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악장(Movement)과 세 개의 파라텍스트
▶ 들어가며
시집을 펼치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목차다. 『영원 금지 소년 금지 천사 금지』는 1부, 2부,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의 경계에는 Prelude, Interlude, Postlude라는 음악적 표제가 놓여 있다. 더불어 각 부에서는 ‘영원’, ‘소년’, ‘천사’라는 단어가 지속적으로 변주*된다. 이러한 구성은 단순한 분할이나 배열을 넘어, 시집 전체가 일정한 리듬과 구조를 가진 하나의 작품으로 조직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육호수에게 시집이란 무엇일까. 시집은 단순히 완성된 시들을 묶어 놓은 결과물이 아니다. 하나의 시집은 선택과 배제, 그리고 배열의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구성물**이며, 그 안에서 시편들은 시집이라는 맥락 속에서 서로를 비추며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시집은 ‘한 편 한 편의 합’이라기보다, 전체의 리듬과 흐름, 긴장과 귀결을 지닌 하나의 단위로 이해될 수 있다. 어떤 경우(박지일, 『물보라』)에는 시집 전체가 하나의 긴 시에 가까운 구조로 읽히기도 한다.
육호수 역시 목차의 구성에서 드러나는 여러 단서를 통해 자신의 시집을 하나의 유기적인 구조로 제시한다. 시집에 특정한 컨셉을 설정하고 형식적 실험을 수행하며⎯김수영의 표현을 빌려 ‘포즈’를 취하는 행위는 단순한 기교나 장식이 아니라, 자기 인식의 한계를 드러내고 그것을 갱신하기 위한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인은 더 이상 ‘자연스러운 감정’이나 ‘진실한 목소리’가 곧바로 언어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한 이후, 오히려 인위적인 형식과 태도를 통해 자신을 재구성(타자화)하려 한다. 이때 ‘포즈’는 진정성의 결핍이 아니라, 진정성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형식적 우회이며, 동시에 세계와의 불일치를 감각적으로 드러내는 하나의 장치로 기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원 금지 소년 금지 천사 금지』에서 반복되는 ‘금지’라는 선언은 단순한 부정의 언어로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의 형식적 장치로서, 특정한 세계를 구성하고 동시에 그 균열을 드러내는 리듬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집은 순수한 세계에 대한 갈망과 그 불가능성을 동시에 호명하는, 말하자면 하나의 ‘순수 금지곡’으로 읽힐 수 있다.
따라서 이 시집을 읽기 위해서는 개별 시편의 의미를 해석하는 작업에 앞서, 시집 전체가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를 살피고 그 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핵심 키워드를 포착하는 일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이러한 인식에서 출발하여, 육호수가 설정한 시집의 구조****를 따라 『영원 금지 소년 금지 천사 금지』를 순차적으로 읽어 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시집 전반에 반복되는 시어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나아가 육호수가 왜 ‘금지’를 말하고 있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더불어 각 부에 수록된 시 제목에서는 동일한 단어들이 다른 순서로 배치되기도 한다.「소년 금지 영원 금지 천사 금지」 1부 p.34, 「천사 금지 소년 금지 영원 금지」 2부 p.80, 「영원 금지 소년 금지 천사 금지」 3부 p.137.
**정치훈, 「김종삼 시집 『십이음계』의 위상과 의미」, �한국시학연구� 60, 한국시학회, 2019.
***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사, 2023, 304-308면.
****본 글은 시집의 구성을 차용하여 세 개의 악장과 세 개의 파라텍스트(Prelude, Interlude, Postlude)로 나누어 전개된다. 각 파트별로 설명을 돕기 위해 빌려온 시편은 순서만 다를 뿐 시집의 구성과 같다는 점을 미리 밝힌다.
▶ Prelude
전주곡(Prelude)은 본격적인 음악이 시작되기 전 청자의 몰입을 돕고, 작품의 정서와 방향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영원 금지 소년 금지 천사 금지』에 수록된 전주곡 또한 유사한 기능을 수행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시집의 첫 시 「희망의 내용 없음」은 “우리가 우리에게 / 발각되지 않는 곳으로 가자”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며,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적 분위기와 문제의식을 미리 제시한다. 이 시는 이후 이어질 시편들의 세계를 예고하는 하나의 출발점으로 읽힌다.
(1)
우리가 우리에게
발각되지 않는 곳으로 가자
더 많은 공기를 정화할
더 많은 허파가 필요한
오래된 세계에서
더 많은 빙하를 녹일 더 많은 체온이
더 많은 어둠을 흡착할 더 많은 악몽이
더 많은 멸종을 지켜봐줄 더 많은 마음이 필요한
오래된 세계에서
사람인 채로 더 이상
망가지고 싶지 않아
적막 속에 찾아오는 수치심은 아름다웠음
몸을 떠난 살은 몸보다 먼저 썩었음
희망의 내용 없음
여러 겹의 몸을
몸 위에 겹쳐지는 무수한 유령들을
허물로 남겨두고
밤의 아름다움을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가자
푸른 하늘 은하수 끝나지 않는 손장난
밤이 기어이 밤을 어기는 곳으로
우리라고 부를 이 없음
우주선 없음
다른 세계 없음
희망의 내용 없음
내가 너에게 발각되지 않는 곳에서
울지 않고 기다릴게
거울에 갇힌 구름은 갈 수 없는 곳
어린 신의 어항 속
천사의 아가미를 달고
면벽의 안식 속에 감금되어
죽음과의 문답으로부터 소외되어
나의 굴레만을 나의 것으로
소유자 없는 나의 소유로 여기며
기다리는 이 없는 기다란
기다림
무색무취 수신자 없는 기도를
잇고 있을게
오래된 세계에서
지나치게 외로워서
지나치게 정직했음
영원에 진 빚 없음
⎯「희망의 내용 없음」 전문
(1)은 명사형 종결 어미 ‘-음’으로 구성되어, 마치 메모하거나 보고하듯 건조한 기록의 태도를 형성한다. 감정을 직접 표출하기보다 거리 두기를 유지한 채 진술하는 방식은 오히려 절망적인 상황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시적 화자는 어떤 상태를 반복적으로 서술하지만, 그 행위가 변화로 이어질 가능성은 제시되지 않으며, 말해질 대상 역시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구조는 시 전반적인 공허와 단절의 감각을 형성한다.
시의 중심에는 ‘희망의 내용 없음’이라는 선언이 놓여 있다. 이 문장은 단순한 절망의 진술을 넘어, 더 이상 기대하거나 도달할 수 있는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우리라고 부를 이 없음”, “우주선 없음”, “다른 세계 없음”과 같은 구절은 대안적 가능성의 완전한 부재를 드러내며, 화자가 처한 세계가 폐쇄된 구조임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는 이 상황을 격렬하게 저항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부재를 담담하게 기록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독자에게 더 큰 울림을 발생시킨다. 감정의 과잉 대신 절제된 진술을 선택하는 이 태도는, 시가 구축하는 정서를 더욱 깊고 무겁게 만든다.
