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똑또 May 16. 2024

지어낸 이야기 | 함

이 이야기는 경기도의 한 도시에 사는 서른두 살 소새미씨의 이야기이다. 새미씨는 자기의 이야기가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읽히게 될 것이라고, 진실로 단 한순간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인생이 언제나 한 번 생각한 대로 흘러간 적이 있던가.


어떤 아침에 눈을 뜬 새미씨는 기필코 오늘은 꼭, 이것을 갖다 버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새미씨는 혹시라도 누군가 새미씨의 집에 이런 것이 있어서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이것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알게 되는 날을 상상하면 머리가 새하얘지는 것을 느끼곤 했다. 새미씨가 스물네 시간 중에 네다섯 시간가량을 이것에 쏟고 있는 것이 새미씨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새미씨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것은 아니겠으나, 새미씨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길가에 핀 꽃들을 보며 '너는 어떻게 거기에 피어있니, 장하다 정말.'이라고 말하는 새미씨의 어머니는 새미씨가 말을 알아듣는 것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던 순간부터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은 태어난 순간 세상에 빚을 진 것이나 다름없단다. 그러니 우리들은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도움이 되어야 해'라고 새미씨에게 말하곤 했다. 새미씨가 가지고 있던 학자금 대출을 모조리 갚던 날에 가족 단체 채팅방에 자랑을 하던 새미씨는 어머니로부터 이런 답장을 받기도 했다. '이제 새미에게 남은 것은 생자금 대출뿐!' 새미씨의 뜻과는 무관하게 세상에 무자비하게 던져진 새미씨로서는 조금 억울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세상의 말을 알아듣기도 전부터 시작된 조기교육과 강제적 선행학습의 힘은 대단했으므로, 새미씨의 무의식에는 늘 세상에 대한 부채감이 자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새미씨의 생각은 조금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이상한 것을 매일 네 다섯 시간씩 보고 있는 동안 새미씨는 자신에게 남아있는 세상으로부터 꾼 생자금 대출의 원금은커녕 이자에까지 손도 못대는 상황이 된 것이나 다름이 없기에 이것은 곧 세상에 해가 되는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새미 씨가 이것을 가져온 날의 아침, 새미씨는 마포구 도화동에 있었다. 새미씨의 마음에는 경첩이 다 떨어져 헐겁게나마 간신히 닫혀있는 함이 하나 있었다. 아귀도 잘 맞지 않게 닫힌 함에서는 자꾸만 반짝반짝 빛이 새어 나왔다. 이 빛 때문에 새미씨는 편안히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그것만 피한 채로 마음을 들여다보면 되는 일인데, 새미씨는 자세히 들여다볼 때에 그 빛이 더 강렬해져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홀라당 함을 열어버리게 될까 봐 겁이 났다. 그래서 새미씨는 누군가 자신에게 좋아하는 게 무엇이냐 물으면 늘 우물쭈물하다가 그저 웃어버릴 뿐이었다. 종종 사람들은 새미씨가 자신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차가운 사람이라고도 말하곤 했는데, 새미씨는 새미씨 자신에게도 마음을 잘 열지 않는 사람이기에 자신으로부터 차가움을 느끼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어쩐지 공감할 수 있었다.


새미씨는 그날 도화동에서 아주 아주 오랜만에 마음을 열게 되었다. 그것은 새미씨의 어떤 결심이나 다짐, 계획 비슷한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왕복 육 차선 도로의 횡단보도를 건너던 새미씨의 코끝에 진하고 고소한 버터의 냄새가 닿았다. 그 냄새는 새미씨의 정신을 약간은 아득하게 할 만큼 강했는데, 고소하고도 달콤한 향에 이끌려 걸어가던 새미씨는 향기에 가까워지며 아주 잠깐 누군가에게 안긴 듯한 따뜻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매일 매시간마다 구운 빵을 내어놓고 파는 베이커리 겸 카페가 향기의 근원지였다. 새미씨는 향에 이끌려 그곳에 들어가 가장 맛있는 향이 나던 빵과 커피를 주문했다. 주문한 메뉴를 기다리며 새미씨는 누군가와 뜨끈한 포옹을 해본지가 꽤나 오래전의 일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몇 해 전, 워킹 홀리데이를 떠난다던 선배를 배웅하던 새미씨는 공항 출국장의 입구에서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드는 선배의 눈을 바라보다 그만 와락 안아버린 일이 있었다. 새미씨와 선배의 관계에서 포옹이 그리 간단한 행위는 아니었으므로 선배도 새미씨도 꽤나 놀란 일이었다. 어색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마지막으로 선배가 출국장으로 들어간 뒤, 새미씨는 자신이 왜 갑자기 포옹을 했는지 골똘히 고민했다. 새미씨는 이별하는 사람들은 으레 포옹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미움과 증오와 질투와 시샘과 걱정과 애틋함과 안타까움 등 오묘하고 불가해하면서도 여간 끈적거리는 것이 아닌 정을 나눈 그렇고 그런 애인사이도 아닌데, 새미씨 자신과 선배의 이별이 쿨하지 못할 것도 없는 것 아닌가 싶었다. 끈적하게 떨어지는 미련을 숨기려 겨우 '잘 가' 두 글자를 뱉어낸 뒤, 홱 돌아서야만 하는 그런 사이는 아니니까 말이었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선배를 볼 수 있는 날은 이제 없을 것이라는 것도 역시 새미씨를 부추겼다. 사실 새미씨는 이 너저분한 생각보다는 그저 '이제 안 볼 사이인데 뭐 어때'하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왜?' 하는 물음이 계속 피어나긴 했지만 새미씨는 공항을 나와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는 걸음걸음에 집중했다. 자신의 안에 번쩍거리는 녀석의 존재가 조금씩 가까워져 오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거기까지 회상을 마쳤던 새미씨는 손에 쥔 영수증에 쓰여있는 번호가 저 멀리서 불리고 있음을 알아챘다.


