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탈 무페의 좌파포퓰리즘 - 영화 런던프라이드

by 회색 유인원 시아





급진민주주의 ― 무페의 경합 정치와 대적자의 의미






민주주의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합의와 조화, 질서와 안정의 언어로 불려 왔다. 그것은 인류가 피와 눈물로 쟁취한 제도적 성취이며,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상을 가장 근본적으로 표상하는 말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단지 평온과 안정을 약속하는 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봉합되지 못한 균열을 드러내고, 쉽게 합의되지 않는 갈등을 낳으며, 차이를 지우지 않고 품어 안으면서 충돌을 생산하는 힘이기도 하다.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를 합의(consensus)의 정치로 배운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동력은 합의가 아니라 봉합되지 않는 경합(agon)이다. 합의는 평화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은 권력이 그려놓은 경계를 얇게 덮어놓은 막에 지나지 않는다. 샹탈 무페는 이 막을 찢어내고, 그 밑에 숨어 있는 정치적 진실을 직시하자고 요구한다. 그녀에게 정치란 언제나 “우리가-그들”의 경계를 그려내는 행위이며, 문제는 그 경계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달려 있다.


경계가 ‘적대(antagonism)’로만 고정되면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해체한다. 적대는 상대를 제거해야 할 존재로 만들고, 타자의 목소리를 침묵시키며, 그 제거 위에서만 우리의 정체성을 세운다고 믿는다. 반대로 경계가 ‘경합(agonism)’으로 조직된다면 민주주의는 갈등을 품으면서도 자멸하지 않고 살아남는다. 경합은 타자를 함께 살아가야 할 적수로 배치한다. 적수(adversary)란 내가 반드시 넘어야 할 타자이지만, 동시에 같은 규칙을 공유하는 동반자이기도 하다. 민주주의가 약동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경합의 공간이 열려 있어야 한다. 무페가 말하는 좌파 포퓰리즘은 바로 이 경합을 조직하는 기술이자 싸움의 규칙을 공유하는 태도다.

민주주의는 언제나 갈등을 잠재우는 제도가 아니라 갈등을 다루는 형식이다. 이 형식은 완성되거나 닫힌 것이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고 수정되는 살아 있는 과정이다. 실제로 민주주의를 살아 있게 하는 동력은 합의가 아니라, 차이를 억누르지 않은 채 봉합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경합(agon)이다.


영화 〈런던 프라이드〉는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대항 헤게모니적 공격이 어떻게 개시되는지를 심층적으로 보여준다. 이 영화는 사회적 갈등의 중심을 노동계급 같은 ‘특권화된 행위자’에게만 두지 않고, 동성애자 그룹을 통해 훨씬 더 다채롭고 이질적인 주체로 확장한다. 그리하여 무페와 라클라우가 말한 민주주의의 급진화라는 측면에서 해방의 기획을 새롭게 정식화한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장면은 목소리를 갖지 못한 이들이 ‘목소리’를 요구하는 순간이다. 조직화된 탄광 노동자들에 비해 성소수자 집단은 “우리에게 투표권은 있지만, 목소리는 없다”라는 구호를 외친다. 이 외침은 단지 제도적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를 급진화할 것을 요청하는 정치적 기표다. 이들의 시위는 더 넓고, 더 포괄적인 대의를 요구한다.

‘목소리’의 요구를 실질적으로 충족시키려면, 시민들에게 대안을 선택할 수 있는 경합적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현존하는 대의제도를 변환시키고 새로운 제도를 설립해야 한다. 단순한 중도적 합의가 아니라, 적대를 경합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제도적 경로를 개척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진정한 좌파 포퓰리즘이 필요하다. 그것은 의회 밖 투쟁과 의회 안 투쟁을 연결하고, 민주주의 제도를 급진화하며, 새로운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진지전’에 개입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무페는 민주주의 투쟁이 아무리 확장되고 급진화되더라도 ‘완전히 자유로운 사회’라는 종착지에 도달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경합적 정치 모델의 목표는 하나의 진실을 밝히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새로운 배치를 만들고 재조정하는 데 있다. 국가는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 모순과 긴장이 교차하는 관계망이며, 이 관계망을 민주적으로 통제할 때 사회의 상품화에 맞서는 다층적 가능성이 열린다. 그렇기에 오늘날 많은 시민들이 전통적 정당이 아닌 거리로 나서고 있다. 그들이 외치는 것은 기존 정치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못한다는 절박한 감각이다. 이제 포퓰리즘은 더 이상 ‘대중영합주의’라는 저널리즘적 비난으로만 환원될 수 없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가 직면한 구조적 위기 속에서 등장한 보편적 정치 현상이다. 포퓰리즘은 새로운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대중운동의 이름이며, 급진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정치적 장치로 작동한다.


〈런던 프라이드〉는 서로 다른 투쟁들을 어떻게 절합하고 결속시킬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라클라우의 개념에 따르면, 차이의 논리는 각각의 요구가 맥락 속에서 특수하게 형성되는 과정을 가리키고, 등가의 논리는 그 특수성을 일정 부분 내려놓고 공통의 속성을 강조함으로써 공동 정체성을 만드는 과정을 의미한다. 영화 속 두 손이 맞잡힌 깃발은 바로 이 과정을 시각적으로 상징한다. 그것은 이질적인 투쟁들이 하나의 사슬로 이어지며, 서로를 향한 연대의 손길로 변하는 순간을 응축한다.


무페는 여기서 더 나아가 헤게모니 개념을 정치의 핵심 도구로 다시 해석한다. 사회 질서는 언제나 권력관계들의 우연한 절합(contingent articulation) 위에서 세워진다. 따라서 사회란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우발적이고 잠정적인 실천들이 얽어낸 산물이다. 세계화의 현재 모습은 신자유주의적 헤게모니가 빚어낸 구성물일 뿐이며, 다른 권력 배치가 등장한다면 언제든 다른 현실이 형성될 수 있다.

이때 좌파가 직면한 과제는 명확하다. 페미니즘, 반인종주의, 성소수자 운동, 환경 운동 등 새로운 요구들을 전통적인 계급투쟁과 어떻게 접합할 것인가. 바로 여기서 라클라우와 무페는 등가사슬(chain of equivalence) 개념을 도입한다. 각 운동이 자기 특수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서로를 향한 공통의 ‘우리’라는 상징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런던 프라이드〉는 이 과정을 감각적으로 형상화한다. 광부와 성소수자라는 서로 다른 집단이 자신들의 특수성을 지우지 않은 채, “우리는 모두 억압받는 이들”이라는 더 큰 이름 아래 묶인다. 영화는 그 절합의 순간을 춤추는 몸짓, 행진하는 발걸음, 그리고 두 손이 맞잡힌 깃발 속에 담아낸다. 그것은 단순한 연대의 장면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적 ‘우리’를 창출하는 상징적 사건이다.




무페와 라클라우: 수행적 접합과 등가사슬의 정치




1. 대중은 주어진 실체가 아니다

우리는 ‘민중’, ‘국민’, ‘대중’이라는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사용한다. 여론조사에서 나타나는 통계 수치, 선거의 투표율, 시위 현장에 모인 사람들의 규모를 대중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라클라우와 무페가 가장 먼저 지적한 것은, 이 대중이라는 말이 결코 자연적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중은 사전에 주어진 집단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 속에서, 그리고 정치적 투쟁 속에서 수행적으로 구성되는 주체다. 다시 말해 대중이란 늘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건, 특정한 적대의 상황, 특정한 상징적 기표 속에서 생성되는 효과다.

라틴아메리카와 유럽의 다양한 사회운동을 관찰하며 라클라우와 무페는 공통된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대중’이 언제나 정치적 수행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가령 한 사회에서 노동자 파업이 벌어지고, 여성들이 거리에서 차별 철폐를 요구하고, 성소수자들이 혐오에 맞서 시위를 열 때, 그 각각의 요구들은 제각기 다른 역사를 가지고 시작된다. 그러나 특정한 순간, 이 요구들이 하나의 이름 아래 묶일 때가 있다. 그 이름은 ‘우리’다. 그 순간이 바로 대중이 구성되는 순간이다.