“우리가 우리에게 / 발각되지 않는 곳으로 가자”라는 구절에서 드러나는 ‘발각’의 감각은 존재의 소거를 향한 욕망을 암시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고정된 실체라기보다, 꿈속에서 존재하는 비실재적 영혼의 형태이면서 동시에 지상에서 몸을 지닌 존재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동일한 ‘우리’라는 호명 안에서 서로 다른 존재 방식이 이분화되며, 이는 시가 전개되는 세계의 균열을 드러낸다. 또한 ‘가자’라는 서술어는 이동의 의지를 전제하지만, 그 이동이 향하는 곳은 구체적인 도착지가 아니라 현재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려는 방향성에 가깝다. “오래된 세계”는 “사람인 채로 더 이상 / 망가지고 싶지” 않은 고통의 공간이며, 화자는 이곳으로부터 이탈하고자 한다. 그가 향하려는 곳은 “기도”가 모이고 “천사”의 이미지가 떠도는, 현실과는 다른 층위의 공간, 곧 꿈과 같은 장소로 읽힌다. 그러나 시는 그 이동이 실현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끝내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희망의 내용 없음」은 단순한 절망의 진술이 아니라, 이후 시집 전체에서 반복될 이탈의 감각을 예고하는 텍스트로 읽힌다. 기존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려는 욕망, 그러나 그 너머에 다른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 그리고 그 사이에서 지속되는 공허와 정지의 상태는 이 시집 전반에 걸쳐 변주되는 핵심 정서이다. 전주곡으로서의 이 시는 그러한 정서를 가장 압축된 형태로 제시하며, 이후 이어질 시편들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암시하는 출발점으로 기능한다.
‘금지’와 ‘부재’를 노래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욕망하게 만드는 역설적 선율은 이 시집 전반에 걸쳐 지속된다. 그리고 본격적인 악장이 시작되며, 육호수 시 세계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 1st Movement, 소년 : 면벽 중에 벽을 잃어
세 개의 악장과 그 사이를 잇는 곡들로 구성된 이 시집에서, 첫 번째 악장은 ‘소년 금지’라는 명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는 단순한 소년기를 회고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때 순수로 여겨졌던 세계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는 인식과 나아가 그것을 스스로 끊어내야 한다는 결단을 드러낸다. 따라서 이 악장에서 나타나는 것은 소년의 형상 그 자체라기보다, 그 형상을 부정하고 벗어나야 하는 이유, 그리고 더 이상 소년이 아니게 된 스스로의 자화상이다.
첫 번째 악장은 시적 화자가 자신의 상태를 ‘목격’하고, 이후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모색하는 과정으로 읽힌다. 1부의 부제(副題)인 ‘면벽 중에 벽을 잃어’라는 표현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대상*에 몰입하던 순간, 오히려 그 대상 자체가 붕괴되는 경험을 암시한다. 즉, 무엇인가를 응시하는 행위가 더 이상 인식의 기반을 제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을 되돌려 보게 만드는 계기로 전환되는 것이다.
시는 언어 예술이면서도 시각적 이미지와 응시의 장면을 통해 세계를 포착해 온 전통을 지닌 장르라는 점에서, 시인에게 ‘응시하는 행위’가 더 이상 인식의 기반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매우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단순히 무엇을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는 문제가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고 언어로 옮겨오던 가장 근본적인 방식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2)
거울에 붙은 모기를 죽이려다
무언가를 죽이려 다가가는 얼굴을 들켰다
[……]
정오의 태양은 태양으로 가득했고
손차양을 하다
손등에 난 점 하나를 처음 발견했다
⎯「물끄러미, 여름」 부분
(2)는 외부의 대상(“모기”)을 향하던 시선이 거울을 통해 갑작스럽게 자기 자신(“무언가를 죽이려 다가가는 얼굴”)에게로 반사되는 장면을 제시한다. “모기를 죽이려”는 행위는 일상적인 동작에 불과하지만, 그 과정에서 포착되는 자신의 얼굴은 낯선 자기 인식의 계기를 형성한다. 이는 변화된 자기 자신과의 예기치 못한 조우이며, 더 이상 이전의 ‘소년’으로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하는 순간으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육호수가 말하는 ‘소년’은 단순히 폭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순수한 존재일까. 모기를 죽이지 않는 존재라는 점에서 순수를 정의할 수는 없다. (2)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소년의 본질이라기보다, 그 단면에 가깝다. 보다 중요한 것은 “손등에 난 점 하나를 처음 발견했다”라는 진술이다. 이는 분명 오래전부터 존재해왔지만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던 자신의 성향과 감각, 사고의 흔적이 뒤늦게 드러나는 순간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화자는 이미 자신 안에 존재하던 어떤 요소를 이제야 발견하며, 그 인식의 지연 자체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인식은 ‘죽음’과 ‘이별’을 마주하는 지점에서 더욱 본격화된다. 「고사리 장마」(p.22)에서 나타나는 엽서 형식의 진술은, 더 이상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으로 구성되며, 그 자체로 부재를 전제한다. 시는 여러 개의 포스트카드로 나뉘어 “안녕”이라는 인사말로 시작하지만, 이는 단순한 인사를 넘어 도달할 수 없는 대상에게 보내는 말로 기능한다.
첫 번째 카드에서 제시되는 사소한 일상의 장면은 이미 균열된 세계의 감각을 드러내며, 두 번째 카드에서는 “지나가지 않는” 기억에 대해 사라져 달라고 요청하는 태도가 나타난다. 이는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다. 세 번째 카드에서 언급되는 “영원”에 대한 바람은 그것이 실현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한 채 제시되며, 네 번째 카드에 이르면 기억과 망각 사이의 간극이 더욱 분명해진다.
특히 “거울 속 우리는 한 번도 떨어진 적 없다”라는 진술은 ‘너’와 ‘나’를 구분하기보다 ‘우리’라는 동일한 범주로 묶는다. 그러나 이 ‘우리’는 더 이상 동일한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지 않는 존재이며, 그 간극은 결국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이별로 귀결된다. “강아지가 영원할 수 없는 것처럼”이라는 문장은 이러한 인식을 일상의 감각으로 환원하며, 영원에 대한 기대가 현실 속에서 어떻게 붕괴되는지를 드러낸다.
1부의 시를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육호수는 ‘내가 알지 못했던 과거의 나’와 ‘자신을 인식하게 된 현재의 나’를 분리하고, 그 사이의 간극을 통해 과거의 자신과 결별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물끄러미, 여름」에서 시작된 자기와의 조우는 「고사리 장마」에 이르러 보다 명확한 이별의 형식으로 구체화되며, 이는 곧 ‘소년’이라는 존재로부터의 이탈을 본격화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3)
너희라고 불려서 우리는
우리가 되었고
가끔, 우리의 바깥에
우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
내게 고통을 알게 하는 네가
옳았다고 생각해
잠에 들며 사람이 잠시 지상을 떠나가듯
이미 꿈결이므로 천사는
지상에서 잠들지 않는다지
미안한 표정으로
숨을 참는 천사들
⎯「망보는 아이들의 눈을 피해, 미래를 미래로 미뤄두려다」 부분
(4)
언젠가 거듭 작별하는 꿈에서 너는
손 위에 검은 돌멩이를 쥐어주며 말했지
“새를 잘 부탁해. 죽었지만”
⎯「접속」 부분
(3), (4)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꿈’의 장면과 천사와의 관계는 1악장에서 드러난 자기 인식 이후의 사유를 보다 더 구체화 시킨다. 여기서 핵심은 단순히 ‘왜 우리는 천사가 될 수 없는가’라는 질문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시는 인간이 고통을 감각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그 감각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는 인식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3)에서 “내게 고통을 알게 하는 네가 / 옳았다”라는 진술은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기보다, 그것을 인식하게 만든 존재를 긍정하는 역설적 태도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 진실을 건네는 천사는 “미안한 표정으로 / 숨을 참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는 천사가 고통을 제거하는 구원의 존재라기보다, 오히려 그 고통의 진실을 전달하는 매개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이 시에서 천사는 인간을 초월한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감당해야 할 진실의 곁에 머무는 불완전한 존재에 가깝다.
