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구조 - 불안과 배제의 정치학
혐오의 뿌리는 불안정한 사회적 토대와 맞닿아 있다. 다시 말해 특정한 사회적 배경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결코 개인의 성격적 결함이나 도덕적 실패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오히려 혐오는 사회적 구조의 균열이 가장 직접적으로 인간들의 감정 속에 각인되는 방식이다.
사회가 불안정할수록, 경제적 기반이 흔들릴수록, 사람들은 서로에게 더 날카로운 선을 긋는다. 우리는 이 단순한 명제를 역사 속에서 무수히 확인해 왔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의 그림자 아래에서 유럽 사회는 극우 민족주의로 쏠렸고, 독일은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일본은 만주 침략과 제국주의 전쟁으로 불안을 돌파하려 했고, 한국의 식민지 민중은 내부에서 서로를 감시하는 구조 속으로 몰려들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혐오는 불황의 정동이 타자를 향해 응고된 정치적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적 불황은 마르크스가 지적했듯, 자본주의는 주기적으로 과잉생산과 불황의 위기를 맞는다. 이 위기 속에서 노동자는 일자리를 잃고, 생계는 불안해지며, 미래는 어둡게 가려진다.
혐오는 인간들의 감정 구조와 깊숙이 결탁하며 집단적 불안을 증폭시키고, 사회적 연대 대신 서로를 배제하고 응징하려는 충동을 강화한다. ‘그들’과 ‘우리’의 분리는 바로 이 불황의 정동 위에서 형성된다. 불황이 길어질수록, 실업이 일상화될수록, 미래가 불투명해질수록, 사람들은 자기 삶의 불안정을 외부의 원인으로 전가하고자 한다. 누군가를 구석으로 몰아내야 자신이 속한 집단이 안전할 것이라는 착시 속에서 강화된다.
정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즉 제도권 정치가 장기 불황을 타개할 의지와 역량을 보여주지 못할 때, 민중은 자신들의 불만과 요구를 관철할 통로를 잃는다. 그 통로의 결핍은 다시 정동의 빈자리를 낳는다.
인간은 자신의 능동적 힘이 축소되는 경험을 할 때 슬픔을 경험한다. 슬픔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인간의 코나투스, 즉 존재하려는 노력의 힘이 약화되는 경험이다. 스피노자의 정념론은 이 점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힘이 축소되는 경험은 정념을 변화시켜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무기력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이 슬픔이 장기간 지속되면 그것은 우울로 굳어지고, 다시 불안으로 진화한다. 이 불안은 언제든지 분노로 전환될 수 있는 폭발력을 내포한다.
한국 현대사의 사례를 보면 IMF 외환위기는 기업 구조조정과 실업률 급증의 문제에 그치지 않았다. 그 사건은 한 세대 전체의 정동을 바꿔놓았다. 수많은 가정이 파산했고, 중산층이라 여겼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하층으로 추락했다. 부모 세대는 ‘평생직장’이라는 믿음을 잃었고, 자녀 세대는 더 이상 미래가 밝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없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이 일상화되고, 청년 세대는 취업을 준비하며 수년간의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헬조선’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이 단어는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라, 구조적 불안이 청년 세대의 감정 속에 각인된 집합적 표현이었다.
이 불안은 곧 혐오의 형태로 표출되었다. 난민 수용을 둘러싼 혐오 시위, 여성에 대한 온라인 공격, 지역 차별과 계층 갈등은 모두 구조적 불안의 다른 얼굴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혐오가 단순히 개인들의 나약함이나 도덕적 실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제도권 정치의 무능과 불황의 지속이 빚어낸 구조적 산물이라는 점이다. 정치가 민중의 불안을 흡수하지 못하면, 그 불안은 사회 내부의 약자를 향한 응징으로 변형된다.