이때 결정적인 개념이 바로 접합(articulation)이다. 무페에게 접합은 정치적 주체 형성의 핵심 과정이다. 서로 다른 요구들(demands)이 하나의 사슬(chain of equivalence)로 묶이는 과정이 바로 접합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원래 이 요구들이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임금 인상 요구, 성차별 반대 요구, 주거권 보장 요구는 서로 다른 맥락에서 출발했지만, 정치적 투쟁 속에서 “공통의 적”에 맞서면서 하나의 ‘등가사슬’로 엮일 수 있다.


접합은 서로 다른 요구들이 하나의 사슬을 이루며 서로를 대체 가능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접합의 논리는 “A= B = C” 식의 완전한 동일화가 아니라, A, B, C가 “서로를 대신할 수 있는 표상”으로 기능하는 순간을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요구가 전체 연쇄를 대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각 요구는 자기 고유성을 완전히 잃지는 않는다. 만약 완전히 동일화된다면, 차이 자체가 사라지고 사슬은 무너지게 된다. 그래서 접합은 차이를 지운 동일화가 아니라, 차이를 유지한 채 등가성을 만들어내는 모순적 장치이다. 헤게모니는 이미 주어진 보편적 합의가 아니라, 끊임없는 접합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접합은 “대체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긴장” 위에 놓이게 된다. 요구들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하나의 이름 아래 묶일 때 특정 요구는 다른 요구들을 대표(represent)할 수 있고, 이는 곧 ‘대체 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대표성은 언제나 불안정하고 임시적이어서, 각 요구가 가진 고유성 때문에 완전히 대체 불가능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노동자의 임금 투쟁, 성소수자의 권리 요구, 여성의 존엄을 위한 요구, 이주민의 평등을 요구하는 목소리. 이 모든 것은 서로 다르고, 출발점도 다르며, 역사적 맥락도 다르다. 그러나 특정한 대적자를 상정하는 순간, 이 요구들은 서로 연결된다. 예컨대 신자유주의적 체제, 권위주의적 국가, 언론과 정치가 주도하는 혐오의 담론. 이 공통의 대적자를 향할 때, 각기 흩어져 있던 요구들은 하나의 등가사슬(chain of equivalence)로 이어진다.




2. 등가사슬 ― 차이를 지운 합일이 아니라, 차이를 남겨둔 연결


라클라우는 『포퓰리즘의 이성』에서 집합적 주체가 구성되는 메커니즘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그는 “포퓰리즘이란 특수한 정체성을 지닌 운동이 아니라, 이질적인 요구들이 하나의 사슬로 연결되며 ‘인민’이라는 이름을 만들어내는 정치적 논리”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쓴다. “각각의 개별적 요구는 특수화된 요구이지만, 동시에 등가적 연결을 통해 다른 요구들의 총체성을 가리킨다.” (Laclau, On Populist Reason, p. 93) 즉, 노동자의 임금 인상 요구, 여성의 존엄 요구, 성소수자의 권리 요구, 이주민의 평등 요구는 모두 출발점도 맥락도 다르지만, 특정한 대적자를 지정하는 순간 이 요구들은 하나의 등가사슬(chain of equivalence)로 이어지며 “우리”라는 이름 아래 묶인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비어 있는 기표(empty signifier)다. 라클라우는 특정한 기표가 그 자체로 단일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요구들을 대변할 수 있는 공허한 중심으로 기능할 때, 그것이 집합적 주체의 이름이 된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비어 있는 기표는 내용의 결여를 통해서만 전체를 대표할 수 있다. 그것은 결핍의 흔적이며, 동시에 등가사슬의 중심이다.” 다시 말해 “국민”이나 “민중”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다양한 요구들을 담아낼 수 있는 비어 있는 그릇이다. 이 그릇이 채워지는 방식은 언제나 정치적 접합의 과정이다.

따라서 집합적 주체는 결코 자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대적자의 거울 속에서만 탄생한다. 특정한 대적자를 지정하고, 그 대적자를 향해 이질적인 요구들이 연결될 때, “우리”라는 이름은 비로소 수행적으로 불려진다.


등가사슬(chain of equivalence)은 라클라우와 무페가 포퓰리즘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핵심 개념이다. 중요한 것은, 등가사슬이 모든 차이를 하나의 정체성 속에 지워버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각 요구는 자신의 특수성을 유지하면서도 다른 요구들과 연결된다. 노동자의 외침은 여전히 노동자의 자리에서 울린다. 여성의 요구도 여전히 그 자리에서 울린다. 그러나 그 두 목소리가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흘러가면, 우리는 그 순간부터 그것들을 하나의 흐름, 하나의 ‘우리’로 듣게 된다.

라클라우는 이렇게 말한다. “각각의 개별 요구는 특수화된 요구 그 자체이지만, 동시에 등가적 연결을 통해 다른 요구들의 총체성을 가리킨다.” 이 역설적 구조가 바로 포퓰리즘의 핵심이다. 포퓰리즘은 흔히 모든 차이를 하나의 동일성 속으로 빨아들이는 운동으로 오해되지만, 라클라우와 무페는 그것이 차이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남겨둔 채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내는 정치적 전략임을 강조한다.

영화 〈런던 프라이드〉가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 연결의 힘이다. 광부와 성소수자라는 전혀 다른 집단이 서로를 대신하거나 지우지 않고, 자신들의 요구를 그대로 유지한 채 나란히 선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들은 같은 깃발을 들고 행진한다. 깃발 속 맞잡은 두 손은 이 연결의 상징이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함께 서서 새로운 힘을 만들어내는 장면, 그것이 등가사슬이 만들어내는 정치적 기적이다.

하지만 이 연결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많은 목소리가 흩어져 있는 사회에서, 무엇이 이들을 한 줄로 묶어 주는가? 바로 공통의 대적자(adversary)의 등장이다. 누군가 혹은 어떤 구조가 ‘우리’를 가로막고, 우리의 삶을 위협한다고 느낄 때, 개별적인 요구들은 서로를 향해 열리고 하나의 사슬로 이어진다. 이 지점에서 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3. 대적자의 지정 ― ‘우리’와 ‘그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구분해야 할 두 가지 관계가 있다. 적(enemy)과 대적자(adversary). 무페는 『급진 민주주의를 위하여』에서 이를 명확히 구분한다. “적대는 상대를 완전히 부정하고 파괴해야 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적대를 견뎌낼 수 없다. 민주주의가 살아남으려면 적은 대적자로 전환되어야 한다.” (Laclau & Mouffe, Hegemony and Socialist Strategy, p. 137)

적은 설득이나 타협이 불가능하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위협이기에 반드시 배제하거나 파괴해야 한다. 이것이 적대(antagonism)의 논리다. 그러나 이 논리는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파괴한다. 상대를 제거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는 순간, 정치적 공간은 소멸하고 오직 전쟁터만 남는다.

반면 대적자는 함께 살아야 하는 상대다. 대적자는 내가 반드시 넘어야 할 존재이지만, 동시에 나와 같은 장(field) 안에서 규칙을 공유한다. 무페는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에서 이렇게 쓴다. “민주주의적 경합은 적을 대적자로 바꾸는 데서 시작한다. 대적자는 내가 싸워야 할 상대이지만, 동시에 함께 살아야 할 동반자다.” (Mouffe, For a Left Populism, p. 93)


등가사슬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적자(adversary)가 필요하다. 집합적 주체는 결코 먼저 주어진 실체가 아니라, 언제나 이런 경계 긋기 속에서 형성된다. 왜냐하면 특정한 적대의 선이 그어져야만 접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라클라우와 무페는 ‘우리’라는 집합적 주체가 형성되려면 반드시 ‘그들’이라는 타자가 지정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민주주의를 우리는 흔히 합의의 정치라고 배운다.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고, 끝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결론에 이르는 과정,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무페는 합의의 정치가 오히려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경고한다.『급진 민주주의를 위하여』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합의는 언제나 배제를 동반한다. 합의는 갈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은폐할 뿐이다. 은폐된 갈등은 다시 돌아온다.” (p. 138)


그러나 실제로 민주주의는 그렇게 평온하지 않다. 사회는 언제나 갈등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정치가 이 갈등을 보이지 않게 만들고 합의라는 이름으로 덮어버릴 때, 문제는 더 깊어진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억눌린 갈등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지하로 숨어 들어가 축적되고, 결국 폭발한다. 이 폭발은 혐오와 폭력, 극단주의의 형태로 나타난다. 민주주의가 살아 있으려면 갈등을 제도 속에 끌어들이고 규칙 안에서 부딪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갈등을 제거하는 체제가 아니라 갈등을 생산적 긴장으로 전환하는 체제다.