이러한 인식은 (4)의 “거듭 작별하는 꿈” 속 공간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너가 말하는 “새를 잘 부탁해. 죽었지만”이라는 문장은 이미 죽어버린 대상에 대한 부탁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불가능성을 내포한다. 여기서 ‘새’는 단순한 사물이라기보다, 사라진 존재 혹은 회복될 수 없는 어떤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읽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부탁한다’는 말이 건네지는 순간, 그 말은 의미를 전달하기보다 오히려 공허와 무게를 남긴다. 마치 “검은 돌멩이”와 같은 이 진술은 부드럽게 전달되는 부탁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실상은 무겁고 단단하고 새까만 불가능성으로 남는다.
이 과정에서 시는 ‘우리’라는 존재 역시 분열된 상태로 제시한다. “우리의 바깥에 / 우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인식은 동일한 존재가 더 이상 하나의 층위에 머물지 못하고, 내부와 외부로 나뉘어 인식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는 앞선 시편에서 나타난 자기 인식의 균열이 타자와의 관계, 더 나아가 존재 전체의 구조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시 속에 등장하는 상징과 키워드를 일대일 대응 관계로 고정시키는 해석의 위험성이다. ‘천사’, ‘꿈’, ‘새’, ‘우리’와 같은 이미지들은 하나의 고정된 의미로 환원되기보다, 서로 다른 맥락 속에서 변형되고 중첩되며 작동한다. 따라서 이 시들을 읽는 과정은 특정 의미를 확정하는 작업이라기보다, 그러한 의미들이 끊임없이 어긋나고 확장되는 지점을 추적하는 과정에 가깝다. 이는 시를 일정한 틀 안에 가두기보다, 그 흔들림 자체를 따라가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러한 흐름은 1악장의 핵심 시편인 「소년 금지 영원 금지 천사 금지」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이 시에서 ‘죽음’은 단순한 비극적 사건이 아니라, ‘소년’의 언어를 통해 재구성된다. 부드러운 높임의 말투, 이른바 해요체로 표현되는 진술은 죽음을 완화된 어조로 감싸면서도, 그 이면에 놓인 상실의 감각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또한 큰 글씨와 작은 글씨의 병치는 외부 상황을 관찰하는 시선과, 그것에 반응하는 내면의 사유를 분리하여 제시하는 효과를 만든다.
결국 이러한 형식적 실험은 하나의 역설로 수렴된다. 더 이상 소년일 수 없고, 더 이상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과 영원을 향한 감각을 완전히 포기하지 못하는 상태. 육호수의 ‘금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작동한다. 그것은 단순한 단절의 선언이 아니라, 이미 불가능해진 세계를 향해 여전히 남아 있는 감각을 끌어안은 채, 그 세계로부터 벗어나려는 모순적인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의 끝에는, 소년의 모습을 잃어버렸음을 알면서도 끝내 그것을 잊지 못하는 어떤 마음이 남아 있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시간임을 알기에 더욱 선명해지는 기억, 사라졌기 때문에 오히려 지속되는 감각. 육호수의 시는 바로 그 지점에서 멈춰 서 있으며, 잃어버린 것을 금지하는 동시에 그것을 오래도록 붙잡고자 하는 인식을 통해, 시집 전체에 깊은 울림을 남긴다.
(5)
“안녕, 너희 강아지는 건강하니? 너희 강아지가 영원히 살았으면 좋겠어. 네가 너의 강아지를 포기하는 날도, 네가 간직한 조그마한 영원을 포기할 날도 없었다면 좋겠어. 약속했던 편지 앞에 이제야 앉았어.”
⎯「고사리 장마」 부분
* 육호수의 시에서 ‘벽’은 수도자로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대상임과 동시에 예술가로서 성취할 수 없는 장애물로 기능한다. ‘벽’에 관한 보다 자세한 사유는 3악장(부제 : 벽을 닦아 거울을 얻어)에서 계속된다.
▶ Interlude
두 번째 파라텍스트인 「하다못해 코창에서 스노클링을 하다가 말미잘을 보고도 네 생각이 났어」(p.50)는 코창에서의 스노클링 경험을 바탕으로, ‘코리안 히피’와의 대화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긴 호흡의 시이다. 이 시의 배경인, ‘코창(Koh Chang)’은 태국의 해외 휴양지로서 화자가 경험하지 못했던 감각으로 채워진 이국적 공간이다. 화자가 ‘코리안 히피’를 통해 ‘코창’을 점차 알아가는 과정은, 그곳이 현실의 연장선에 놓여 있으면서도 동시에 일시적으로 다른 질서가 작동하는 공간, 나아가 일종의 ‘천국’에 가까운 장소로 인식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시편은 1악장에서 지속되던 밀도 높은 슬픔과 자기 인식의 흐름에서 벗어나, 보다 감각적이고 유동적인 분위기로 전환되며 인터루드로서의 기능을 분명하게 수행한다. 스노클링과 ‘론니 비치’에 대한 몽환적 이미지 묘사, 코창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는 ‘코리안 히피’의 등장, 그리고 일상적이면서도 어딘가 비현실적인 대화의 흐름은 시 전체에 새로운 음색을 부여한다. 특히 화자가 “벽 속에서 누군가 끽끽 웃”고 있다고 말하니, 그것은 아마 “찡쪽이라는 도마뱀”일 것이며 웃는 게 아니라 “끽끽 운 거”라고 대답하는 코리안 히피와의 대화를 통해 ‘벽’ 속의 울음과 웃음을 치환하는 장면은, 현실과 감각의 경계가 유연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더불어 이는 앞선 악장에서 반복되던 ‘벽’의 이미지와도 미묘하게 연결되며, 시집 전체의 구조적 연속성을 유지한다.
그리고 ‘코리안 히피’를 생각하며 화자가 그도 “가끔은 시를 쓸까? / 시 쓴다고 하면 그 사람 그만 봐야지”라고 농담처럼 내뱉는 장면은, 시와 삶 사이의 거리감을 가볍게 환기하는 동시에, 이전까지의 무거운 정서를 잠시 이완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시집 전체의 흐름 속에서 단순한 삽입이 아니라, 정서적 과잉을 조절하는 완충 장치로 작동한다.
시의 후반부, “나는 입 벌린 대왕조개가 되어 / 물에 잠겨 사라질 말들을 / 편지 위에 풀어놓지”라는 구절은 이러한 전환된 공간 속에서 드러나는 화자의 시적 태도를 암시한다. 이는 언어가 완전히 도달하지 못하는 상황(“사라질 말”)들을 담아내고자 하는 시적 욕망을 드러내며, 동시에 육호수의 시 세계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또한 “너를 떠올리며 나는 어려지고 /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끌고 가야만 / 닿을 수 있는 지옥이 있어 / 나는 어려지기만 해”라는 구절에서는 조금 더 직접적으로 시인의 목소리가 드러나기도 한다. 여기서 ‘어려짐’은 단순한 회귀가 아니라, 특정한 감각과 목소리에 도달하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되는데, 이는 화자의 시적 형식이 어떠한 방식으로 구성되는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이후 전개될 두 번째 악장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결국 해당 인터루드는 단순한 분위기 전환을 넘어, 시집의 흐름을 다시 한 번 재조정한다. 감각의 이완과 재구성을 거친 이후, 시집은 보다 깊어진 상태로 다음 악장에 진입하게 된다.