심리학은 이러한 과정을 미시적으로 설명한다. 어린 시절의 경험은 인간이 불안과 분노를 처리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친다. 부모라는 권위가 무능하거나 불공정할 때, 아이는 외부에서 새로운 권위가 나타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품는다. 사회적 맥락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존 정치가 무능할 때, 사람들은 새로운 정치 지도자에게 기대를 건다. 그러나 그 기대가 좌절되면, 분노는 타자에 대한 혐오로 변형된다. 난민이나 여성, 성소수자, 혹은 노동조합이 이 ‘희생양’의 역할을 떠맡는다.
문제는 여기서 분석이 멈추어버릴 때다. 혐오라는 단어 자체가 지나치게 강력한 흡인력을 갖는다. 많은 진단은 혐오가 위험하다고 경고하지만, 결국 ‘경제를 살려야 한다’, ‘혐오의 화살을 위로 돌려야 한다’, ‘계급의식을 회복해야 한다’는 고담준론으로 귀결된다. 물론 그 주장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혐오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물음 자체가 무력하기 때문이다. 혐오는 단순히 제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가 빚어낸 감정의 형식이다. 따라서 문제는 혐오 그 자체가 아니라, 혐오가 어떻게 정치적 구조와 맞물려 나타나는가를 묻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포퓰리즘을 향해 시선을 옮기게 된다. 혐오와 포퓰리즘은 닮아 있다. 둘 다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구조 위에서 작동한다. 혐오는 사회 내부의 약자를 구석으로 몰아내고, 포퓰리즘은 특정 집단을 ‘적’으로 지목한다. 두 현상 모두 불안정한 사회적 토대 위에서 증폭된다. 따라서 혐오를 이해하려면, 포퓰리즘을 이해해야 한다. 포퓰리즘이야말로 혐오를 정치적 언어로 번역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의 유동성 -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언어
오늘날 우리는 흔히 ‘포퓰리즘의 시대’라 말한다. 포퓰리즘이라는 말은 널리 쓰이면서도 동시에 모호한 개념은 드물 것이다. 그것은 모든 정치의 표면에 흔적을 남기지만, 동시에 어느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다. 재정 형편을 고려하지 않은 선심성 공약에도 포퓰리즘이라는 딱지가 붙고, 극우 정치인의 과격한 선동에도 포퓰리즘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때로는 진보의 거리 집회에도, 또 때로는 보수의 방송 발언에도 이 단어는 손쉽게 부착된다. 이처럼 모순적이고 중첩된 용례들은 포퓰리즘이 실체가 아니라 형식임을 드러낸다. 포퓰리즘은 고정된 내용이 아니라, 특정한 방식-즉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정치의 언어-로 작동한다.
정치학자 폴 태가트는 포퓰리즘의 본질을 유동성(liquidity)이라고 정의했다. 그것은 자유주의와 결합할 수도 있고, 사회주의와도 결합할 수 있으며, 극우 민족주의와도 손쉽게 연합할 수 있다. 포퓰리즘은 스스로의 고유한 이념적 토대를 갖지 않는다. 대신 인민이라는 추상적 이름을 끌어안고, 그것을 대항적 정동의 장으로 조직한다. 여기서 인민은 실체적 집단이 아니라, 언제나 구성되는 주체이다. 따라서 포퓰리즘은 ‘인민’을 둘러싼 상상적 구성을 매개로 등장하며, 그 구성의 핵심은 항상 “우리와 그들”의 경계 짓기다.