갈등이 사라진 민주주의는 죽은 민주주의다. 샹탈 무페가 꾸준히 강조해 온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그녀는 민주주의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갈등을 봉합하거나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 속에서 드러내고 다루며 생산적 긴장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 대적자(adversary)라는 존재다. 라클라우와 무페는 집합적 주체가 처음부터 주어진 실체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우리”라는 이름은 언제나 경계 긋기 속에서 형성된다. 특정한 대적자가 지정되는 순간, 흩어져 있던 요구들이 하나의 사슬로 묶이고 우리는 비로소 집합적 주체로 탄생한다. 이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그들은 등가사슬(chain of equivalence)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요구를 가지고 있다. 노동자의 임금 인상 요구, 성소수자의 권리 요구, 주거권 보장 요구 등은 처음에는 서로 무관해 보인다. 그러나 어떤 공통의 대적자가 지정되는 순간, 이 요구들은 하나로 이어진다. 대적자가 거울이 되어 흩어진 목소리를 묶어내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규칙을 공유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경기다. 민주주의를 살아 있게 만드는 힘은 합의가 아니라 경합이다. 무페가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적대를 경합(agonism)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경합 속에서 타자는 더 이상 파괴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내가 넘어야 할 대적자로 변한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상대를 없애는 데 있지 않고, 함께 규칙을 공유한 채 끝없이 부딪히는 데 있다. 대적자는 나와 같은 장(field) 안에서 규칙을 공유하는 경쟁자이며, 그들의 존재는 내가 스스로를 더 날카롭게 다듬고 정치적 요구를 더 분명히 하도록 만든다. 다시 말해 대적자는 우리가 싸워야 하는 상대이지만, 동시에 함께 살아야 하는 동반자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적자가 ‘우리’를 형성하는 거울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특정한 대적자를 지정하는 순간, 흩어져 있던 요구들이 하나의 사슬로 이어지고 ‘우리’라는 이름이 탄생한다.


아곤(agon)은 고대 그리스어로 경기, 경쟁, 싸움을 뜻한다. 무페는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은유가 바로 이 아곤이라고 말한다. 민주주의는 끝없는 경기와 같다. 상대는 내가 반드시 넘어야 할 존재이지만, 그들과 함께 규칙을 공유하기 때문에 우리는 같은 장 안에 서 있을 수 있다.


이 지점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놀이와 스포츠의 은유를 떠올려 볼 수 있다. 민주주의는 종종 축구 경기와 닮아 있다. 상대팀은 분명히 내가 반드시 넘어야 할 대적자다. 그들은 내게 전략을 세우고, 훈련을 거듭하게 만드는 존재다. 만약 그들을 없애야 할 적으로 규정한다면, 경기는 성립할 수 없다. 상대팀이 사라진다면 승리도 패배도 없는 무의미한 운동장만 남는다. 축구 경기에서 중요한 것은 공유된 규칙이다. 손으로 공을 잡을 수 없다는 규칙, 반칙은 페널티로 이어진다는 규칙, 승패는 골 수로 결정된다는 규칙이 있기에 우리는 치열하게 맞붙으면서도 같은 경기장을 공유한다. 상대팀은 나를 위협하면서도 나를 성장시키는 거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경기를 가능하게 한다. 민주주의의 정치란 바로 이와 같다. 갈등은 파괴의 이유가 아니라, 정치라는 경기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아이들의 술래잡기 역시 마찬가지다. 술래는 분명히 상대지만, 술래가 없다면 게임은 시작되지 않는다. 술래의 존재가 아이들을 더 빠르고 더 창의적으로 움직이게 한다. 술래와의 대결은 제거가 아니라 놀이의 조건이다. 민주주의에서 대적자는 바로 술래와 같다. 그들이 있어야만 우리는 달릴 수 있고, 숨을 수 있고, “우리”라는 이름으로 엮일 수 있다.


무페는 합의의 정치가 오히려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경고한다.『급진 민주주의를 위하여』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합의는 언제나 배제를 동반한다. 합의는 갈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은폐할 뿐이다. 은폐된 갈등은 다시 돌아온다.” (p. 138)

사회는 언제나 갈등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정치가 이 갈등을 보이지 않게 만들고 합의라는 이름으로 덮어버릴 때, 문제는 더 깊어진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억눌린 갈등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지하로 숨어 들어가 축적되고, 결국 폭발한다. 이 폭발은 혐오와 폭력, 극단주의의 형태로 나타난다. 민주주의가 살아 있으려면 갈등을 제도 속에 끌어들이고 규칙 안에서 부딪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갈등을 제거하는 체제가 아니라 갈등을 생산적 긴장으로 전환하는 체제다.


이 과정을 영화 〈런던 프라이드〉는 생생하게 보여준다. 1980년대 영국, 대처 정부는 대규모 탄광 폐쇄 정책을 추진하며 광부들의 삶을 무너뜨렸다. 광부들은 생존권을 걸고 파업에 돌입했지만 정부는 경찰을 투입해 강경 진압했고, 언론은 그들을 범죄자처럼 몰아세웠다. 광부들은 고립되었다. 광부들이 투쟁의 역사적 과정을 통해 구축했던 사회민주주의적 토대와 환경은 급기야 해체되고 만다. 이때 런던의 게이와 레즈비언 청년들이 손을 내민다. 그들은 TV 속에서 경찰에 맞아 쓰러지는 광부들의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저들은 지금 우리처럼 박해받고 있다.” 이 순간, 전혀 다른 두 집단의 요구는 하나의 사슬로 이어졌다.


광부와 성소수자의 요구가 서로 연결될 수 있었던 이유는, 공통의 대적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대처 정부의 강압적 정책, 경찰 폭력, 언론의 혐오 프레임이라는 동일한 적대 상황과 맞서야 했다. 바로 이 공통의 대적자를 상정하는 순간, 서로 다른 투쟁은 하나의 등가사슬로 묶이며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거듭난다.

그들을 묶은 것은 공통의 대적자였다. 대처 정부, 경찰의 폭력, 혐오적인 언론이 바로 그것이다. 공통의 대적자를 지정하는 순간, 두 집단은 하나의 “우리”로 거듭났다. 광부와 성소수자의 연대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등가사슬의 구체적 작동이었다.


〈런던 프라이드〉의 장면처럼, 서로 다른 집단이 공통의 대적자를 지정하는 순간 흩어진 요구들은 하나의 사슬로 묶이고 새로운 정치적 주체가 탄생한다.


대의제의 근본적 한계로부터 표출되는 포퓰리즘의 정치적 현상을 계기로 삼아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이 적대-경합의 전환이 필수적이다. 대적자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 다시 말해 갈등이 보이지 않도록 ‘합의’로 덮어버리는 사회는 탈정치화의 위험에 빠진다. 억압된 갈등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지하로 숨어 축적되고, 결국 폭발한다. 무페는 바로 이런 이유로 합의의 정치가 아니라, 대적자를 인정하고 그와 지속적으로 경합하는 정치가 민주주의를 살아 있게 만든다고 말한다.





