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너머의 FT아일랜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여기 있다> (2012)
0. 예수는 T일까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라는 사람이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봤는데요. 어쩌면 예수가 T성향을 가지고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흥미로운 지점이 여럿 있는 작품이니 천천히 짚어보면서 예수와 T의 상관성을 찾아봅시다.
1. 대안 예술
마리나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펼쳐지는 전시를 준비하는 중입니다. 그는 행위예술을 통해서 굵직한 경력을 쌓아온 연륜 있는 예술가입니다. 그럼에도 기나긴 경력의 여정에서 자신은 단 한 번도 대안적인 위치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회고합니다. 대안이 아닌 장소에서 열리는 이 전시의 결과에 따라서 더 이상 대안에 머무르지 않아도 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어깨는 이름 이상의 무게로 짓눌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2. 모두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마리나는 수상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예술가가 지향해야 할 길을 이야기합니다. 그가 여러 번 반복한 말은 '예술가와 연애하지 말 것'입니다. 마리나의 초창기 경력은 올라이와 함께 걸어간 순간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서로의 외도와 혼외임신으로 결딴난 관계이지만, 말 그대로 영혼의 파트너였다고 마리나는 말합니다. 대중을 향한 도발의 연속이었던 여정을 자신과 같이 거침없이 스스로를 내던지는 사람과 함께 한 것은 큰 행운일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던 시절 울라이와 함께 기거한 승합차를 다시 마주한 마리나는 몇 마디 말에 담기지 않는 감정을 표정으로 보여줍니다. 아마 그 감정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 서로 용서하는 단계가 필요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마리나는 많은 사람과 교류하며 자신의 범주를 확장시키려 합니다. 그 격류에서 자신을 상실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인물이 클라우스입니다. 그는 마리나를 인격체보다는 예술 작품에 가깝게 대우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다소 경직되어 보입니다. 흔들리는 것과 흔드는 것 중 어디를 걱정하는 것인지는 분명하게 분간되지 않습니다. 그는 마리나를 모두를 유혹하는 사람으로 평가합니다. 어쩌면 매혹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 보입니다. 이는 부정한 의도를 가지는 차원의 문제가 아닌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능력이 그러해서,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에게 손가락질하는 것은 니체가 말한 노예도덕의 사고방식이 아니었던가요? 연약한 나귀에 불과한 클라우스는 마리나와의 결혼 생활을 정리하고 일적인 관계만을 남겨두었습니다. 그러나 이 압도적인 힘은 계속 주변을 맴돌고 싶게 만들고, 몰려든 날벌레들을 모조리 집어삼키고 말 것처럼 보입니다.
울라이는 다시 마리나의 선택을 받길 원하고, 클라우스는 얕은 교류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글쎄요. 그는 애초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 적합한 인물이 아닌 듯 보입니다. 그는 관객에게 메세지를 던지는 일을 하는 사람이고, 클라우스의 말처럼 그의 삶 전반은 이미 예술 작품에 가까운 것이 되어버린 듯 합니다. 불특정 다수에게 닿는 메세지가 한 명만을 위해서 가공될 수 있을까요?
3.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여기 있다.
전시는 마리나의 주요 작품을 재현하는 형태로 진행됩니다. 101번째의 마리나가 없는 탓에 그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나머지 작품의 재현을 부탁합니다. 이제 마리나에게 남은 것은 의자에 앉아서 마주 앉은 관객을 응시하는 작품뿐입니다. 그는 전시가 진행되는 한 달 여의 기간 동안 미술관 개장부터 폐장까지 의자에 앉아 마주 볼 사람을 기다립니다. 새로운 관객이 자신 앞에 앉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가 내립니다. 고개를 든 그의 얼굴에서 무언가 덜어낸 듯한 공허함이 느껴집니다. 그 허공에서 관객은 무언가 발견한 듯 울음을 터트리거나, 웃음을 짓거나, 지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매섭게 응시합니다.
쌓여가는 육체의 피로와 비례해서 전시의 열기가 더해집니다. 마리나를 직접 응시하는 사람과 그 광경을 지켜보기 위해 모인 사람이 거대한 덩어리를 이루어 그의 앉음과 일어남을 목격하려 합니다. 전날부터 기다리던 관객들이 개장과 동시에 마리나에게 달려가는 광경은 다소 위협적이기까지 합니다. 그가 비어갈수록 그에게 밀려드는 파도는 더욱 거대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신의 특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 아닐까요? 어쩌면 신은 인간이 호들갑을 떨 동안 가만히 있어줄 대상에 불과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4.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예수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는 단지 행위 예술을 주류 예술의 범주에 포함시키기 위해서 행동하고 있을 뿐이니까요.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그 여정에서 의도하지 않는 것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강인한 사람입니다. 젊은 예술가들에게 각오를 요구하면서 한 말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큰 힘이 드는 일입니다. 그것을 오랜 시간 해냈다는 것이 그의 힘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힘을 가지고 인간 너머의 공간을 엿보고 있는 듯합니다. 그곳에는 F와 T의 섬이 있을까요? 신은 울라이의 손을 붙잡았던 것처럼 관계가 남긴 흔적에 이리저리 흔들릴까요? 아니면 신은 모두를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클라우스의 질투 따위는 가볍게 무시해야 할까요? 확실한 것은 예수가 인간이 아니라면 인간의 성격 유형 검사로는 그를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라고 하지 않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