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대신교(수필)

거부할 수 없는 열역학 제2법칙

by 묘길 조길상

걱정대신교 - 거부할 수 없는 열역학 제2 법칙

나는 걱정거리가 있다. 부모님의 건강을 중심으로 한 가족에 대한 이러저러 한 걱정이 있고, 기타 여러 가지 자잘한 걱정거리가 있다. 이러한 걱정은 생물로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이 가진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나의 걱정은 주로 미래와 관련이 된다. 생물의 노화는 자연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기력이 떨어지는 아버님, 어머님...... 사십대가 되면서 깜빡깜빡 하는 마누라. 그리고 내가 떠난 후 혼자 남게 될 딸 등등.

이러한 나의 걱정은 물리에서 말하는 열역학 제 2 법칙과 관련이 된다. 열역학 제 2 법칙을 무시하고,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려고 하니 힘이 든다. 아마도 엔트로피는 시간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닐까? 나의 무질서도는 점점 높아지고 그리하여 나의 시간을 엔트로피가 다 먹어버리면 나는 해체될 것이다. 그런데 나의 해체 속도를 줄일 수는 없을까? 엔트로피의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서는 엔트로피의 먹이를 줄이면 될 것이다. 엔트로피의 먹이는 시간이므로 시간을 주지 않으면 해체 속도가 줄어들 것이다. 엔트로피에게 시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나의 시간을 내가 감시하고 항상 깨어 있으면 오래 사는 것이 아닐까? 스물네 시간을 깨어 있을 수는 없을까?

그런데 깨어 있는 것은 어떤 것일까? 얼마 전 요가 선생님을 만났다. 그리고 10일 동안 함께 공부를 하면서 두 가지를 깨달았다. 깨어 있는 것이 어떤 것인가? 그리고 사람의 심리작동구조는 어떠한가? 등을 조금 더 정밀하게 알게 되었다.

‘깨어 있는 것’은 느낌과 관련이 되는데 느낌은 언어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성모 선생님은 다리가 아프다고 말을 하는데 나는 성모 선생님의 말을 듣고 그 아픈 느낌을 느낄 수가 없다. 나는 내가 아팠던 느낌을 떠올려 성모 선생님의 아픈 느낌과 비교하여 이해를 하려고 할 따름이다.

이해는 설명이 가능하지만 느낌은 설명이 어렵다. 느낌을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지금 ‘파도가 치고 온갖 새들이 지저귀고 있는데’ 이 느낌을 언어로 표현하려고 하면 기가 찬다. 이런 점에서 시인들은 기가 차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시인은 이런 점에서 참 훌륭한 사람들이다.


‘깨어 있는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가 차는 일이다. 그래서 신은 느낌으로 신의 뜻을 드러낸다. 신의 언어는 ‘느낌’인 것이다.(나의 요가 선생님 말씀) 그런데 사람은 말로 뜻을 전달할 수밖에 없다. 말로 말을 넘어서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말을 아니 할 수는 없다.

‘깨어 있는 느낌’은 ‘자기를 바라보는 느낌’이고 ‘자기를 바라보는 느낌’은 ‘관찰하는 느낌’이다. ‘관찰하는 느낌’은 ‘자기의 뜻으로 존재하는 느낌’이고 ‘자기의 뜻으로 존재하는 느낌’은 ‘자유로운 느낌’이다. 그리고 ‘자유로운 느낌’은 ‘평화로운 느낌’이다. 그리하여 평화와 존재가 하나가 되어.

심리작동구조를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간략하게 설명하면, 외부의 자극이 마음에 저장되고, 마음에 저장된 기억이 다른 기억과 결합하고 분리를 하면서 확대 재생산되는 구조가 아닐까? 걱정거리가 있으면 여러 가지 기억들이 결합되고, 분리되고 이런 과정을 거쳐 과장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마음이 복잡해지고, 피곤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마음의 움직임이 이러하므로 문학에서는 과장하는 말하기를 하고 또 풍자하는 말하기를 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과장과 풍자를 하면 복잡한 마음이 평온해지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문학을 하는 것이 아닐까? 일상에서도, 걱정거리가 있을 때 나의 걱정거리보다 더 큰, 혹은 더 나쁜 걱정거리를 생각하면 나의 걱정거리가 사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이러한 걱정거리를 과대 포장하여 팔아먹는 상품으로 보험이 있다. 보험은 사람의 걱정거리를 과장하여 이미지로 보여주고 환기시킨다. 미래에 일어날 지도 모를 사고, 미래에 일어날 지도 모를 질병을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큰일이 난다며 시청자를 협박한다.

‘당신은 미래의 어떤 날에 암에 걸려 죽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남아 있는 가족을 위해서 지금 보험에 가입을 해야 한다.’

돈을 주고 물건을 사는 것은 그 물건을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보험은 돈을 주고 산 후에 사용을 하는 것이 괴로운 상품이다. 내가 암에 걸려야 보험금을 탈 수 있고, 내가 죽어야 가족을 위해서 보험금이 지급이 된다. 그런데 나는 암에 걸리기도 싫고 죽기도 싫다. 그러므로 나는 보험 상품을 사용하기가 싫다. 이렇게 지금 사용하기 위한 상품이 아닌, 그리고 사용을 하기가 싫은 상품을 나는 구매해야 하는 것일까?

보험회사는 구매자의 이러한 갈등을 알기 때문에 시청자를 매일 협박한다. ‘당신은 미래의 어떤 날에 암에 걸려 죽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남아 있는 가족을 위해서 지금 보험에 가입을 해야 한다.’ 보험이 당신의 걱정을 대신할 것이다. 걱정이 있는 사람과 미래가 불안한 사람은 보험 상품을 구매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보험은 현대인의 종교이며, 걱정대신교이며, 미래대비교이기도 하다.


얼마 전 체육대회를 마칠 무렵 농구장 옆에서 주령의 동생 민지가 느닷없이 질문을 하였다. 길게 이야기를 하지 말고 본론만 말하라고 하면서. 남민지의 질문은 아주 짧았다. ‘이해와 공감은 어떤 관계인가?’

나는 갑자기 던진 질문에 당황하였다. 그래서 생각이 나는 대로 두서없이 말을 했다. 공감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이해한 것을 어떻게 공감할 것인가?로 질문을 바꾸어서 설명을 했다. 공감이란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전체적 이해는 공감의 다른 말이라고 했다. 전체적 이해를 위해서는 어떤 일의 원인과 과정을 알아야 하고, 다른 곳에서는 사정이 어떠한지를 알아야 하고, 역사 속에서 사정이 어떠한지를 알아야 한다. 즉 인과적, 공시적, 통시적 이해가 이루어질 때 전체적 이해를 통한 공감이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은 생물학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더라도 공감을 하기는 어렵다. 공감(느낌)은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이렇게 설명을 한 후 남민지의 눈을 보니 공감의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남민지가 공감의 눈빛을 나에게 보낸 이유는, 이해와 공감의 관계를 알고 싶은 절실한 느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공감(느낌)은 항상 자기 것이다.

나는 걱정의 느낌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나의 느낌을 보험이 대신할 수는 없다. 보험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걱정의 느낌이 확대 재생산되는 과정을 바라보는 관찰자로 깨어 있으면 되는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