4. 정동의 정치학 ― 감정은 정치의 연료다


등가사슬의 연결은 언제나 이성적 합의의 결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숫자나 통계, 논리나 사실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감각의 떨림이며, 몸을 일으켜 거리에 서게 하는 힘은 정동(affect)의 차원에서 작동한다.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정동은 다른 정동에 의해서만 대체된다. 불안은 더 큰 불안으로만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더 큰 희망, 더 깊은 기쁨, 더 강한 연대감으로만 극복된다. 혐오 또한 더 큰 혐오로는 이길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더 큰 긍정의 정동, 더 넓은 공감의 감응으로 녹아내릴 때 사라진다.

좌파 포퓰리즘의 전략은 바로 이 정동의 장을 새롭게 조율하는 데 있다. 사실이 울림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 사실이 울림을 가질 수 있는 정동적 토양이 필요하다. 정치란 결국 이 정동의 토양을 바꾸는 일, 다시 말해 감정의 구조를 바꾸는 정동적 작업이다.


영화 〈런던 프라이드〉는 이 정동의 변화를 시각적이고 감각적으로 증언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런던의 게이·레즈비언 청년들이 처음 웨일스의 탄광 마을에 들어섰을 때, 그들 사이에는 어색함과 거리감이 있었다. 그러나 마을회관의 춤추는 밤,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웃는 얼굴들 사이에서 긴장과 경계가 조금씩 풀려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 마을 사람들과 성소수자들이 같은 깃발 아래에서 행진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이성적 합의의 결과가 아니라 감각적 울림의 결속이었다.

행진의 발걸음은 리듬을 만들고, 북소리와 구호가 그 리듬을 따라 울려 퍼진다. 깃발은 바람에 흔들리며 시각적 상징이 되고, 손을 맞잡는 제스처는 몸을 통해 전해지는 연대의 감각으로 각인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리듬이 곧 정동이다. 정동은 두려움을 넘어설 용기를, 혐오를 뚫고 나올 희망을, 패배감을 견딜 수 있는 존엄을 낳는다.


정동은 몸과 몸이 만나 서로를 흔드는 힘이다. 라클라우와 무페가 말한 등가사슬이 현실에서 작동하려면, 바로 이 정동의 불꽃이 필요하다. 차가운 사실은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발걸음과 노래와 깃발은 마음을 데우고, 그 마음은 새로운 ‘우리’로 다시 태어난다. 결국 정치란 감정을 설득하는 작업이자, 감정의 지형을 새롭게 재배치하는 일이다. 좌파 포퓰리즘은 차이를 억누르지 않고 연결하며, 그 연결 위에 더 강한 정동을 쌓는다. 흩어진 요구들이 하나의 울림으로 모이고, 서로 다른 몸들이 같은 리듬으로 움직일 때,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이 생성된다.

정동이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지만, 그것이 오래 지속되기 위해서는 언어가 필요하다. 감각의 울림은 강렬하지만 순간적이다. 행진의 리듬과 깃발의 바람, 구호의 메아리는 한순간 사람들을 하나로 묶지만, 그 에너지가 이어지기 위해서는 그것을 붙잡아 줄 말, 기호, 상징이 필요하다. 바로 여기서 언어의 정치가 시작된다.

정동이 몸을 흔들고 마음을 연다면, 언어는 그 정동을 붙잡아 지속시키는 힘이다. 깃발에 새겨진 문장, ‘연대’라는 구호, ‘민주주의’라는 말은 그날의 열기와 울림을 다음 날로, 다음 세대로 이어지게 한다. 정동이 언어와 만나는 순간, 정치적 절합은 비로소 형태를 얻는다. 감각의 힘이 상징의 힘으로 바뀌며, 흩어질 수 있는 에너지가 하나의 이름, 하나의 기표 아래 모인다. 그래서 라클라우는 언어의 정치적 힘을 설명하기 위해 ‘빈 기표(empty signifier)’라는 개념을 꺼내든다.





5. 언어와 기표 ― 빈 기표의 힘


라클라우는 언어의 정치적 힘을 ‘빈 기표’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민주주의, 정의, 자유, 평등 ― 이 단어들은 단단히 고정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비어 있음 덕분에 각기 다른 요구들이 자신들의 의미를 담아 넣을 수 있다.

‘민주주의’라는 말은 한 사회에서는 노동자의 요구를 담을 수 있고, 또 다른 맥락에서는 여성의 해방, 성소수자의 권리, 이주민의 평등을 담을 수도 있다. 이런 단어가 다양한 목소리를 담는 그릇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완전히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클라우에게 빈 기표는 결핍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의미가 고정되지 않았기에 더 많은 요구들이 그 안에 자신들의 색을 덧입힐 수 있다. 이렇게 비어 있는 기표는 하나의 공통된 깃발처럼 작동하며, 서로 다른 투쟁을 모으는 중심점이 된다.

〈런던 프라이드〉에서 흔들리는 깃발이 바로 그 상징이다. ‘연대’라는 말 역시 비어 있는 기표로 기능한다. 연대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맥락마다 다르지만, 그 비어 있음 덕분에 광부와 성소수자, 여성, 청년이 같은 구호 아래 설 수 있다.

정치적 절합은 이 빈 기표를 중심으로 새로운 등가사슬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어떤 단어를 중심으로 삼을 것인지, 어떤 의미로 채워 넣을 것인지는 정치적 투쟁의 한복판에서 결정된다. ‘민주주의’, ‘정의’, ‘자유’ 같은 말이 끊임없이 다투어지고 다시 쓰이는 이유는, 그 의미가 비어 있기 때문이다. 의미가 비어 있기에, 그 단어를 둘러싼 채우기와 해석의 싸움이 곧 정치의 장이 된다.

정치란 이 빈 기표를 둘러싼 끝없는 채우기와 비우기의 과정이다. ‘우리’의 이름은 언제나 잠정적이고 불안정하며, 그 불안정성 속에서만 살아 있다. 그렇기에 민주주의는 완결된 체제가 아니라, 언제나 새롭게 쓰이는 서사다.




6. 민주주의의 끌개 ― 합의가 아니라 경합


무페가 비판한 것은 ‘합의(consensus)의 정치’였다. 많은 정치학자들이 민주주의를 모든 차이가 봉합된 평온한 합의의 체제로 이해했지만, 무페는 오히려 그것이 민주주의의 죽음이라고 말한다. 민주주의는 차이가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차이와 갈등이 끊임없이 부딪히고 다시 조율되는 살아 있는 장이다.

갈등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야말로 가장 위험하다. 합의는 종종 탈정치화의 다른 이름이 된다. 제도 속에서 다뤄지지 못한 갈등은 지하로 숨어 응집되고, 어느 순간 폭발적 분노로 터져 나온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살아 있으려면 갈등을 덮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야 한다. 건강한 민주주의는 평온한 표면이 아니라, 표면 아래의 갈등이 숨 쉬는 공간이다. 그 공간은 늘 열려 있어야 하며, 새로운 요구와 목소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계속 갱신되어야 한다.

이것이 무페가 말한 민주주의의 역동성이다. 민주주의는 완성된 제도가 아니라, 끊임없이 다시 쓰이는 과정이며, 매번 새로운 갈등이 등장할 때마다 우리는 다시 ‘우리’와 ‘그들’의 경계를 새로 그려야 한다. 정치란 이 경계 긋기의 반복 속에서만 살아 있는 예술이다.


포퓰리즘은 바로 이 경합의 힘, 즉 민주주의의 ‘끌개(attractor)’다. 그것은 차이를 지우지 않고, 다름을 끌어안은 채 함께 싸울 수 있는 자리로 우리를 이끈다. 접합은 결코 한 번으로 완결되지 않는다. 새로운 요구가 등장할 때마다 사슬은 다시 엮이고, 새로운 ‘우리’가 태어난다.

결국 민주주의는 합의의 정지가 아니라, 경합의 운동이다. 그것은 늘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이며, 각기 다른 목소리들이 모여 서로의 차이를 인정한 채 공존하는 열린 장이다.


정리하자면,

대중은 주어진 실체가 아니라, 정치적 절합 속에서 수행적으로 구성된다.

등가사슬은 차이를 억압하지 않고, 차이를 남겨둔 채 연결을 만들어낸다.

