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의 조건

엄마의 애정의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by 김미정

“ 아, 엄마의 일기장이구나!”

어렸을 때 엄마의 일기장을 읽고 놀란 적이 있다. 엄마 몰래 자꾸만 읽어보았다.

대가족 속에서 늘 분주하게 살았던 엄마! 9남매 맏며느리!

고단하고 버거운 삶, 외로움, 서러움!

아빠의 무심함에 대하여 줄줄이 써내려가다가도 자식들을 향한 희망의 메시지를 스스로에게 보내곤 했다.

간혹 한바탕씩 울었는지 눈물로 얼룩진 자국도 있었다.

그렇게 분주하게 살면서도 외로울 수가 있다는 것을 나는 어린 나이에 알았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사직동의 작은 한옥에서는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들, 고모, 그리고 아저씨, 언니라고 불렀던 친척 분들이 함께 살았다. 마치 공동주택 같았다

벽장에서 지푸라기에 쌓인 달걀 꾸러미의 달걀 한 개씩을 살그머니 꺼내서 몰래 후라이 해주곤 했던 엄마!

앞치마를 입고 작은 마당을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는 엄마! 출근하는 고모의 구두를 빛나게 닦아주던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1975년 여름 날 오후, 열정적으로 일하시던 아버지는 48세에 한마디 말씀도 없이 가족 곁을 떠나셨다.

한 달 사이에 엄마는 8kg이 빠졌다. 엄마는 44세, 나는 고3, 동생들은 고2, 초등6, 막내가 유치원생이었다.


그 후 엄마의 일기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채워져 갔다. 지난 추억과 남편에 대한 고마움, 미처 인정해주지 못했던 것들을 미안하다며 써내려갔다. 때론 일찍 떠난 남편에 대한 원망과 외로움, 앞으로 삶에 대한 두려움, 그러면서도 4남매를 잘 키워보겠다는 다짐과 약속을 했다. 마치 아버지가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좋은 소식은 알리고, 속상한 일은 넉두리 하듯이.... 때론 노래가사와 시를, 때론 스스로에게 독백하듯 하염없이 써내려갔다. 엄마 모르게 엄마의 일기장을 읽으며 어지간히도 울었다. 큰 딸년인데도 엄마가 쑥스러워 할까봐 더 많이 안아드리지 못 한 것이 세월 갈수록 죄송하다.


국문학도였던 엄마는 초등학교 선생님을 할 때 당신보다 나이 많은 학생들을 씻겨가면서 가르쳤다고 했다.

어버이날에 옛날 제자들과 눈물겹게 통화하시곤 했다.

아버지가 떠나신 후 추도식이 있을 때마다 문 닫고 조용히 기도문을 직접 쓰셨다. 자식들 한 명 한 명씩 이름을 부르고 잘 된 자식들은 기뻐해 달라고, 힘겨운 자식들에게는 힘을 실어달라고 애원하듯 기도했다. 남편에게, 하나님께.... 기도가 길어져서 오신 분들에게 폐가 될까봐 큰 딸 년인 나는 눈치가 보였고 속이 탔다.


두 딸년이 엄마의 묵은 살림을 정리했다. 오래된 농안에서 1975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양복이 나왔다.

“이런 걸 아직까지 다 짊어지고 사니까 이렇게 살림이 많잖아!” 하면서 큰 딸년은 까칠하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한 마디 했다. 엄마는 어리둥절해 하면서 양복을 만지고 또 만졌다.

엄마한테 그 양복은 무슨 의미였을까?


이것도 버려 저것도 버려 하면서 다 버리고 옷 몇 벌, 책 몇 권, 일기장, 성경책, 노래책만 남았다. 그것만 가지고 요양원에 들어 가셨다. 참으로 허무했다. 그 많던 살림이 결국은 작은 가방 하나로 정리가 되었다.

요양원에서도 힘없는 손으로 글쓰기를 계속하셨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까지도 책 보고 글 쓰며, 마지막까지 혼자 익힌 노래가 최 진희의 ‘애정의 조건’이었다. 엄마와 나는 서로 “내 노래야!” 라고 했다.

엄마한테 ‘애정의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때로는 그리운 마음에 쓸쓸히 눈물짓지만

때로는 추억에 젖어 쓸쓸히 웃음 짓지만

사랑은 너무 아파요 사랑은 너무 미워요

내 작은 몸짓으로 어쩔 수 없는 사랑 사랑 사랑의 조건은~”


마지막까지 머리맡에 두신 파란색 헝겊 필통이 떠오른다.

늘 가지고 다니시던 파란 필통, 배경은 엄마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