트럼프의 미국은 그 전형적인 사례다. 그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구호 아래, ‘진짜 미국인’과 ‘그들을 위협하는 외부자’를 구분했다. 이 외부자는 멕시코 불법 이민자이기도 했고, 자유무역을 통해 미국 노동자의 일자리를 빼앗는 중국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이기도 했다. 트럼프의 포퓰리즘은 국가 내부의 불안을 외부의 적으로 전가하며 결집했고,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제도적 견제 장치들은 무력화되었다. 그러나 그의 언어는 동시에 수많은 ‘잊힌 사람들’을 정치의 장으로 불러내는 효과를 발휘했다. 그 점에서 트럼프의 포퓰리즘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면서도, 민주주의의 빈자리를 드러내는 이중적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의 브렉시트 역시 포퓰리즘의 교과서적 장면이다. ‘브리튼의 주권 회복(Take Back Control)’이라는 구호는 단순한 정책적 제안이 아니었다. 그것은 유럽연합이라는 익명적 권위에 대한 반발이자, 불황과 이민 문제로 불안해진 영국 대중의 정동을 결집하는 언어였다. 여기서 ‘우리’는 영국 국민이고, ‘그들’은 유럽연합 관료와 이민자였다. 브렉시트는 합리적 계산이나 정책적 타당성보다, 주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감각적 긴급성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는 포퓰리즘이 이성보다 정동을 매개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프랑스의 마린 르펜은 포퓰리즘이 어떻게 혐오와 직결되는지를 드러낸다. 그녀는 이슬람 난민을 ‘프랑스의 문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타자’로 명명했고, ‘진짜 프랑스인’과 ‘가짜 프랑스인’을 구분하는 언어를 사용했다. 오르반이 헝가리에서, 살비니가 이탈리아에서 난민을 ‘국민의 안전과 일자리를 빼앗는 존재’로 몰아붙인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 모든 사례는 포퓰리즘이 혐오와 어떻게 겹쳐지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혐오가 사회 내부의 약자를 구석으로 몰아낸다면, 포퓰리즘은 정치적 적대를 구성하면서 ‘그들’을 배제한다. 두 현상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나 포퓰리즘은 단순히 배제의 정치만은 아니다. 라클라우와 무페는 포퓰리즘을 민주주의의 본질적 작동 방식으로 이해했다. 민주주의란 언제나 갈등과 균열의 장이며, 합의는 늘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실패가 아니라, 민주주의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현상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떤 언어와 기표를 중심으로 조직되는가이다.
여기서 헤게모니 개념이 다시 호출된다. 그람시가 말했듯, 지배는 억압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지배계급은 학교, 언론, 문화, 제도를 통해 특정한 ‘상식’을 만들어내고, 그 상식 속에서 지배가 정당화된다. 포퓰리즘은 바로 이 상식의 균열 지점에서 발생한다. 기존의 헤게모니가 민중의 요구를 수용하지 못할 때, 포퓰리즘은 새로운 ‘우리’와 ‘그들’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헤게모니 전쟁을 촉발한다.
따라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위기이면서 동시에 민주주의의 가능성이다. 그것은 혐오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으나, 혐오가 단순히 약자를 배제하는 감정이라면, 포퓰리즘은 그 감정을 정치적 언어로 조직하는 형식이다. 문제는 그 형식이 어떤 기표와 결합하느냐에 달려 있다. 트럼프에게 그것은 ‘미국 우선’이었고, 브렉시트에는 ‘주권 회복’이었으며, 르펜에게는 ‘프랑스의 안전’이었다. 그리고 오늘 한국 사회에서 그 기표는 바로 ‘공정’이다.
공정의 헤게모니 - 20대 포퓰리즘의 기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기표는 단연 ‘공정’이다. 공정이라는 단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가치처럼 들린다. 정치인도, 언론도, 거리의 시민도 모두 공정을 말한다. 그러나 바로 이 압도적 동의 속에 역설이 숨어 있다. 모두가 공정을 외치지만, 그 의미는 전혀 합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이에게 공정은 기회의 평등이고, 어떤 이에게는 역차별 거부이며, 또 다른 이에게는 차별 해소의 원리다. 따라서 공정은 단순한 가치가 아니라, 텅 빈 기표(empty signifier)다. 라클라우와 무페의 이론에 따르면, 텅 빈 기표는 서로 다른 정치적 요구가 자신을 담아내도록 열려 있는 그릇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공정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공정 담론은 적어도 두 갈래로 나뉜다.
첫째는 진보적 해석이다. 여기서 공정은 기회의 평등, 차별 해소, 사회적 약자에게 동등한 출발선을 보장하는 것이다. 성차별적 구조를 해소하거나, 장애인과 이주민에게 동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정책은 ‘공정의 실현’으로 정당화된다.