민주주의는 합의가 아니라 경합이며, 열린 갈등 속에서만 존재한다.

정동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접합을 가능하게 하는 에너지다.


정치는 끊임없이 새로운 접합을 시도하는 예술이다. 그 예술은 완성되지 않는다. 절합은 언제나 잠정적이며, 다시 흩어질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잠정성이 민주주의의 생명이다. 민주주의는 닫힌 합의가 아니라, 열려 있는 절합 속에서만 살아 있다.






알튀세르의 우발성, 고대의 빗방울이 비껴드는 순간

세계는 한 번도 필연의 얼굴로 우리 앞에 나타난 적이 없다. 우리가 역사를 기억할 때, 그것을 하나의 원인에서 다른 결과로 이어지는 직선적 연쇄로 그리려는 습관은, 사실 사건의 본래적 질감을 가리고 덮어버리는 얇은 도식에 불과하다. 알튀세르는 후기 사유에서 이렇게 말한다. 역사의 구조 자체가 본질적으로 우발적 사건들의 응결이라는 것이다.

구조는 단단한 얼음판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얼음은 한때 비가 떨어지고, 그 빗물이 얼어붙은 흔적일 뿐이다. 사건은 흐름이고, 구조는 그 흐름이 얼어붙은 순간의 정지된 형상이다. 그리고 균열이 생기는 순간, 얼음은 녹아 다시금 물이 되어 흘러간다. 구조는 결코 영원한 법칙이 아니라, 잠시 응결된 사건의 응고물이다.




고대의 편향 ― 클리나멘의 사유


이 사유의 기원은 고대 원자론의 우화에서 시작된다.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는 ‘클리나멘(clinamen)’, 즉 원자의 미세한 비껴듦을 말했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원자들이 만약 항상 직선으로만 하강한다면, 세계는 영원히 평행한 흐름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가끔,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하게 벗겨진다. 이 벗겨듦이 충돌을 낳고, 충돌이 결합을 낳으며, 그 결합이 곧 세계를 형성한다.

세계의 존재론적 조건은 바로 이 비껴듦의 사건이다. 알튀세르는 이 고대의 사유를 현대적으로 되살려, 역사를 필연의 연쇄로 읽으려는 습관을 깨뜨린다. 역사는 벗겨듦의 연속이며, 사회는 그 벗겨듦이 응결된 순간의 얼음판일 뿐이다.




구조의 해빙 ― 필연의 신화를 녹이다


구조주의가 세계를 설명하려 한 방식은 ‘항상-이미 존재하는 법칙성’이었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묻는다.
그렇다면 그 구조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구조의 기원은 필연으로 설명될 수 없다. 필연은 자기 자신을 무한으로 가정하기 때문이다. 기원을 설명하려는 순간, 우리는 다시 사건을 호출해야 한다. 구조의 기원은 필연이 아니라 사건이다. 그러므로 구조는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없다. 구조는 언제나 우발적 사건의 응결물이다.

겉으로는 견고해 보이지만, 구조의 내면에는 언제든 다시 녹아내릴 수 있는 미세한 열이 잠복해 있다. 알튀세르에게 우발성이란 바로 이 ‘해빙의 에너지’다. 얼음판이 태양 아래서 미세하게 녹아내리듯, 역사의 구조 또한 사건의 열기에 의해 끊임없이 해빙된다.




우발성의 윤리 ― 가능성의 문을 여는 태도


우발성을 받아들이는 일은 세계를 대하는 윤리의 태도이기도 하다. 우리는 흔히 필연의 언어에 기대려 한다. 왜냐하면 안정을 주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은 불안을 가라앉힌다. 그러나 그 믿음은 동시에 가능성의 문을 닫게한다.

만약 모든 것이 필연이라면,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알튀세르가 말한 우발성은 바로 이 문을 다시 연다. 세계는 달라질 수 있다. 사건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한순간의 편향, 한 번의 비껴듦이 우발적 사건들의 연쇄를 만들어 낸다.


빗방울의 정치학 ― 절합의 순간


알튀세르의 빗방울을 정치의 장으로 옮겨보면. 서로 교차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요구들이, 미세한 편향 하나로 충돌하고, 그 충돌이 절합의 가능성을 연다. 정치적 절합은 그렇게 ‘사건’이 된다.

노동의 요구와 성소수자의 요구, 여성의 요구와 이주민의 요구는 애초에 동일한 구조 안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저건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감각의 전환이 일어날 때, 빗방울은 서로를 비껴들며 부딪친다. 그 충돌의 순간이 곧 절합(articulation)이다.

절합은 우발적이다. 그러나 그 우발성 속에 정치의 본질이 있다. 대중은 이미 주어진 실체가 아니라, 이러한 우발적 절합 속에서 수행적으로 생성된다. 대중은 통계적 범주가 아니라, 언제나 새롭게 만들어지는 사건이다. 대중은 고정된 집단이 아니라, 감응과 마주침의 현장이다.




감각의 우발성 ― 작은 변화의 정치


또한 우발성은 추상적인 가능성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감각의 층위에서 가장 먼저 드러난다. 작은 사건 하나가 우리의 감각을 전환한다. 정치는 감각의 미세한 변위에서 시작된다. 감각이 바뀌면 문장이 바뀌고, 문장이 바뀌면 관계가 바뀌며, 관계가 바뀌면 구조가 변한다. 이 연쇄는 결코 위대한 필연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미세한 비껴듦의 연쇄다. 알튀세르가 말하는 구조의 변동은 바로 이 감각의 균열에서 비롯된다.



필연의 허상, 우발성의 힘


권력은 말한다. “이 길밖에 없다.” 그러나 알튀세르의 사유에 따르면 이 길은 언제나 다른 길로 비껴들 수 있다고. 다른 길은 이미 존재하지만, 필연의 언어가 그것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우발성은 숨겨진 가능성을 드러내는 힘이다. 그것은 저항의 기원이기도하다. 우발성을 부정하는 순간, 우리는 권력의 언어에 포획된다. 그러나 우발성을 긍정하는 순간, 우리는 저항의 가능성을 회복할 수 있다. 저항은 필연을 우발성으로 해체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리하여 알튀세르의 철학은 저항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의 우연을 되찾는 일


신자유주의적 헤게모니는 삶의 조건을 끊임없이 재편하며, 인간의 시간을 시장의 언어로 환산한다. 임금과 시간표, 주거와 이동, 돌봄과 교육, 심지어 질병과 죽음까지도 가격의 단어로 번역된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 사이의 느슨한 연대의 섬유는 하나씩 끊겨나간다.

이 끊김의 반복은 개인을 ‘선택의 주체’로 과잉 표상하면서도, 동시에 ‘청취의 대상’에서는 배제한다. 시장에서의 선택이 곧 자유라는 명제가 사회 전체를 관통할 때, 선택할 소득도, 시간도, 공간도 갖지 못한 이들은 통계의 뒷면으로 밀려난다.

영화 〈런던 프라이드〉는 바로 이 밀려남의 풍경을 보여준다. 정동의 결핍이 어떻게 정치적 무력감을 낳는지를, 그리고 그 결핍을 돌려세우는 길이 어떻게 좌파 포퓰리즘과 기술이 재구성되는지를 인물들의 몸짓으로 증언한다.

한때 떨어진 빗방울들이 서로를 비껴들며 부딪칠 때, 그 충돌의 순간이 다시금 세계를 바꾼다. 정치는 그 순간을 기다리는 예술이다. 그리고 알튀세르의 철학은, 그 예술의 이름을 우발성이라 부른다.







런던 프라이드: 우발성과 공동투쟁의 언어



영화 〈런던 프라이드〉는 대처리즘의 한복판에서, ‘노동 계급’이라는 전통적 투쟁 주체의 경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1984년, 영국 정부는 광산 폐쇄를 단행하며 수십만 노동자의 삶을 무너뜨렸고, 경찰과 언론은 노조를 범죄 집단처럼 몰아세웠다. 사회는 두려움과 냉소로 얼어붙었지만, 바로 그 억압의 순간에 뜻밖의 손길이 내밀어진다. 런던의 게이와 레즈비언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광부들은 지금 우리처럼 박해받고 있다”는 직관에서 출발했다. 자신들의 투쟁을 타인의 고통으로 확장하며, 그들은 연대의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냈다.
이 만남은 억압의 구조를 감각적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공동의 문제로 전환하는 ‘우발적 사건’이었다.