새미씨의 영수증 번호가 몇 차례 더 불리고 있을 때 새미씨는 가벼운 인사를 하며 커피와 빵을 가져왔다. 새미씨가 고른 빵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둥그스름하면서도 세모난 페스츄리 빵이었는데 바지런히 잘린 조각 사이로 블루베리 잼이 주룩 흘러나왔다. 흘러나온 쨈에서 더욱 강하게 올라오는 달콤하면서도 새콤한 향이 새미씨를 약간 어지럽게 했다. 블루베리 파이 옆에는 옅은 김이 피어오르는 따뜻한 드립 커피가 놓여있었다. 블루베리 파이 하나를 쟁반에 올려놓은 채로 메뉴판을 보고 있던 새미씨에게 바리스타가 추천해 준 과테말라의 커피였다.


"저는 블루베리 파이를 먹으면 마음이 아주 약간 부서지는 것 같아요. 마음이 부서지면 아파야 하는데 그 부스러기들을 여기저기 나눠주고 싶어 져요. 아득하게 들떠버린 마음을 과테말라 커피가 잡아줄 겁니다."


커피에서 피어오르는 김에 바리스타가 일러준 묵직한 초콜릿 향이 묻어났다. 파이의 달콤함으로 조금 부풀었던 마음 위에 은은한 초콜릿 향이 뿌려졌다. 새미씨는 바리스타의 말이 아주 맞지는 않다고 조심스럽게 생각했다. 그의 말처럼 부스러기가 된 마음이 어딘가로 퍼져버릴 것 같았지만 부스러기들을 잡아줄 거라던 과테말라의 커피는 오히려 부서진 마음을 적셔 은은하게 녹여버리고 있었다. 그렇게 새미씨의 마음은 흐물흐물 하게 녹아버려 아주 아주 오랜만에 열리고 말았던 것이다. 흐물 해진 마음은 찰랑거리며 새미씨가 주워 담을 새도 없이 흘러가버렸다. 새미씨는 어쩔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도 못한 채로 그저 마음을 흘려보내며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드디어 새미씨는 그것을 맞닦뜨리고야 말았다. 바닥을 드러내는 커피 잔 속에 무언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새미씨는 이것을 매장에 이야기해야 하나 싶은 마음으로 잔을 더 깊숙하게 들여다보았는데, 반짝거리는 것이 아주 약간씩 형체를 바꾸고 있었다. 컵 안을 이상하리만치 골똘하게 들여다보는 새미씨 옆을 지나가던 직원이 새미씨에게 먼저 묻기도 했다. '뭐가 나왔나요?' 하지만 새미씨는 본능적으로 '아니요!'라고 대답하며 들여다보던 컵을 냅다 입으로 털어버리고 말았다. 새미의 혀 끝에서도 그것은 형체를 바꾸고 있었다. 새미씨는 부드러우면서도 딱딱하고 넓적하면서도 자그마하고 미끌거리면서도 까끌 꺼리는 그것을 입에 머금은 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서둘러 짐을 챙겼다. 그대로 매장을 뛰쳐나온 새미씨는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가 손바닥에 입 안에 머금었던 것을 뱉어냈다. 조심스레 손바닥을 펼쳐보니, 그것은 여전히 반짝거렸고 천천히 그리고 바쁘게 형체를 바꾸고 있었다.