▶ 2nd Movemonet, 천사 : 스스로에게 배웅하는 법을 배울 때까지
(6)
거제도
능포 바닷가
옥수교회 본당 예배실
나무로 된 둥근 강대상 안쪽 면엔
미닫이문으로
열리는
닫히는
꽤 널찍한 수납공간이 있었다
그 안에는 『찬미예수 1000』악보나
고장난 마이크 케이블이나
오래된 설교 원고나
아주 오래된… 말하자면,
태어나기 전의 날짜가 적혀 있는 주보 같은 것들이
들어 있곤 했다
권사님들도 이곳은
잘 열어보지 않는 것 같았다
어린이부 예배가 끝나고
교회 마당에서 숨바꼭질을 할 때도
그곳에 들어가 몸을 말고 숨어 있으면
아무도 나를 찾지 못했다
어떤 날엔 그러다 잠들어
깨어보니
주일예배 한가운데
숨어 있었다
찬송 소리가
모두 내게 오는 것 같은
어둠 속이었다
까마득히 나는, 오래전부터… 말하자면,
이곳의 어둠보다 먼저
이곳에 와 있었던 것 같았다
처음 느껴보는 그리움이었지만
익숙해서
곧 다시 잠에 들었다
⎯「고향, 잠」 전문
2부에서는 ‘천사’와 교회, 그리고 과거에 믿었던 ‘정답’ 혹은 신성에 대한 갈망이 혼재된 시편들이 다수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고향, 잠」은 이러한 흐름이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이다. 이 시는 어린 화자가 교회 예배실 강대상 내부의 수납공간에 몸을 숨긴 채 잠드는 장면에서 출발한다. 화자는 그곳에 숨어 있을 때 “아무도 나를 찾지 못했다”고 말하며, 이어 “깨어보니 / 주일예배 한가운데 / 숨어 있었다”고 진술한다.
이 장면에서 ‘숨는다’는 행위는 단순한 놀이의 차원을 넘어, 존재의 인식과 관련된 이중적인 의미를 형성한다. 1악장에서 확인했듯이, 육호수에게 ‘나’는 종종 스스로에게조차 낯선 존재로 분리되어 인식된다. 따라서 “아무도 나를 찾지 못했다”는 말은 타인에게 발견되지 않았다는 의미를 넘어, 자기 자신 역시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로 확장된다. 이는 곧 존재가 스스로에게서도 은폐되는 감각을 드러낸다.
이러한 맥락에서 ‘잠’과 ‘꿈’은 현실로부터 이탈한 또 다른 층위의 세계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작동한다. 시 속에서 잠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의식의 경계를 벗어나 다른 질서가 작동하는 공간으로 진입하는 계기이며, 꿈은 그 공간에서 형성되는 감각과 인식의 장이다. 육호수의 시에서 이러한 꿈의 세계는 무의식, 천국, 혹은 죽음의 영역과 겹쳐지며, 그 안에서만 포착 가능한 감각과 언어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동시에 이는 이전 악장에서 드러났던 ‘소년’, ‘천사’, ‘영원’의 세계와의 관계를 다시 사유하게 만드는 지점이기도 하다.
인터루드에서 잠시 엿보였던 낯설고 이국적인 공간은 (6)에 이르러, 보다 내면화된 형태로 화자에게 스며든다. 화자가 어두운 수납공간 속에서 잠드는 장면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그곳을 향한 의식적인 선택에 가깝다. 특히 “까마득히 나는, 오래전부터…”, “이곳의 어둠보다 먼저 / 이곳에 와 있었던 것 같았다 / 처음 느껴보는 그리움”이라는 진술은 꿈의 감각이 더 깊은 층위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권사님들도” 좀처럼 열어보지 않는 강대상 안쪽, 그 어둠 속에 ‘나’가 있다. 예배실에서 흘러나오는 “찬송 소리”는 여전히 바깥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지만, 화자는 오히려 그로부터 이탈한 어둠 속에서 익숙함과 안식을 감각하며 스스로 그 세계에 속하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일시적인 충동이 아니라, “까마득히”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감각으로 이어진다.
결국 「고향, 잠」은 현실과 꿈, 의식과 무의식, 인간과 신성의 경계가 겹쳐지는 지점을 드러내며, 육호수의 시에서 ‘영원’이 어떠한 방식으로 사유되는지를 탐색하게 만든다. 현대시에서 꿈은 단순한 환상이나 도피의 공간이 아니라, 기존의 언어와 질서가 작동하지 않는 또 다른 인식의 층위*로 이해된다. 꿈 속에서 경험되는 감각은 현실의 시간과 분리된 채, 지속되거나 반복되는 형태(“처음 느껴보는 그리움”)로 나타나며, 이는 종종 ‘영원’의 감각과 연결되는 것이다.
(7)
숨어라
숨바꼭질을 하다 숨는 척 집에 돌아오던 길
구름이 나를 따라온다 믿었다
상어에게 쫓기는 물고기들에겐
수면이 낭떠러지겠지
숨어라
눈을 감은 아이는 하나였고
숨을 곳이 마땅치 않은 아이들이 많았는데
숨어라
천사는 약속이 너무 많아서
열 손가락에 모두 반지를 끼고 다닐 거야
날개 달린 천사들에게도
거울은 낭떠러지일 거야
[……]
땡
눈을 감았다 뜨면
창밖엔 멈춰 서 있는 아이들
얼음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더 가까운 곳에 멈춰 서서
빤히 유리창을 올려다보는 아이들의
벌린 입
에서 흘러내리는 침
⎯「빛의 궁지」 부분
(8)
팔각 거울 앞에서 옷을 벗고
몸에 핀 멍을 세어보던
열두 살 열한
열 살 아홉
천사는
팔각 거울에 묻힌
나의 눈동자 속에 고립되었다
[……]
아홉 살
얼음 구멍의 위치를 까먹은
물범이 되어
목이 자꾸 길어지고
숨구멍을 찾아야 하는데
투명한 얼음 바닥에 비친
투명한 나의 눈에 갇힌
투명한 천사의 몸
움찔거려
⎯「크라잉 게임」 부분
지금까지의 흐름을 정리해 보자. 가장 먼저 육호수는 현실의 ‘나’를 직시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더 이상 ‘순수를 꿈꾸는 소년’으로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속에서 발생하는 고통을 감내하기 위해, 화자는 불가피하게 ‘소년’을 금지한다. 그러나 이 금지는 단절로 귀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소년의 감각을 지속적으로 호출하는 역설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며, 부정과 욕망이 동시에 중첩된 상태를 형성한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화자는 점차 현실 언어의 한계를 감각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언어의 한계’란 단순한 표현의 부족이 아니라, 고통과 죽음, 그리고 무의식의 감각과 같은 경험이 기존의 질서화된 언어로는 온전히 포착될 수 없다는 인식에 가깝다. 즉 현실의 언어는 세계를 설명하고 정합적으로 구성하려는 방향으로 작동하지만, 그 질서 바깥에서 발생하는 감각들(잃어버린 소년의 얼굴, 소년의 눈동자에 갇힌 천사, “영원히 살았으면 좋겠어”라 말하는 순수)은 오히려 질서화된 언어를 벗어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결국 화자는 나름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무의식의 층위, 곧 ‘잠’과 ‘꿈’의 세계로 더욱 깊이 침잠해 들어간다. 언어의 실패 이후에 열리는 또 하나의 인식의 장, 그 안에서 화자는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를 감각하고 재구성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동은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동시에, 화자를 또 다른 궁지로 몰아넣는다. 「빛의 궁지」, 그 제목과 본문에서 드러나듯, 꿈과 무의식의 세계는 결코 안정된 공간이 아니며, 오히려 쉽게 탈출할 수 없는 공간으로 변형된다. (7)에서 나타나는 숨바꼭질과 얼음땡의 이미지는 이러한 상황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숨고자 하지만 숨을 곳은 없고, 멈추면 안 되는 상황에서 멈춰버리는 감각은 “낭떠러지”와 “고립”이라는 이미지와 결합되며 반복된다. 이 장면은 (6)에서 교회 강대상 내부에 숨어 있던 화자의 모습과 대비되는데, (6)에서는 숨는 행위가 일시적인 은폐와 안식, 선택의 공간으로 기능했다면, (7)에서는 “숨을 곳이 마땅치 않은 아이들”이라는 표현을 통해 더 이상 은폐가 불가능한 상태**가 드러난다. 이때 ‘아이’와 ‘천사’는 서로를 비추는 존재로 중첩되며, 더 이상 보호받지 못하는 순수의 상태를 드러낸다.