이 영화가 철학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사회적 갈등의 무대를 ‘노동’이라는 전통적 구도 안에 가두지 않고, 성소수자 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집단의 투쟁으로 확장한다는 데 있다.
무페와 라클라우가 말했듯, 민주주의는 완결된 합의가 아니라 끊임없는 경합과 재절합의 과정 속에서만 살아 있다. 광부와 성소수자의 만남은 바로 그 재절합의 장면이다. 서로 다른 욕망, 다른 언어, 다른 상처를 가진 행위자들이 일시적으로 접속하고, 그 접속의 마찰 속에서 새로운 ‘우리’가 생성된다.

〈런던 프라이드〉는 바로 그 ‘우발적 접속’이 어떻게 대항헤게모니의 가능성을 열어젖히는지를 정교하게 보여준다.




거리에서 시작된 연대


1984년 6월 30일, 런던 게이 프라이드 행진을 마치고 마크는 말한다.

“대처가 광부를 싫어하잖아. 우리가 연대의식을 보여주자.”

“우리가 잠깐 자유를 만끽하는 동안에 방향을 틀었어. 경찰이 이제 광부들을 괴롭히고 있어. 우리한테 했던 짓을 그들에게 하고 있어.”

경찰과 언론은 오랫동안 성소수자를 표적으로 삼아 폭력을 일삼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폭력의 방향이 바뀌었다. 이 인식에서 시작된 모금운동은, 연대가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억압 구조에 대한 공통된 자각임을 보여준다.

연대란 타인의 고통을 ‘내 문제’로 느끼는 감응의 윤리이자, 우발성이 정치로 변하는 첫 번째 장면이다.




불편한 만남과 열림의 시작


그러나 전국광산노조는 처음엔 이들의 도움을 거절한다.
게이와 레즈비언에게 돈을 받는 것은 모욕이라는 이유였다.

그럼에도 LGSM(Lesbians and Gays Support the Miners)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웨일스의 작은 탄광 마을 둘 라이스에 직접 연락했고, 우연히 전화를 받은 노파의 따뜻한 목소리가 연대의 문을 연다. 그렇게 낯선 두 집단은 처음으로 마주 앉는다. 우발성은 이렇게 예고 없이 찾아온다. 역사는 필연의 곡선이 아니라, 작은 편향과 예기치 못한 마주침의 흔들림 속에서 열린다. 그 흔들림이, 새로운 정치적 감응의 서막이다.




낯섦을 견디는 민주주의


둘 라이스의 다이 도노반은 런던에서 LGSM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솔직히 말한다.
“티 났을 테니 안 놀란 척하진 않을게요. 솔직히 말하면 저 게이 처음 봐요.”

이에 마크가 웃으며 답한다.
“전 광부 처음 봤어요.”

짧은 대화 속에서 낯섦은 부정되지 않는다.

인정된다. 그리고 그 인정이 관계의 시작이 된다.


며칠 뒤, 다이는 마을 사람들을 대표해 런던의 클럽 무대에서 성소수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마을 복지관 안에는 백 년이 넘은 현수막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특별한 날이면 꺼내는 그 현수막에는 두 개의 손이 맞잡고 있는 그림이 새겨져 있습니다."

“노동 운동이란 그런 거예요. 서로를 지지하는 것. 당신이 누구든, 어디서 왔든, 어깨를 맞대고 손을 맞잡아야 해요.”

“당신들이 우리에게 준 건 돈 그 이상입니다. 바로 우정이죠. 전쟁을 치를 때, 당신보다 강한 상대를 만난 상황에서 있는 줄도 몰랐던 지원군을 만난다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 겁니다. 그러니 감사합니다.”

다이의 연설은 연대가 단순히 재정적 지원이 아니라 ‘존재의 인정’임을 말해준다.

이 장면은 영화 전체의 윤리적 축이다.

긴장감과 불편함 속에서도, 서로를 향해 손을 내미는 순간 민주주의는 살아난다.
민주주의란 불화를 제거하는 체제가 아니라, 불화 속에서 서로를 견디며 함께 머무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깃발과 손


다이가 말한 그 현수막, 두 손이 맞잡힌 그림은 영화의 모든 장면을 관통하는 은유다.
성소수자들의 구호, “우리에게 투표권은 있지만, 목소리는 없다”는 외침이 광부들의 연설과 교차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목소리를 발화할 수 있는 감각의 공간임이 드러난다.

그 깃발 속의 두 손은 바로 대항헤게모니의 형상이다.
그것은 결합의 완결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시 절합되고 재편되는 ‘만남의 과정’이다.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놓지 않는다. 그렇게 민주주의는 ‘완전한 일치’가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는 ‘비껴듦의 연대’로 살아남는다.

마크는 다이에게 말한다.

“게이들의 권리는 주장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권리는 지지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면서도, 여성의 권리는 지지하지 않는다면요? 그건, 비논리적인 거죠.”


그의 말은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요구하는 직접적인 언어이다. 권리는 나의 것이면서 동시에 타인의 것이어야 한다. 특정한 요구만을 특권 화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스스로 모순에 빠진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권리에는 예민하면서도 타인의 권리에는 무감하다. 어떤 이는 적극적으로 반대하기까지 한다. 마크는 이 모순을 ‘비논리적’이라 명명했다. 민주주의의 급진화란 바로 이 비논리성을 해체하는 것, 권리의 편파적 울타리를 부수고 이질적인 권리들을 등가사슬 속에 접합하는 일이다.

영화는 광부들이 성소수자들의 바(bar)에 와서 춤추는 장면, 성소수자들이 광부들의 마을에서 함께 연설하는 장면, 그리고 서로의 파티에 초대되는 장면들을 통해, 불화와 긴장을 넘어서는 불완전하지만 진실한 연대를 보여준다. 다름을 지운 동질성이 아니라, 다름을 끝까지 인정하는 경합의 정치다.




무페와 라클라우- 등가 사슬의 정치


샹탈 무페에 따르면, 헤게모니란 합리적 토대 위에 세워진 질서가 아니라, 언제나 우발적으로 형성된 권력관계들의 임시적 절합이다.
어떤 사회도 완결된 합의를 통해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는 늘 권력의 배치, 즉 특정한 관계들이 잠시 고정된 결과일 뿐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역시 이런 헤게모니의 산물이다. 따라서 좌파의 과제는 과거의 계급투쟁을 넘어, 페미니즘·반인종주의·성소수자·환경운동 등 서로 다른 요구들을 하나의 등가 사슬(chain of equivalence) 로 엮어내는 것이다. 이 사슬은 동일성의 강요가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함께 싸우는 연대의 언어다.


영화 〈런던 프라이드〉는 그 등가 사슬이 어떻게 현실 속에서 작동하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게이와 레즈비언, 그리고 광부들의 요구는 다르지만, 그들은 신자유주의적 억압이라는 공통의 적 앞에서 서로를 향해 손을 내민다.
이 절합은 동정이나 일시적 연대가 아니라, 새로운 헤게모니를 창출하는 정치적 사건이었다.

영화 속 연대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서로의 손을 맞잡는 행위다.
상대가 누구든, 어디서 왔든. 깃발 속 두 손은 완전하지 않지만, 민주주의는 언제나 그 떨리는 손 위에서 다시 쓰인다.




역사적 맥락과 잔존하는 의미


1984년 3월부터 1985년 3월까지 이어진 영국 광부 파업은 전후 유럽에서 가장 치열했던 노동 투쟁 중 하나였다. 대처 정부는 석탄 산업을 ‘사양 산업’으로 규정하고 폐쇄를 강행했으며, 경찰 병력을 총동원해 파업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1년 가까이 이어진 투쟁은 결국 패배로 끝났고, 수많은 탄광 마을은 폐허가 되었으며 공동체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그 패배의 역사 속에서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이 태어났다.