둘째는 보수적 해석이다. 여기서 공정은 경쟁의 룰을 지키는 것, 노력한 만큼 보상받는 것이다. 특정 집단이 혜택을 받는 것은 곧 불공정이다. 이때 공정은 능력주의와 결합하며, 노력과 성과가 곧 정의가 된다.
이 두 언어는 정면으로 충돌한다. 진보는 “차별 구조가 해소되어야 진정한 경쟁이 가능하다”라고 말한다. 보수는 “특정 집단에 대한 특혜야말로 불공정”이라고 반박한다. 따라서 공정은 중립적 언어가 아니라, 갈등을 매개하는 정치적 언어다.
김내훈은 『급진의 20대』에서 오늘날 청년 세대의 정치적 판단을 ‘공정감각’이라 명명했다. 여기서 핵심은 공정이 객관적 규범이 아니라, 체감되는 감각이라는 점이다. 청년들은 제도가 아무리 구조적 정의를 내세워도, 그것이 자신의 경험과 어긋나는 순간 ‘불공정’이라 느낀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이 2019년 인국공 사태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은 구조적으로는 불평등 완화 정책이었다. 그러나 많은 청년들은 분노했다. “우리는 수년간 취업 준비에 매달리는데, 어떤 집단은 시험도 없이 안정된 일자리를 얻는다”는 감각 때문이었다. 구조적 정의와 개인적 감각이 충돌하는 순간, 공정은 불공정으로 변모한다.
같은 해의 조국 사태도 그러했다.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자녀 입시 특혜 의혹은 청년들에게 거대한 배신으로 다가왔다. 제도 전체가 기득권에게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사실보다, “나는 부모 배경이 없어 고생하는데, 누군가는 특혜를 누린다”는 감각이 분노를 불렀다. 공정은 제도의 정의가 아니라, 삶의 감각에서 결정되는 것이었다.
이 갈등은 특히 젠더 문제에서 첨예하게 드러난다. 이른바 ‘이대남 현상’이라 불리는 20대 남성들의 정치적 분노는 공정을 중심으로 조직된다. 군 복무에 대한 보상 문제, 여성 우대 정책, 성평등 정책은 모두 ‘불공정’이라는 언어로 비판된다. 그들에게 공정은 역차별을 거부하는 언어다.
반면 20대 여성들은 여전히 공정을 성차별 구조 해소와 연결한다. 같은 세대 안에서도 공정은 전혀 다른 의미로 작동한다. 남성에게는 특혜 철폐이고, 여성에게는 차별 해소다. 이 간극은 세대 내부의 분열을 설명해 준다. 청년 세대는 하나의 집단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오히려 공정은 세대 내부를 쪼개는 언어다.
물론 해외에도 유사한 논쟁은 존재한다. 미국에서는 ‘meritocracy(능력주의)’ 논쟁이 치열하다. 하버드 입학에서 아시아계 학생이 차별받는다고 주장한 소송, 흑인·라틴계 학생을 위한 적극적 우대조치 논쟁은 모두
공정을 둘러싼 갈등이다. 프랑스에서도 평등주의 전통 속에서 이슬람 여성의 히잡 착용이 ‘공정한 시민권’의 문제로 비화되었다.
그러나 한국은 특수하다. 압축 성장과 불평등, 그리고 장기 불황 속 청년 좌절이 ‘공정’에 과도한 집착을 낳았다. 한국 청년에게 공정은 단순한 규범이 아니라, 삶을 버티는 마지막 희망의 언어다. 기회라도 공정하다면, 경쟁이라도 정당하다면, 그들은 견딜 수 있다. 그러나 그 공정이 배반되는 순간, 분노는 폭발한다.