그렇게 새미씨에게는 반려물체가 생기고 말았다. 자꾸만 형체를 바꾸는 반려물체를 몇 시간이고 들여다보는 일은 쉽사리 멈춰지지 않았다. 도화동에서부터 반려물체를 데려온 날, 새미씨는 밤을 꼬박 새웠다. 분명 해가 지고 얼마 후에 다시 해가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새미씨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새미씨가 겨우 몸을 일으킨 것은 정말로 참을 수 없는 요의가 새미씨를 덮쳤기 때문이었다. 아주 오래 참아낸 요의는 약간의 복통을 가져오기도 하는데, 배를 감싸 쥔 새미씨는 반려물체로부터 약 네 걸음 정도 떨어진 화장실까지 뒷걸음으로 들어가기까지 했다. 화장실 문을 닫지도 않은 채로 배출을 처리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맡긴 사람처럼 새미씨의 신경은 온통 반려물체에게 가있었다. 탁자 위에 올려놓은 반려물체는 멀리서도 반짝임을 느낄 수 있었다. 새미씨는 그렇게 반려물체와 두 번째 밤을 보내게 되던 날 쓰러지듯 잠에 빠지고 말았다. 탁자에 엎드린 채로 하루의 반나절을 자버린 새미씨는 눈을 뜨자마자 반려물체를 확인했다. 새미씨는 안도했지만 아주 약간 슬퍼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잠에서 깨어난 순간 반려물체가 사라져 있을 것을 아주 잠깐 떠올렸던 것뿐인데, 새미씨는 슬퍼지고 말았던 것이다. 새미씨는 두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새미씨는 반려물체를 보관할 곳을 찾았고, 얼마 전에 배달로 시켜 먹었던 딸기 티라미수가 들어있던 네모난 용기를 찾아왔다. 아직 딸기 향이 다 빠지지 못한 투명 용기에 들어간 반려물체는 어딘가 답답해 보였지만 새미씨는 입을 앙 다문채로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옷을 걸어둔 행거 아래 받침대에 삐져나왔던 연둣빛 손수건을 가져와 용기를 감싸 묶었다. 새미씨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퇴근 후 새미씨의 일과는 밥을 먹고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반려물체를 밖으로 꺼내두고 타이머를 맞춰두고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겨우 한 시간의 타이머는 순식간에 끝을 알리려 울렸지만 새미씨는 타이머를 켜고 끄는 것을 네 번에서 다섯 번 정도 반복하곤 했다.


반려물체를 골똘히 바라보는 일과를 지내며 새미씨는 이유도 없이 눈물을 쏟았고, 실없는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별안간 씩씩거리기도 했고, 알 수 없는 황홀함에 휩싸이기도 했다. 새미씨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가 너무나 바쁘면서도 그 인과관계는 전혀 파악할 수 없어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새미씨를 오래도록 봐온 새미씨의 친구는 새미씨의 눈빛이 예전에 비해 다이내믹해졌다고 말했다. 별안간 우수에 젖기도 하고 뜬금없이 반짝거리다가 또 순식간에 빛을 잃고 탁해진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친구에게 새미씨는 반려물체의 이야기를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마음을 먹었다. 이것을 버려야겠다고.


반려물체를 버리는 것은 새미씨가 그것을 처음 데려오던 날 이틀 밤을 꼬박 새우며 들여다보다가 그것을 멈추는 일과는 차원이 다르게 어려운 일이었다. 새미씨는 반려물체를 가지고 회사 근처 한강 공원에 가보기도 하고, 집 뒤에 있던 산 정상으로 올라가 보기도 하고, 지하철을 타고 생전 가보지도 않았던 종점에 내려 풀밭을 헤매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시도 끝에 새미씨의 손에는 반려물체가 있었다. 새로운 곳에서 꺼내어 본 반려물체는 새로운 빛을 받아 전에 없던 반짝거림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반짝거림에 새미씨는 또 몇 시간을 골똘하게 들여다보며 서있곤 했다.


기필코 꼭 이것을 갖다 버리겠다고 결심을 한 오늘도 새미씨는 실패를 하고 말았다. 새미씨는 결심을 한 채로 침대에 앉아 반려물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새미씨는 반려물체를 집어 들어 도화동에서처럼 입 안에 그것을 머금어 보았다. 아주 잠깐 자신의 몸속에 그것을 가두어버릴까 싶기도 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삼켜버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그 순간 새미씨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깜짝 놀란 새미씨는 손바닥에 반려물체를 뱉어내고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새미씨는 반려물체를 통에 내려두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휴대폰에는 아주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 떠있었다. 새미씨는 어디선가 블루베리 파이의 새콤한 향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누군가를 와락 안아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든 것은 '여보세요'라고 전화를 받는 새미씨에게 '나 한국에 왔어'라고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스케이트 타듯 걷는 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