광부들과 성소수자들이 만들어낸 연대는 단순한 패배의 서사로 남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실패의 틈새에서 민주주의의 새로운 형식, 즉 다원적 주체들이 함께 싸우는 급진적 민주주의의 가능성이 발아했다.



LGSM(Lesbians and Gays Support the Miners)은 파업이 끝난 뒤에도 영국의 성소수자 운동 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들이 보여준 연대는 이후 1980년대 후반 노동당의 성소수자 권리 수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다시 말해, 광부들과 함께 들었던 그 깃발은 한 시대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제도적 민주주의의 경로를 실제로 바꾸어 놓은 사건이었다.

이것이 바로 무페와 라클라우가 말한 ‘진지전(war of position)’ 의 구체적 모습이다. 의회 밖에서의 투쟁은 의회 안에서의 제도 변화를 촉발했고, 경합의 정치 모델이 현실 속에서 작동한 것이다.


무페의 말대로, 민주주의는 결코 완결된 지점에 도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불완전한 과정 속에서도 접합과 재절합은 새로운 길을 연다. 광부 파업의 패배는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의 공고화를 의미했지만, 동시에 성소수자와 노동자, 페미니스트와 반인종주의 운동이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었던 기억은 잔존한다. 그 잔존은 하나의 반딧불처럼 지금-여기에서도 깜빡이며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연대의 확장 ― 성소수자와 노동자의 공동투쟁


<런던 프라이드>는 실화를 바탕으로, 성소수자와 광부들의 연대가 어떻게 공동투쟁으로 발전하는지를 보여준다. 처음 그들은 교집합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질적인 집단이었다. 그러나 차이를 인정하는 유머, 깃발의 상징, 정동의 교류를 통해 그들은 서로의 세계를 조금씩 열었다.
그리고 이질적인 요구들은 어느새 하나의 등가 사슬로 묶였다. 광부들의 시위 현장에 성소수자들이 깃발을 들고 함께 서고, 성소수자들의 퍼레이드에 광부들이 맨 앞줄을 지키는 장면은 그 자체로 상징적이다.

한쪽에서 손을 내밀자, 다른 쪽에서 손을 잡는다. 그 단순한 제스처 속에서 공동투쟁의 언어가 형성된다.

이 장면들은 연대가 어떻게 감정과 몸의 경험을 통해 재구성되는가를 보여준다.
연대는 의식의 문제이기 이전에, 감각과 정동의 문제다.
즉, 서로의 고통을 인식하는 순간이 아니라, 서로의 떨림을 느끼는 순간에 비로소 시작된다.




신자유주의와 대항 헤게모니


〈런던 프라이드〉는 신자유주의적 헤게모니에 맞선 대항헤게모니적 개입의 실제 과정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사회적 갈등을 ‘노동계급’이라는 특권화된 행위자에게만 집중하지 않고, 성소수자라는 주변부의 행위자들을 통해 투쟁의 지형을 확장한다.
이것이 바로 무페와 라클라우가 말한 민주주의의 급진화가 구체화되는 지점이다. 조직화된 탄광노동자들과 달리, 성소수자들은 이렇게 외친다.

“우리에겐 투표권은 있지만, 목소리는 없다.”

이 문장은 민주주의 급진화의 핵심 요구를 압축한다. 해방은 결코 하나의 특권적 주체가 독점할 수 있는 몫이 아니다. 진정한 해방은 서로 다른 주체들이 등가의 관계 속에서 차이를 유지한 채 만들어내는 집합적 사건이다. 따라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시위는 노동자와 성소수자의 연대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목소리’를 회복하기 위한 공동의 정치적 기획이며, 기존 제도를 변형시키고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내는 경합적 정치의 장으로 확장된다.

중도적 합의가 굳어진 정치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 그것이 바로 무페가 말한 좌파 포퓰리즘의 새로운 경로다.
이 경로는 적대를 폭력적으로 억누르지 않는다. 대신, 경합을 제도 안으로 들여와 공존 가능한 긴장으로 전환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를 살아 있는 정치로 만드는 길이다.

〈런던 프라이드〉는 정치는 언제나 불완전한 접합 위에서, 흔들리며 존재한다고. 그러나 바로 그 흔들림 속에서만 새로운 민주주의는 다시 태어난다. 라고 말한다.

두 손이 맞잡힌 깃발 아래, 우발성과 연대의 정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행렬 백 년의 깃발과 무지개의 깃발


1985년, 파업은 패배했다. 그러나 런던 프라이드 행진에서 광부 노조는 맨 앞줄에 섰다. 백 년의 역사를 지닌 깃발이 무지개의 깃발과 나란히 흔들렸다. 다이가 말했던 문장이 현실이 되었다.

“뜻밖의 지원군을 만난다면, 온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든다.”

연대란 손을 맞잡는 것이다. 상대방이 누구든, 어디에서 왔든. 이 손잡음은 패배 이후에도 패배할 수 없는 정치의 언어였다. 민주주의는 승리의 기록이 아니라, 경합과 접속의 흔적 속에서 살아남는 감정의 공동체다.



우발성과 열린 민주주의


〈런던 프라이드〉는 우발성과 접합의 정치가 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을 어떻게 여는지를 증언한다. 카페에서의 짧은 대화“ 난 태어나서 게이를 처음 본다.” “우리도 광부를 처음 본다.”는 차이를 고백하는 낯섦의 언어가 다리가 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그것이 곧 민주주의의 첫 문장이다.

다이의 깃발 연설은 언어가 새로운 주체를 호출하는 힘을 증명했고, 조너선의 춤은 정동이 혐오를 무너뜨리는 힘임을 보여주었다. 춤은 논리보다 빠르고, 언어보다 넓은 곳에서 감각의 질서를 바꾼다.

그는 웃음과 몸짓으로 마을의 공기를 바꾸었고, 마을 사람들의 손끝에 남은 떨림이 서서히 마음을 녹였다.


이 모든 사건은 신자유주의적 헤게모니에 균열을 내며,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로 확장된다. 민주주의는 언제나 우발적이고, 불완전하며, 바로 그 불완전성 속에서만 살아남는다.

〈런던 프라이드〉의 세계에서 연대는 이상이 아니라, 억압의 동일한 체험에서 비롯된 감응의 정치다.

그 감응이 확장되며, 민주주의는 제도의 틀을 넘어 급진화의 목소리로 다시 태어난다.


민주주의는 언제나 우발적이다. 예정된 합의도, 완결된 서사도 없다. 그것은 불완전하고 흔들리며, 바로 그 불완전성 속에서만 살아남는다. 우리는 언제, 누구와 손을 맞잡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손을 맞잡는 순간, 역사는 다시 쓰인다.
우발성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역사는 필연의 곡선이 아니라, 작은 편향과 예기치 못한 마주침의 흔들림 속에서 열린다.


대처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압박은 공동체를 갈라놓았고, 마을은 침묵과 절망 속에 얼어붙어 갔다.
그러나 런던의 어느 좁은 방, 텔레비전 화면 앞에서 마크라는 청년은 경찰 방패에 찍혀 쓰러지는 노동자를 보았다.

“저건 우리가 겪은 것과 다르지 않아.”

마크의 이 대사는 이질적인 것들의 궤도를 비껴 겹치게 만드는 클리나멘, 즉 알튀세르가 말했던 미세한 빗겨듦의 순간이었다. 성소수자와 광부, 도시와 시골, 섹슈얼리티와 노동 ―교집합이라곤 하나도 없던 세계들이 서로를 향해 고개를 드는 그 찰나. 그것이 바로 우발성의 정치가 태어나는 자리, 민주주의가 다시 시작되는 그 미세한 흔들림의 순간이었다.