이러한 감각은 (8)에서 더욱 내면화된 형태로 이어진다. 「크라잉 게임」에서 화자는 “나의 눈동자 속에 고립된” 천사의 이미지를 제시하며, 외부에 존재하던 ‘천사’를 자신의 내부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그 내부는 결코 안정된 공간이 아니며, 오히려 탈출할 수 없는 고립의 장소로 작동한다. “투명한 얼음 바닥에 비친 / 투명한 나의 눈에 갇힌 / 투명한 천사의 몸”이라는 표현은 존재가 점차 보이지 않게 되면서 동시에 더욱 강하게 갇히는 역설적 상태를 드러낸다.
또한 (7)의 “벌린 입 / 흘러내리는 침”, (8)의 “투명한 천사의 몸 / 움찔거려”와 같은 표현은 이러한 세계가 단순한 상징의 차원을 넘어, 신체적 감각으로까지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꿈과 무의식의 세계가 더 이상 추상적 공간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체험되는 현실과 같은 밀도를 지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결국 2악장에서 전개되는 이러한 시적 흐름은, 1악장에서보다 훨씬 더 감각적이고 전위적인 양상으로 심화된다. 동시에 그 감각은 보다 직접적이고 처절한 형태로 드러난다. 세계는 더 이상 안정적으로 유지되지 않으며, 의미와 상황은 끊임없이 어긋나고, 그 어긋남은 점차 증폭되고 확장된다.
이제, 육호수의 시는 현실의 고통을 더 이상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언어의 한계를 더욱 깊이 파고들며, 말해도 전달되지 않는 것과 말하지 않았음에도 과잉 해석되는 세계를 동시에 드러낸다.
(9)
이런 폭우 속에서라면
무엇이든 말해버릴 것 같다
입을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우산 아래 숨어든 말들을 모른 척
다 적어버릴 것 같다
죽어가는 사람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마지막 남은 말로
“내게 영혼을 보여주지 말아줘”
누구도 내게 속삭이지 않고
모든 파문으로 빗나가는 사건의
마다와 마다에서
하나 마나인 말을 위해
쓰나 마나인 우산을 쓴다
⎯「다 적어내려 하다간 백지가 젖어버릴」 부분
(10)
한줌의 숨으로 어두워지고
한줌의 숨으로 밝아지는
구름 그늘 아래서
식물에 잠겨가는 산책길에서
검정이 옮겨질 때마다
연필 쥔 손이 희미해지는
백지 위에서
연필에 피가 돌 때까지
백지 위의 하얀 눈알들에게
잠 위에 맺힌 검은 음표들을
모두 공평히 나눠줄 때까지
쿨쿨
자고 나면 잊히듯이
꿈 속이라 기억나듯이
기도하는 포로들
중얼중얼 주렁주렁
기도하는 포도나무들
금붕어 금붕어
뻐끔뻐끔 끔벅끔벅
겨울 참새 입김
호
꾸벅꾸벅 끄덕끄덕
⎯「등 위에 바보라 쓴다 해도 나는 바다로 알 거야」 부분
(9)의 “하나 마나인 말”과, (10)의 무엇인가를 쓰려 하지만 “검정이 옮겨질 때마다 / 연필 쥔 손이 희미해지는 / 백지”의 이미지는, 언어가 더 이상 의미를 안정적으로 전달하지 못하는 상태를 드러낸다. 언어는 본래 소통을 위한 도구이지만, 이 시집에서 그것은 끊임없이 빗나가고 어긋나는 매개로 기능한다. ‘바보’가 ‘바다’로 들리고, ‘금붕어’처럼 입을 움직이지만 끝내 의미에 도달하지 못하는 장면은, 소통이 구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보여준다.
시집이 전개되며 반복적으로 축적된 불안의 이미지 속에서 포착된 ‘소통 불가능성’은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 반드시 직면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로 부상한다. 그렇기에 이 시점에서 육호수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소통⎯언어의 불합리 앞에서 어떻게 움직이는가. 언어로 이어지지 않는 타인을 어떻게 이해하려 하는가?
2부에서 형식을 파괴하고 다양한 기법으로 이미지를 보여주는 시편들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육호수의 답변으로 읽힌다. 가장 익숙한 타자인 ‘철수’와 ‘영희’의 시점으로 이동하며 타자화된 시선을 실험하고(「추억은 배낭에 쓰레기는 가슴에」, 「신호대기」), 인터루드에서 펼쳐졌던 사건들을 언어가 아닌 한 장의 사진으로 압축하기도 한다(「하다못해 코창에서 스노클링을 하다가 말미잘을 보고도 네 생각이 났어」(p.79)). 또한 2000년대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에서 사용되던 기호와 이모티콘을 차용하여, 텍스트 기반 소통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오해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시(「Łй 악몽 속으로 へㅏㄹΓ진 ㉡ㅓ의 영혼의 ёnŧrØpħy로 Ꮣㅐ겐 Øl런 문ㅈБO1 Łй己lヹ...」), ‘■’와 같은 기호를 활용하여 의미가 고정되지 않는 상상의 언어를 구성하거나(「고락푸르행 따갈 티켓」), 시제를 넘나드는 파편들을 연결함으로써 비선형적인 시간 속에서의 지속성을 탐색하는 시도(「시론에는 원고료가 없고」) 역시 확인된다. 이러한 다양한 형식적 실험은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된다.
즉, 위의 시편들은 현실의 언어로는 포착할 수 없는 감각을 꿈·무의식·천국·죽음의 영역에서 새롭게 구성하려는 시도이며, 망가진 꿈의 기억을 관찰하고 훼손된 의미의 조각들을 수집하려는 태도이다. 동시에 이는 ‘영원’, ‘소년’, ‘천사’의 세계와의 결별을 시도하면서도, 그 세계를 완전히 폐기하지 못한 채 유희의 차원으로 변주하려는 모순적인 움직임으로 읽힌다.
