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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센세 Jun 26. 2023

플레이리스트 속 박태기나무와 명자나무

Just the two of us

You and I

< Just the two of us– Cyrille Aimée & Diego Figueiredo>


 가사는 끝났지만 Diego Figueiredo의 말랑하고 기분 좋은 어쿠스틱 기타 소리는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 머지않아 Cyrille Aimée의 목소리가 스캣으로 다시 시작된다. 목소리가 악기가 되고, 악기가 목소리가 되어 아름답게 뒤섞인다. 몸은 비록 회색빛 판교에서 창백한 모니터 빛을 받고 있지만, 이어폰을 통해서 귓속을 가득 채우는 노래는 비눗방울처럼 나를 폭하고 감싸 안아 다른 곳으로 두둥실 안내한다. 이곳은 위로는 분홍색 벚꽃이 가득하고, 아래로는 초록빛 풀밭이 폭신한, 날렵한 직박구리가 지저귀며 날아가는 사이로 둥글고 미끈한 오래된 고분이 산처럼 보이는, 이곳은 3월의 끄트머리 경주다.


 신경주역에 내리자마자 오래전 여행의 추억보다 남쪽이라고 생각 못 할 서늘한 공기가 먼저 느껴졌다. 조금 쌀쌀할 수 있으니 챙겨 입고 오라는 전날 밤 따뜻한 조언을 떠올리고 있는 사이, 저 멀리 주차장 쪽에서 웃으며 다가오는 반가운 얼굴이 보인다. 친구들과 만든 전시를 찾아줘서 오랜만에 다시 만난 H를 또다시 만나러 경주로 향한 건 벚꽃이 기습적으로 팝콘처럼 터져 나오던 3월 말이었다.


 H의 안내로 수많은 벚꽃길을 지나고 지나 도착한 첫 경주 여행의 시작은 숲이었다. 가득한 나무 사이로 더 가득한 새소리를 들으며 한적한 길을 걸었다. 경북 천년 숲 정원과 그 맞은편 산림환경연구원에는 나무 하나, 풀 한 포기마다 이름이 정성스럽게 적혀있었다. 미처 모르고 지냈던 식물 하나하나의 이름을 찾아 읽었다. 박태기나무와 명자나무는 왠지 사람 이름을 닮았다며 웃으면서. 흙길은 걸어도 또 걷고 싶은 푹신함으로 이어졌다. 수직으로 뻗어 올라간 대나무와 수평으로 흐드러진 벚꽃과 목련, 구름 낀 하늘 사이로 때때로 나와주던 햇빛도 찾았다. 풀냄새, 흙냄새, 낙엽 냄새도. 그리고 그사이 꽃향기까지.


 다음에는 내가 H를 찻집으로 안내했다. 수년 전 영화 <경주>를 보고 훌쩍 경주로 여행을 떠났을 때, 영화 속 찻집을 찾아다녔던 기억을 끄집어내서. 비록 그때의 ‘아리솔’은 사라졌지만, 바로 옆 ‘능포다원’은 그대로였다. 능포다원 역시 오래된 외할머니집을 떠올리게 하는 오래된 한옥이었다. 한참을 걷고 돌아와 사장님이 직접 만드신 도라지 황차와 슴슴한 빵을 먹고 있으니, 정말 할머니 댁에 놀러 온 손주가 된 기분이다. 시간이 멈춘 듯한 장소 때문인지, 친구가 들려주는 명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 덕분인 건지 시간은 흐르는지 마는지 알 수 없고. 또 그 알 수 없음이 좋았다. 몸에 대한 전시에서 다시 만나, 이제 여기서 마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미처 알 수 없었던 지금까지도.


 경주에 있는 이틀 동안 이곳저곳에서 오래 걷고 그 풍경을 나눴다. 삶이 엿보이는 경주의 골목, 거대한 나무가 드리워진 경주읍성, 가로등 빛을 받아 하얗게 불타는 벚꽃이 거울처럼 비치던 밤의 형산강, 둥그스름하게 이어지는 거대한 능 사이로 사라지던 사람들. 또 이곳저곳에서 맛있는 걸 먹고 이야기를 나눴다. 창밖으로 경주읍성이 내려다보며 먹었던 초밥과 거대한 능을 병풍 삼아 마셨던 맥주, 그리고 따끈한 장어탕이 나오던 오래된 백반집, 빵을 두 번이나 가져다 먹었던 카페. 그런 산책과 이야기 틈 사이로 H의 차 안에서는 따뜻한 H를 닮은 플레이리스트가 흘러나왔다. 떠나기 전 붉게 타오르던 노을과 그 아래 흰 선처럼 흘러가는 하얗고 발그레한 벚꽃들. 기차 시간 늦어서 뛰어 올라간 신경주역의 높다란 승강장. 그리고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기차 차장 너머로 손을 흔들어 주던 H의 모습까지 노래 속에 스며들고 있었다. 봄의 모습 그대로.


 여행에서 돌아와 다시 시작된 일상에서 경주의 시간이 곧 그리워졌다. 그럴 때면 H에게 부탁해서 공유받은 그 플레이리스트를 톡 하고 두드린다. 눈 돌리면 피할 수 있는 시각과 달리 막을 수 없는 감각이다. H가 구성한 플레이리스트 속에서 나를 온전히 떠맡긴다. 그 속에서 ‘뭘 듣는지 보면 그 사람에 대해 알게 돼’라는 영화 <비긴 어게인> 속 대사처럼 H를 만나기도 하고, 300여 킬로미터라는 공간과 과거라는 시간을 넘어 경주를 바로 이곳에 불러내기도 한다. 이미지나 언어 그 너머의 감각으로. 플레이리스트에 모두 다 담겨있다. 차가운 실험실에서 잠시 뻑뻑해진 눈을 깜빡이고, 굳은 어깨를 한번 쭉 펴보고, 플레이리스트의 다음 곡을 열어본다. 마음에서 시작된 따끈따끈함이 조금씩 몸으로 퍼진다. 봄처럼.


Every time

You bring me

Life

<Nidra(Feat. Zapi) – Supida>


https://soundcloud.com/maitrij/nidra-feat-zapi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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