코뮌적 운동과 소비에트적 운동: 생산–재생산–생활세계 정동의 전환


어색함이 가득한 웨일스의 커뮤니티 홀에서, 배우 출신 조너선이 몸을 던지며 춤을 춘다. 음악과 함께 펼쳐진 디스코의 리듬. 여성들은 환호한다. 머뭇거리던 남성들조차 박수를 친다. 웃음과 환호, 몸짓의 전염은 정동의 정치학이다. 스피노자가 말했듯, 정동은 더 강한 정동에 의해서만 대체된다. 불안과 혐오는 환희와 리듬의 정동에 밀려났다.


노동운동의 역사를 되짚을 때, 우리는 거대한 공장의 굴뚝과 수천 명의 노동자가 집단적으로 움직이는 장면, 동일한 생산현장에서 동일한 요구를 외치며 하나의 계급적 힘을 구축하는 장면들을 떠올리기 쉽다. 소비에트는 분명히 20세기 산업자본주의의 심장부에서 혁명적 에너지를 발휘했다. 그러나 이 모델은 동시에 하나의 한계를 드러냈다. 그것은 노동을 오직 생산의 차원에만 국한시켰다는 점이다. 노동은 공장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삶은 생산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돌봄, 양육, 식사, 교육, 축제, 휴식, 돌봄의 반복과 문화적 창조, 이 모든 것은 생산만큼이나 필수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의 장을 형성한다.


영화 런던프라이드에서 우리는 또 다른 정치적 형식, 코뮌적 운동을 마주한다. 코뮌은 소비에트의 대체물이 아니라, 그것이 미처 포섭하지 못한 생활세계의 차원을 정치로 끌어들이는 형식이다. 코뮌은 부엌과 광장, 거실과 회관, 아이들의 배움과 노인들의 이야기가 얽혀 있는 공간 속에서 성립한다. 소비에트가 ‘어디서 생산할 것인가’의 질문에 답했다면, 코뮌은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의 질문에 답한다.



노동운동 - 생산과정에 기반한 계급의 동일성 정치


노동 운동은 산업화의 심장에서 탄생했다. 동일한 생산공정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조직되면서, 그들은 공장이라는 공간과 생산이라는 경험을 공유했다. 동일성은 강력한 무기였다. 동일한 임금 삭감, 동일한 노동조건, 동일한 억압을 경험하는 이들은 그 동일성을 바탕으로 하나의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했다.


이 동일성은 강력한 집중력을 발휘했다. 노동 운동은 속도와 힘을 가진다. 노동자들은 단결했고, 단결은 파업으로, 파업은 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동일성의 힘은 동시에 배제의 구조를 낳았다. 공장의 노동자는 포함되지만, 공장 밖에서 노동을 이어가는 수많은 이들은 주변부로 밀려났다. 여성의 가사노동, 농민의 재생산 노동, 공동체가 수행하는 상호부조는 정치의 중심에서 소외되었다.



코뮌적 운동 - 재생산과 생활세계의 정치


코뮌적 운동은 이러한 소외에 대한 대답이다. 코뮌은 공장 내부가 아니라, 생활세계 전체를 정치의 장으로 끌어올린다. 부엌에서 밥을 짓는 일, 아이를 돌보는 일, 이웃과 음식을 나누는 일, 공동체 회관에서 토론하고 춤추는 일. 이러한 모든 활동들이 코뮌의 정치다. 코뮌은 생산과 재생산을 구분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은 생산과 재생산의 총체로 이루어지며, 정치는 그 총체를 다루어야 한다.


코뮌은 이질성을 억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질성을 기반으로 한다. 공장에서의 동일성의 조건은 계급적 힘을 만들었지만, 코뮌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자리에서 서로 다른 일을 하면서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식을 만들어낸다. 코뮌의 힘은 동일성에서 나오지 않고, 접속성에서 나온다. 돌봄과 교육, 축제와 노동, 예술과 저항이 서로 접속하면서 하나의 정치적 장이 형성된다.



‘빵과 장미’ ― 생존과 존엄의 이중 요구


코뮌적 운동을 가장 잘 설명하는 상징 중 하나가 ‘빵과 장미’다. 노동자들은 단순히 빵만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장미를 요구했다. 빵은 생존의 상징이다. 그러나 장미는 문화와 존엄, 삶의 감각을 지키려는 요구다. 빵과 장미는 분리되지 않는다. 빵이 없는 장미는 공허하고, 장미 없는 빵은 모멸적이다.


코뮌은 바로 이 이중 요구를 현실화하는 정치적 장치다. 부엌에서 나누어진 음식, 공동체 홀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 함께 꾸린 축제와 의례는 삶의 존엄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정치 행위다.


1968 혁명과 공동투쟁의 언어


이러한 코뮌의 감각은 1968년, 이른바 ‘68 혁명’의 현장에서 새롭게 확인된 바 있다. 그때 거리와 광장에서 울려 퍼진 구호들은 생산 영역에서의 임금 투쟁을 넘어, 삶 전체를 변혁하려는 요구였다. 학생, 여성, 성소수자, 예술가, 이주민이 함께 모여 외쳤던 구호 속에서 “노동자의 투쟁”과 “삶의 정치”는 분리되지 않았다. 그것은 공장과 대학, 부엌과 거리에서 동시에 울려 퍼진 하나의 공동투쟁이었다.


‘공동투쟁’이라는 현장의 언어는 코뮌적 운동의 윤리를 함축한다. 그것은 동일한 요구로 단일화된 투쟁이 아니라, 서로 다른 요구들이 등가사슬 속에서 연결되어 하나의 장을 만들어내는 투쟁이다. 공동투쟁은 곧 접합의 정치학이 코뮌적 역동성 안에서 구현된 이름이다.



신자유주의와 코뮌의 정동


신자유주의 체제는 사람들의 정동을 조율한다. 불안, 경쟁, 고립, 자기 책임의 압박. 이 정동은 공기처럼 퍼져나가 사람들의 삶을 잠식한다. 코뮌적 운동은 이 공기를 바꾸는 힘이다. 공동식탁에서 나누는 음식, 마을회관에서 함께 부르는 노래, 서로의 아이를 돌보는 손길. 이 사소해 보이는 행위들이 불안과 고립의 정동을 해체하고, 대신 우정과 존엄, 상호부조의 정동을 확산시킨다.


코뮌은 공동체의 아름다운 이상이 아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적 정동을 무력화하는 대항 정동의 장치가 될 수 있다. 사람은 공기를 통해 살아간다. 코뮌은 그 공기를 바꾸어낸다. 공기가 달라지면, 사람들의 문장이 달라지고, 문장이 달라지면, 세계가 달라진다.


미학과 정치의 결합


코뮌적 운동은 필연적으로 미학을 동반한다. 축제의 색, 노래의 울림, 춤의 리듬, 회관 벽에 걸린 오래된 깃발. 이 모든 것들은 코뮌의 정치적 힘을 미학적 감각 속에서 구체화한다. 삶의 감각을 재구성하는 장치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미학과 정치가 분리될 수 없음을 본다. 삶의 감각을 바꾸지 않고는, 정치를 바꿀 수 없다. 코뮌은 바로 이 지점을 드러낸다. 코뮌은 빵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코뮌은 장미를 함께 요구한다. 그것은 삶을 지탱하는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과, 삶을 존엄하게 만드는 감각적 조건을 동시에 확보하려는 운동이다.



코뮌의 윤리


노동 운동과 코뮌적 운동은 대립이 아니라, 서로 다른 차원의 정치를 보여준다. 노동운동은 계급의 동학과 집중의 속도를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코뮌은 이질성과 접속하는 잠재력, 열림과 확산의 지속을 가르쳐준다. 노동운동이 생산과정의 정치라면, 코뮌은 재생산 과정의 정치다.


오늘날 민주주의가 위기를 겪는 이유 중 하나는, 생활세계의 재생산 과정이 정치적 삶으로써의 기반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치는 여전히 의회체제와 국가의 질서 하에서만 논의되지만, 실제로 사람들의 삶은 부엌과 학교, 속에서 무너져가고 있다. 코뮌적운동은 이 간극을 메운다. 그것은 정치가 우리의 호흡, 우리의 공기, 우리의 감각 속에서 작동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