결국 현실의 한계를 인지한 이후, 육호수는 형식적·언어적 차원에서 다양한 시도를 전개하며, 이를 통해 ‘천사’의 의미와 그것을 ‘금지’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단서를 제시한다. 이러한 흐름은 2부를 상징하는 시편 「천사 금지 소년 금지 영원 금지」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1부의 「소년 금지 영원 금지 천사 금지」가 꿈으로의 회피와 큰 글씨와 작은 글씨의 병치를 통해 감각의 층위를 나누었다면, 「천사 금지 소년 금지 영원 금지」는 좌우 단을 분할하여 두 개의 서사를 병치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형식 자체가 꿈과 현실, 혹은 서로 다른 인식의 층위를 동시에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하는 것이다.
왼쪽 단의 화자는 꿈 속에서 “양 팔을 벌리”면 “바람만큼 날 수 있”는 천사가 된다. 그러나 그 자유는 곧 굶주린 늑대들과의 대면으로 이어지며, 화자는 그들의 굶주림과 폭력, 나아가 그것이 지닌 감정의 복합성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해의 끝에서 결국 늑대에게 잡아먹히는 서사로 귀결된다. 반면 오른쪽 단에서는 그 꿈으로부터 벗어난 화자가 누군가에게 잠꼬대(왼쪽 단의 이야기)를 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반복되는 꾸지람 속에서 더 이상 “잠꼬대”하지 않고, “헛소리”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때 ‘천사’는 날개를 지닌 존재로서 자유의 가능성을 지니지만, 그 자유는 오직 꿈의 내부에서만 허용된다. “꿈에선 / 꿈보다 높”이 오르는 것은 가능하지만, 현실로 나아가는 것⎯심지어 잠꼬대로 자그맣게 말하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천사는 이상과 순수를 지향하는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현실과 단절된 채 그 내부에 갇힌 무력한 존재로 드러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꿈과 현실의 경계는 단순히 대비되는 것이 아니라, 좌우의 단 분할을 통해 병렬적으로 제시되며, 서로를 침식하고 제한하는 관계로 나타난다.
또한 이 시편은 시집 전체의 맥락 속에서 읽힐 때 더욱 선명한 의미를 획득한다. 왼쪽 단에서 늑대에게 잡아먹히는 장면은 1부의 「물끄러미, 여름」과도 연결된다. 모기를 죽이려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마주했던 장면이, 여기에서는 주객이 전도된 형태로 반복되는 것이다. 즉, 1부 <모기⎯화자> 구도에서 화자가 누군가를 ‘죽이려는 존재’였다면, 2부 <화자⎯늑대> 구도에서는 오히려 ‘잡아먹히는 존재’로 위치가 전환된다. 이때 늑대의 노란 눈(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통해 다시 한 번 자기 인식을 진행하며,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자기 인식에 도달한다. 이는 단순한 공포의 장면이 아니라, 타자의 시선을 매개로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발견하는 순간이며, 동시에 더 이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음을 확인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신성하고 전능한 존재였던 천사는 시집이 전개될수록 점차 무력하고 순수에만 머무는 존재로 재구성된다. 이는 천사와 신앙의 의미가 소년 시절에 믿었던 법칙(문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언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 언어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했던 시절의 감각이 여기서 다시 호출되는 것이다. 정형화된 언어의 문법 체계는 마치 답이 정해진 신앙과도 같다. 올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믿으면 세계가 그에 따라 응답할 것이라 믿는 태도. 이는 결국 세계를 단순하고 확정적인 질서로 이해하려는 ‘순수’의 감각으로 이어진다.
(11)
얕은 잠과 잠을 부수며
꿈을 고르고 있어
출입문이 망가진 꿈 속
더 아픈 네가 있는 곳
첫 비명의 증인이 되어주러
백 개의 자물쇠로 잠긴 방 안에서
손목을 마저 채울 자물쇠를 만드는 꿈이라면
봄 따라 몸의 끝자리마다 손이 자라나고
손을 자를 손 하나 남겨두고
남은 손목을 잘라내는 꿈이라면
몸 속으로만 눈동자들이 돋아나
나의 내장 말고는 보이지 않는 꿈,
나의 내장 속에서 너의 눈동자가 소화되는 걸
너의 눈동자로 지켜보는 꿈이라면
주둥이가 부러진 모기가 되어
사람의 숨 냄새에 죽음 같은 허기를 느끼며 추락하는 꿈,
꿈 속의 사랑으로 꿈 바깥의 사랑이 망가지는 꿈,
죽음의 직전 순간이 무한히 길어져 순간에게 죽음을 구걸하는 꿈,
이라면
나의 시가 쓸모 있을지도 모르니까
사람이 아니라
시가 되어 갈게
이젠 죽음보다 죽음을 잃을까 무서워
비명을 잃는 것보다 고통을 잃을까 두려워
몇 번이나 함께인 꿈으로 더 울 수 있을까?
질문이기를 멈춘 질문들이
나를 멈추게 해. 그럴 때도
잠은 멈추지 않아서
멈춘 나를 그만두곤 해
깨끗하게 악몽을 삼키고 지워줄게
시가 되면
시를 보낼게
꿈속 맘속의 꿈속의 맘속으로
읽으면 꼭 지워줘
꼭 지워줘
⎯「꿈속맘속의꿈속의맘속」 전문
2부의 마지막 시인 「꿈속맘속의꿈속의맘속」은 지금까지 전개되어 온 ‘꿈’의 의미를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다. “꿈 속의 사랑으로 꿈 바깥의 사랑이 망가지는 꿈”이라는 구절은 꿈과 현실의 경계가 더 이상 분리되지 않은 채 서로를 침식하는 상태를 보여준다. 이 시에서 꿈은 단순한 회피의 공간이 아니라, 현실을 변형하고 파괴하는 힘을 지닌 장소로 기능한다.
특히 “출입문이 망가진 꿈 속”이라는 설정은 이 공간이 더 이상 출입이 가능한 영역이 아니라는 점, 즉 폐쇄되고 고립된 상태임을 암시한다. 그 안에서 펼쳐지는 “손을 자를 손”, “몸 속으로 돋아나는 눈동자”, “내장 속에서 소화되는 너의 눈동자”, “주둥이가 부러진 모기”와 같은 이미지들은 강하게 신체화된 감각을 통해 고통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은 추상적인 감정이 아니라, 육체를 통해 경험되는 고통의 형태로 제시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화자의 태도이다. “이젠 죽음보다 죽음을 잃을까 무서워 / 비명을 잃는 것보다 고통을 잃을까 두려워”라는 진술은 더 이상 고통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화자는 고통을 제거하려 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감각하고 유지하려는 방향을 선택한다. 이는 1악장과 2악장을 거쳐 ‘죽음’과 ‘비명’이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인식한 결과이며, 여기서 “잃어버린다”는 말은 곧 질문을 포기하는 상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인터루드 「희망의 내용 없음」에서 드러나듯, 육호수는 희망의 부재 속에서도 “울지 않고 기다”리는 존재이지, 고통을 외면하며 도피하는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마주한 세계를 끝까지 견디며 사유하는 태도를 취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깨끗하게 악몽을 삼키고 지워줄게”라는 말은 고통의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부로 끌어들여 감당하고 처리하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육호수에게 ‘꿈’은 단순한 환상의 공간이 아니라, 무의식의 가장 깊은 층위이며 시가 생성되는 장소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서 감각할 수 없었던 것들을 더 극단적인 형태로 드러내는 장소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화자는 자신의 감각과 언어를 다시 구성한다.
