로 구독자 수를 확보하여 경제적 수익을 창출하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된 건 조금 뒤의 일이었다.


어쨌든, 아홉 살 아이의 요구는 나에게는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수많은 너튜브 채널의 홍수 속에 아이까지 하나를 더해야 하나 싶었다. 유튜버들이 저마다의 콘텐츠를 제공하고, 꾸준히 내용을 올리는 것이 쉬워 보이지 않는데, 몇 번 하다가 말 것을 넙죽 장단을 맞출 필요는 없을 듯 싶었다. 하지만 아이는 제법 진지했다.


결국,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핸드폰을 들고 동생과 함께 장난감을 가지고 티격태격 노는 모습을 찍기 시작했다. 놀이를 마친 아이는 작별 인사를 던지고 ‘구독, 좋아요 꾹꾹 눌러주세요.’ 하는 말을 잊지 않았다. 영상을 찍긴 찍었는데 이걸 어떻게 너튜브에 올린다는 것인가. 이 때 컴퓨터에 능통한 아내가 나섰다.


아내는 아이의 놀잇거리가 하나 더 생긴 것이라며 기꺼이 채널을 개설해 주겠다고 나섰다. 핸드폰에 있는 영상을 PC로 옮겨 편집을 하고, 음악까지 넣었다. 너튜브에 접속해 계정을 만들어 채널을 개설하고 영상을 업로드 했다. 한번으로 끝내지 않고 영상을 계속해서 올리려면 채널 이름도 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아이와 함께 이것저것 이름을 이야기 해 보더니 ‘밤송이 ○○○’를 제안했다. 아이의 머리 모양이 밤송이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아이도 맘에 든다며 물개박수를 쳤다. 그렇게 해서 ‘밤송이 ○○○’ 라는 너튜브 채널이 개설 된 것이다.


한두 번으로 끝날 것 같던 아이의 영상 업로드는 의외로 계속됐다. 놀이를 진행하는 것은 아이들의 몫, 영상을 찍는 것은 나의 몫, 편집과 업로드는 아내의 몫이었다. 한편의 영상을 위해 들이는 시간과 품은 만만치가 않았다. 나는 이것이 마뜩치가 않았다. 하지만 업로드 한 영상의 구독자 수와 좋아요의 숫자가 올라갈 때 마다 아이의 동기 부여는 높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고향에 계신 어머니와 통화를 하는데 “애기들 노는 모습 영상으로 잘 보고 있다. 어찌나 둘이서 재밌게 노는지 이뻐 죽것다.” 라고 하시는 것이다. 나는 어리둥절해 “무슨 영상이요? 제가 지난번에 보내 드린거요?” 하고 되물었다. “아니, 니 처가 무슨 주소 하나를 보내서 눌러 보니까 애기들 노는 모습이 나오드라.”


알고 보니 아내가 너튜브 주소를 양가 부모님께 보내고 아이들 노는 모습이 담겨 있으니 언제든 보고 싶을 때 보시라고 한 것이다. 순간 왜 진작 이 생각을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들었다. 코로나로 명절에도 고향에 못 내려간 것이 2년째, 손주들 보고 싶어 하는 부모님의 마음이 늘 안타깝게만 느껴졌지 마땅한 해법을 찾지는 못했다.


영상을 찍어 보내려고 하면 용량이 너무 커서 보내지 못하거나 짧은 것이 전부였다. 단순 영상 통화로 오래 동안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드리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주소 하나면 손가락으로 눌러 바로 영상을 확인 할 수 있고, 올릴 수 있는 영상의 길이도 양도 얼마든지 늘릴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소통의 최적의 방법이 아니고 무엇이랴.


너튜브 채널이 그리움의 간극을 메꿔주고 있었던 것이다. 코로나로 단절된 가족 간의 단절을 다시 이어주는 아주 유용한 도구였다.


그렇다. 쓰임의 영역은 사람들 각각의 목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누군가는 나의 취미생활을 위해, 누군가는 나의 공부를 위해, 누군가는 나의 즐거움을 위해, 누군가는 멀리 있는 이들과의 소통을 위해... 나는 멀리 있는 부모님의 그리움을 채워 드리기 위해 오늘도 아홉 살 아이의 너튜브에 올릴 영상을 웃으며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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