공정이 이토록 강력한 정치적 힘을 가지는 이유는, 그것이 정동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정념론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능동적 힘이 방해받을 때 슬픔을 느끼고, 그 슬픔이 지속되면 우울과 불안이 된다. 오늘날 청년 세대의 삶이 바로 그러하다. 수년간 이어지는 취업 준비, 불안정한 일자리, 끝없이 오르는 집값은 청년들의 코나투스를 끊임없이 제약한다.
그러나 인간은 단순히 우울 속에 머물지 않는다. 불안과 우울은 언제든지 분노로 전환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추상적인 경제 구조보다는, 가까이 있는 타자에게 향하기 쉽다. 공정은 바로 이 과정을 정치적 언어로 번역한다. 청년들은 제도나 정책을 향해, 때로는 특정 집단을 향해, “불공정하다”는 말을 던진다. 이 명명은 단순한 감정 토로가 아니라, 개인적 좌절을 정치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행위다. 공정은 불안을 조직하는 언어이고, 분노를 제도화하는 매개다.
통계는 한국 청년들의 불안을 여실히 보여준다. OECD 국가 중 청년 자살률 1위, 20대의 정신 건강 지표 악화, N포세대라는 말이 상징하는 체념적 정동. 청년들은 스스로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구조적 장벽 앞에서 좌절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경쟁을 감내하는 이유는 단 하나, 기회만큼은 공정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이 기대가 무너질 때 분노는 폭발한다. 인국공 사태에서 청년들이 느낀 것은 ‘비정규직 전환’이 아니라, ‘기회의 불공정’이었다. 조국 사태에서 청년들이 격분한 것도 ‘입시 제도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는 부모의 배경으로 특혜를 누린다’는 체감이었다. 다시 말해, 구조적 정의와 체감 공정이 불일치할 때 청년들의 분노는 가장 거세게 분출된다.
이 때문에 공정은 단순한 가치가 아니라, 청년들이 정신적 생존을 위해 붙드는 마지막 언어다. 공정하지 않다면 경쟁은 버틸 수 없다. 따라서 공정은 곧 삶을 버텨내는 정동의 기표다.
청년들의 감각이 정치로 번역되는 순간, 공정은 헤게모니 전쟁의 중심이 된다.
진보 진영은 공정을 구조적 불평등 해소의 언어로 붙든다. 기회의 평등, 약자 보호, 제도 개혁은 공정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그러나 청년들의 체감 공정과 충돌할 때, 진보의 언어는 힘을 잃는다. 인국공 사태는 그 대표적 사례였다.
보수 진영은 공정을 역차별 거부와 능력주의의 언어로 포섭한다. “열심히 노력한 자가 보상받아야 한다”는 말, “특정 집단의 혜택은 불공정하다”는 주장은 청년들의 분노를 손쉽게 흡수한다. 특히 20대 남성의 정치적 이동은 공정을 매개로 설명할 수 있다. 좌파적 가치였던 공정은, 언제부턴가 우파 포퓰리즘의 무기로 전환되었다.
결국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는 공정을 둘러싼 헤게모니 전쟁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좌파가 공정을 차지하느냐, 우파가 장악하느냐에 따라 민주주의의 향방은 전혀 다르게 전개될 것이다.
공정이라는 기표는 고정되지 않았다. 그것은 좌파와 우파 모두가 쥐려는 전쟁터다. 좌파 포퓰리즘은 공정을 불평등 해소와 연대의 언어로 번역하려 한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사회 안전망 강화, 성차별 해소는 모두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이 청년들의 체감 공정과 어긋나는 순간, 좌파 포퓰리즘은 취약해진다. 인국공 사태에서 “구조적 정의”는 청년들의 “체감 불공정”에 밀려 힘을 잃었다.
반대로 우파 포퓰리즘은 공정을 능력주의와 역차별 거부의 언어로 쉽게 포섭한다. “노력한 만큼 보상받아야 한다”는 말, “특혜야말로 불공정”이라는 주장, “여성·이주민에 대한 가산점은 불공정하다”는 언설은 청년들의 분노를 빠르게 흡수한다. 특히 20대 남성의 정치적 보수화는 이 과정을 선명히 보여준다. 좌파가 오랫동안 독점한 듯 보였던 공정은, 어느 순간부터 우파 포퓰리즘의 기치가 되었다.