결국 2부는 부제(스스로에게 배웅하는 법을 배울 때까지)와 이어지며 ‘천사’를 믿었던 스스로를 배웅하는 과정으로 읽힌다. 어린 시절에 믿었던 순수한 세계, 고통이 제거된 완전한 상태에 대한 믿음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화자는 더 이상 꿈 속에서 유능한 천사를 상상하지 않는다. 대신 꿈을 통해 고통을 직면하고, 그것을 더욱 전위적이고 신체적인 이미지로 변환하여 이해하려는 시도를 이어간다. 이는 ‘순수’로부터의 단절이 아니라, 순수를 통과한 이후에 도달한 또 다른 인식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 김다솔, 「영원을 믿지 않는 사람을 영원히 믿을 때 미래는 온다 ― 차도하, 『미래의 손』(봄날의책, 2024)을 맞잡고」, �청색종이� 13, 청색종이, 2024, 49-70면.
** 더불어 이 지점은 현실에서 꿈으로 이동하는 상황과 꿈에서 갈 곳이 없어 궁지에 몰린 상황을 보다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있다. 화자의 꿈 속에는 더 이상 “강대상 안쪽 면” 수납공간 같은 장소가 없다. “숨바꼭질을 하다 숨는 척 집에 돌아”가도 “구름이 나를 따라온다”고 믿을 정도로 위태로운 장소이다.
▶3rd Movemonet, 영원 : 벽을 닦아 거울을 얻어
(12)
나는 천적의 눈을 몸에 새긴 나비, 건반 위로 내려앉는 꿈의 분진, 빛무리에 망설이는 낱알들.
나는 방주에 오르지 못한 귀신들, 줄이 끊어진 통발, 미끄럼틀 속 부풀어오르는 비명, 연가시, 끝을 향해 길어지며
끝이 말라가는 초록 사인펜, 풀이 사라지는 초원의 평화, 멍으로 잠겨가는 낙과들.
나는 기도중에 하면 안 되는 질문들, 허물, 붉은 시선으로 엮인 터널, 몸을 바꿔 지날 수 있나? 그물, 그물에 걸려 알을 쏟아내는 참치, 참치 알, 죽음을 투과하는 언어로 받은 용서, 그러나 나는
신의 왼 뺨을 꿴 루어, 불 꺼진 조명가게의 밝음. 사라짐이 사라지면 보이는 글자들.
다시 나는 혈관으로 한 방울씩 묽은 기억, 투명으로, 투명과 투명 사이로, 백지 아래 묻힌 문장들, 지렁이 무덤, 영영 마르지 않는 이불. 눈꺼풀 내려앉는 소리. 나비 박물관
⎯「Prelude」 전문
(12)는 3부의 시작을 알리는 또 하나의 「Prelude」이다. 이 시는 지금까지의 시편들과 비교할 때, 보다 추상적이고 감각의 밀도가 높은 이미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천적의 눈을 몸에 새긴 나비”, “끝이 말라가는 초록 사인펜”, “죽음을 투과하는 언어로 받은 용서”와 같은 표현들은 구체적인 사건이나 서사보다, 파편화된 감각과 존재의 상태를 전면에 내세운다. 이는 단순한 표현 방식의 변화라기보다, 시집이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고 있음을 알리는 징후로 읽힌다.
그렇다면 금지의 노래를 이어오던 이 시집은 왜 다시 한 번 전주곡을 필요로 할까. 이는 앞선 두 악장을 통과한 이후, 시집이 또 다른 차원의 질문 앞에 서기 때문이다. 1부에서 육호수는 더 이상 자신이 ‘소년’일 수 없음을 자각했고, 2부에서는 ‘천사’와 ‘언어’ 역시 더 이상 붙들 수 없는 세계임을 확인해왔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현실 속에서 끝내 이어갈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3부의 전주곡은 바로 이 질문을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열어 보인다.
많은 이들이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체념하거나 분노하고, 혹은 그 벽에 맞추어 자신을 조정한다. 그러나 육호수는 또 하나의 전주곡을 부름으로써 다른 방향을 택한다. 눈앞의 벽을 넘는 대신, 자신 안의 벽을 해체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자신을 구성해온 감각과 육체, 기억과 언어의 형식을 다시 분해하는 일에 가깝다. (12)에서 ‘나’는 고정된 존재로 제시되지 않는다. “나는”으로 시작되는 연쇄적 진술은 자아를 안정적으로 규정하기보다, 서로 다른 이미지와 상태들 속으로 끊임없이 흩어지게 만든다.
이러한 맥락에서 「Prelude」는 단순히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시가 아니라, ‘나’를 다시 정의하고 동시에 해체하는 시로 읽힌다. 특히 “죽음을 투과하는 언어로 받은 용서, 그러나 나는”이라는 구절은 이전까지의 시편들에서 반복되어 온 죽음, 언어, 용서의 문제를 응축하면서도, 그 응축의 끝에서 다시 미끄러지는 자아를 보여준다. 이어지는 5연에서는 “신의 왼 뺨을 꿴 루어”와 “사라짐이 사라지면 보이는 글자들” 같은 이미지가 등장하며, 신성과 소멸, 언어와 흔적의 문제가 한데 겹쳐진다. 이는 더 이상 순수한 소년도, 자유로운 천사도 될 수 없는 화자가, 사라짐과 해체 자체를 통과하며 새로운 노래의 형식을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나아간 것이다.
3부의 「Prelude」는 앞선 두 악장을 지나온 화자가 이제 무엇을 붙들고 남아 있을 수 있는지를 묻는 시이자, 그 답으로서 ‘해체’를 제시하는 시이다. 육체를 해체하고, 기억을 해체하고, 언어를 해체하는 일. 그리고 그 해체의 와중에도 여전히 노래를 부르는 일. 노래는 언젠가 끝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영원하지 않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영원을 잠시 꿈꾸게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전주곡은 끝을 향해 가는 시집 한가운데서, 다시 한 번 육호수만의 노래가 어떻게 가능해지는지를 예고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13)
침묵에 대한 두려움으로 침묵이던 밤
짧은 기도를 마치고
여음으로 겨울 방을 데운다
나의 기도가 이어지게 하소서
나의 기도가 끊기게 하소서
이루소서, 이루지 마소서, 이룰 수 없게 하소서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이 밤이 사치스럽고
벽에서 귀가 돋아나길 기다리다 이제
벽의 귀가 되어야 한다는 걸 알겠다
벽에 몸을 누이고
벽에 핏줄을 내리고
내장을 담아야 한다는 걸 알겠다
벽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좁은 방이라서?
벽 없이는 허물어질 유체의 영혼이라서?
창밖의 가로등이 일제히 꺼지는 순간
턱 밑까지 차오른 아침 속에서
감은 눈을 마저 감는다
벽의 귀가 되면
내게 입이 남아있을까?
벽을 닦아 거울을 얻어
벽에게 들은 말을
벽에게 전한다
⎯「벽을 닦아 거울을 얻어」 부분
이제는 지금까지 반복되어 온 육호수의 ‘벽’을 하나의 축으로써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각 악장을 연결하던 가장 단단한 기둥으로서의 ‘벽’은 3부에 이르러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형상으로 시 전면에 등장한다. 화자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이 밤이 사치스럽고 / 벽에서 귀가 돋아나길 기다리다 이제 / 벽의 귀가 되어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이는 더 이상 벽을 외부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데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그 일부가 되어야 하는 단계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벽으로 둘러싸인, “벽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좁은 방”에서도 화자는 더 이상 벽을 응시하며 고민하지 않는다. 대신 “벽을 닦”으며 그 표면에 직접 개입하고, 나아가 “벽에게 들은 말을 / 벽에게 전한다.” 이때 벽은 단순한 경계나 장애물이 아니라, 감각과 의미가 순환하는 매개로 전환되며, 화자 역시 그 흐름 속으로 편입된다.