공정은 단순히 제도의 문제를 넘어, 정치적 상상력의 토대다.
만약 공정이 연대의 언어로 자리 잡는다면, 사회는 약자를 포용하며 불평등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공정이 응징의 언어로 고착된다면, 사회는 끝없는 혐오와 배제의 전쟁터가 될 것이다.
예컨대 “여성에게 가산점을 주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언설은 청년 남성의 분노를 조직할 수 있지만, 여성 청년이 여전히 겪는 구조적 차별을 은폐한다. 반대로 “성차별 해소가 진정한 공정이다”라는 언설은 여성의 경험을 대변하지만, 남성 청년에게는 역차별로 체감된다. 공정이 갈등을 메우기보다,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키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과제는 공정을 어떻게 재번역하느냐에 있다. 공정을 능력주의적 언어로만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체감 공정을 조율하고 제도화하는 민주주의적 장치로 바꿔야 한다. 바로 이것이 오늘 한국 사회가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이다.
그람시가 말했듯, 지배는 억압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지배는 일상 속 ‘상식’을 통해 지속된다. 오늘 한국 사회의 상식은 “공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상식이 어떤 의미로 굳어질 것인가이다. 좌파가 공정을 장악한다면, 공정은 연대와 평등의 언어로 굳어질 것이다. 우파가 장악한다면, 공정은 배제와 경쟁의 언어로 고착될 것이다.
이미 징후는 나타나고 있다. 청년들의 체감 공정이 우파의 언어와 더 쉽게 접속하면서, 공정은 응징의 기표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공정은 여전히 텅 빈 기표이고, 헤게모니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민주주의의 미래는 공정을 누가,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달려 있다.
결국 공정은 오늘 한국 민주주의의 결정적 전쟁터다. 청년들의 불안과 분노를 흡수하는 동시에, 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는 기표다. 문제는 그 가능성이 연대로 열릴 것인가, 아니면 응징으로 닫힐 것인가이다.
좌파가 공정을 재번역하지 못한다면, 한국 민주주의는 배제와 혐오의 언어 속으로 더욱 깊이 빠져들 것이다. 그러나 공정을 연대와 평등의 언어로 되살릴 수 있다면, 우리는 혐오 이후, 포퓰리즘 이후의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 따라서 과제는 명확하다. 공정을 단순한 경쟁의 언어로 두지 않고, 불평등 해소와 사회적 연대의 언어로 재구성하는 것. 이것이 오늘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헤게모니 전쟁이다.
혐오 이후, 포퓰리즘 이후
혐오는 불황과 불안 위에서 증폭된 정동이고, 포퓰리즘은 그 정동을 정치적 언어로 조직하는 형식이며, 공정은 오늘 한국에서 그 언어를 매개하는 가장 강력한 기표다. 문제는 혐오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혐오가 어떤 기표 속에서 어떤 헤게모니 질서로 재편되는가이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브렉시트의 ‘주권 회복’, 프랑스 극우의 ‘프랑스를 지키자’는 구호는 모두 혐오와 불안이 포퓰리즘의 언어로 재조직된 사례다. 한국의 20대에게서 그것은 ‘공정’이라는 단어로 나타났다. 따라서 질문은 ‘혐오를 없앨 수 있는가’가 아니라, ‘공정이라는 기표를 어떤 민주주의의 언어로 차지할 것인가’
이다.
샹탈 무페가 말했듯, 민주주의는 합리적 합의의 공간이 아니라 경합과 갈등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장이다. 따라서 우리는 혐오를 ‘위협’으로만 보지 않고, 그것이 드러내는 균열을 새로운 민주주의로 재편할 계기로 삼아야 한다. 포퓰리즘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괴물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다만 그것이 어디로 향할지는 오직 헤게모니 전쟁의 결과에 달려 있다.
참고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