(14)
소반 위에
갓 씻은 젓가락
한 켤레
나란히 올려두고
기도의 말을 고를 때
저녁의 허기와
저녁의 안식이 나란하고
마주 모은 두 손이 나란하다
나란해서 서로 돕는다
식은 소망을 데우려 눈감을 때
기도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반쪽 달이 창을 넘어
입술 나란히 귓바퀴를 대어올 때
영원과 하루가 나란하다
요람에 누워 잠드는 밤과
무덤에 누워 깨어나는 아침
포개어둔다
⎯「나란히」 전문
(15)
당신의 침묵이 영원을 가두어 지키기에, 나는 영원의 문 앞에 누워 영원을 향해 고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막 잠에서 깬 당신의 얼굴을 알고 싶어 당신의 등 위에 나의 끝을 대어본다. 당신과 나 사이엔 무엇도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등돌려 잠든 당신, 빛으로 세계를 더듬어 나를 찾고 있나. 세계의 반대편으로 모든 빛이 쏟아져 내린다면 이곳엔 영원한 밤이 오겠지. 어둠과 독대하며 팽창하는 당신의 등을 빌려 기도한다. 나는 당신의 숨소리를 들으며 당신의 등을 지킨다. 이곳에 빛이 가닿기를. 영원한 시선으로 영원을 소거하기를. 이곳에서 눈뜨기 전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눈동자로서, 마지막 눈동자를 감겨줄 손그림자로서
⎯「정오의 기도」 부분
시집의 말미에 이르러 육호수의 진술은 보다 직접적이고 응축된 형태로 제시된다. (14)에서 화자는 “영원과 하루가 나란하다”고 말하며, 영원을 하루의 시간 위에 “포개어둔다.” 이러한 이미지는 식전 기도를 준비하는 정갈한 장면과 겹쳐지며, 반복되는 일상의 시간 속에서 영원을 감각하게 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즉, 영원은 더 이상 도달해야 할 초월적 시간으로 제시되지 않고, 하루의 리듬 속에 나란히 놓이며 경험되는 감각으로 전환된다.
이어지는 (15)에서 화자는 “영원의 문 앞에 누워 영원을 향해 고해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러나 막 잠에서 깬 당신의 얼굴”을 알고 싶다고 진술한다. 지금까지 그토록 바랬던 ‘영원’이 앞에 있어도 그곳에 자신의 죄를 말함으로써 화해를 청할 수 있어도, 문장 속에서 이어졌던 미래는 접속 부사 ‘그러나’를 사용하며 반전시킨다. 결국 화자는 영원에 기대어 안식하려 하기보다, “당신의 등 위에 나의 끝을 대어”보며 오히려 지금껏 바래왔던 영원을 탈피하고, “영원한 시선으로 영원을 소거하기를”바라는 것이다.
결국 영원은 더 이상 육호수의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절대적인 시간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활과 맞닿아 기도 속에 스며들며, 앞선 악장에서의 천사와 소년처럼 소중한 대상으로 남아 있으나, 동시에 끝내 붙들 수 없는 것으로 전한된다. 화자는 영원에 기대어 안식하려 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소거하려는 시선을 통해 “당신과 나 사이”(지금⎯여기)의 감각을 붙잡는다. 이때 영원은 도달해야 할 목적이 아니라, 끝내 지워짐으로써만 현재성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역설적 장치로 남는다. 따라서 시집의 말미에서 드러나는 이 태도는, 영원을 향한 열망이 아니라 그것을 내려놓음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감각의 윤리라고 할 수 있다.
▶Postlude : 나오며
『영원 금지 소년 금지 천사 금지』를 따라 읽다 보면, 이 시집이 단순히 어떤 대상을 ‘금지’하는 선언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로부터 서서히 벗어나려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시집에서 반복되는 ‘소년’, ‘천사’, ‘영원’이라는 단어는 서로 다른 개념이라기보다 동일한 세계를 가리키는 상징들에 가깝다. 그것은 순수하고 이상적인 세계에 대한 이미지이며, 동시에 화자가 한때 기대했던 세계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집이 진행될수록 그러한 세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것, 혹은 현실과 충돌하며 균열을 드러내는 것으로 나타난다. 세계는 영원하지 않고, 천사처럼 순수하지도 않으며, 소년처럼 맑게 지속될 수도 없다는 사실이 점차 드러나기 때문이다.
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파라텍스트, 「순진한 의인화」(p.148)를 함께 보자. “마지막 동물원을 상상해 주”길 바란다는 문장으로 시작한 시편은 여러 동물들을 소환하여 동물원에 갇혀서 세상을 모르는⎯순수하고 순진하며 그래서 불완전한 그들에 대한 간절한 접근을 하고. 그들의 행복과 구원을 바라며, 또한 역설적으로 “누구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마지막 동물원을 네 손으로 허물”어 달라고 요청하는 시편이다. 이런 맥락을 함께하며 육호수의 노래를 정리해보자.
이 시집에서 ‘금지’라는 말은 어떤 대상을 단순히 거부하는 행위라기보다,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순수의 세계(순수한 동물들)를 스스로 포기하는 과정에 가깝다. 그 과정은 결코 단순하거나 가볍지 않다. 화자는 오랫동안 자신을 지탱해 온 세계와 감각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야 하며, 그 과정에서 기존의 언어와 감각, 그리고 자신이 기대했던 세계의 형상까지 하나씩 내려놓게 된다. 이러한 이탈의 과정은 시집의 구조 속에서도 드러난다. Prelude, Interlude, Postlude라는 음악적 형식은 시집 전체를 하나의 긴 흐름으로 조직하며, 마치 여러 악장을 거쳐 진행되는 음악처럼 화자의 내면이 점차 깊어지는 과정을 따라가게 만든다.
이때 ‘소년’, ‘천사’, ‘영원’이라는 단어의 배열이 각 부마다 달라지는 방식 역시 단순한 순차적 진행이라기보다, 동일한 세계를 서로 다른 각도에서 반복적으로 파고드는 움직임으로 읽힌다. 다시 말해 이 시집은 어떤 대상이 차례대로 금지되는 구조라기보다, 하나의 동일한 세계를 점차 더 깊은 층위에서 부정하고 벗어나려는 과정에 가깝다. 시집이 진행될수록 화자의 시선은 바깥을 향하기보다 점차 내면으로 침잠하며, 그 속에서 순수의 세계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영원 금지 소년 금지 천사 금지』는 순수한 세계에 대한 갈망과 그 불가능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시집이라고 할 수 있다. 한때 소년이 천사를 상상하며 영원을 꿈꾸었던 것처럼, 화자 역시 그러한 세계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집이 끝날 무렵, 그 세계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 시집이 ‘금지’를 반복하는 이유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그것은 순수의 세계를 향한 단순한 거부가 아니라,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세계를 스스로 내려놓는 긴 이탈의 과정이며, 그 과정을 따라가며 완성되는 하나의 길고 복잡한 노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