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 프레이저와 프리다 칼로-포식의 문명과 분할된 세계

포식하는 자본주의,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에 선 자화상을 바탕으로

by 회색 유인원 시아








낸시 프레이저와 라엘예기 <포식하는 자본주의>, 프리다 칼로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선 위에 서 있는 자화상>으로 본 분할된 세계





“자본주의는 외부의 세계를 정복함으로써 성장하는 문명이 아니라, 자신을 지탱하던 기반을 갉아먹음으로써 연명하는 체계다.

그것은 스스로를 먹어치우며 유지되는, 가장 정교한 형태의 자기 포식적 존재론이다.”



벨벳 커튼이 드리워진 고급 레스토랑의 홀, 그 중앙의 원탁에 자본이 앉아 있다. 대리석 테이블 위로 노동의 땀으로 빚어진 빵이 놓이고, 자연의 숨결이 숙성된 포도주가 잔에 비친다. 돌봄의 손길이 만든 접시 위에는 공동체의 기억이 얹혀 있고, 조명은 은밀히 그것을 비춘다.
자본은 칼과 포크를 들고 천천히, 예의 바르게, 우아한 손놀림으로 그러나 끝내 잔혹하게 모든 것을 삼킨다.

식탁 위의 모든 재료는 우리의 시간과 몸, 자연의 순환과 관계의 결실이지만 그 자리에 초대된 손님은 단 한 명, 자본 자신뿐이다. 그는 먹고, 마시고, 다시 먹는다.
그리고 남은 것은 포만이 아니라, 텅 빈 접시와 가난해진 숨결이다.


낸시 프레이저는 이 문명의 이름을 ‘식인 자본주의(cannibal capitalism)’라 부른다.

그녀에게 자본주의는 인간과 비인간, 생산과 재생산, 전경과 배경의 경계를 교묘히 분리해 놓은 거대한 사회 질서다. 그 질서의 핵심에는 “먹는 자와 먹히는 자”의 관계가 놓여 있으며, 이 관계는 언제나 예의의 형식을 두르고, 문명의 포크를 든 채 미식의 이름으로 포식을 수행한다.


그는 외부를 확장하지 않는다. 대신 자기 내부의 살을 절단하고, 그것을 연료로 삼는다.

이제 인간의 몸은 분리되고 절단되어, 상품의 표면 위에서만 재조립된다.


프레이저는 『포식하는 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 사회는 자연에 의존해 경제를 만들면서, 둘을 존재론적으로 분할한다.”라 말한다.


프레이저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더 이상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삶 전체를 먹이로 삼는 문명적 시스템이다.


낸시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사적 소유, 시장 교환, 임금 노동의 체계를 넘어,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비경제적 기반들을 포식하는 질서다."

그 기반이란 바로 사회적 재생산, 생태계, 정치권력, 인종화된 수탈, 그리고 팬데믹 이후의 위기다.
이 다섯 영역은 자본이 없이는 버틸 수 없는 토대이지만, 동시에 자본이 가장 잔혹하게 무시하고 착취하는 ‘보이지 않는 배경’이기도 하다.


‘먹히는 세계의 초상’을 그려낸다. ‘포식하는 자본주의’는 자신의 꼬리를 삼키며 스스로를 유지하려는 우로보스의 형상과 같다.

자본은 노동을 착취할 뿐 아니라, 그 노동을 가능케 한 돌봄과 자연, 제도와 감정, 그리고 인간의 존엄까지 삼켜버리는 자기 포식(self-cannibalizing)의 문명—프레이저는 이 사회를 “자기 자신을 먹는 사회”라 부르며, 이제 그 식탁 위에는 더 이상 남은 음식이 없다고 경고한다.

그 식탁 위에는 오직 자신을 갉아먹는 손아귀만이 남아 있다.


또한, 자본주의는 더 이상 외부를 정복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지탱하던 조건들을 하나씩 삼키며, 서서히 자기 자신의 기반을 먹어치우는 체계로 변했다.
이 체계는 생산을 통해 성장하지만, 그 생산을 가능케 하는 사회적·자연적·정치적·정동적 토대들을 동시에 소모한다.
낸시 프레이저가 말하듯, “자본은 노동과 관계를 맺을 뿐 아니라, 자연과도 관계를 맺으며, 그 관계는 식인적이고 추출적인 관계다.” 이것이 포식하는 자본주의의 진정한 구조다.

표면적으로 이 체계는 완벽한 순환을 이루는 것 처럼 보인다.
노동은 임금으로 보상되고, 상품은 시장에서 유통되며, 정치는 조율의 장으로, 자연은 자원의 형태로 계산된다. 그러나 그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은 순환이 아니라 붕괴의 반복이다.
자본은 축적을 위해 재생산을 필요로 하지만, 그 재생산의 기반—돌봄, 생태, 공동체, 인간의 감정—을 끊임없이 갉아먹으며 돌아간다.

요약하면 자본주의의 진짜 운동은 성장의 가면을 쓴 자기 포식인셈이다.

자본은 더 이상 먹을 외부가 남지 않은 상태에서도 스스로의 근육과 혈관을 태워 연명하는 내향적 포식 시스템이다. 그리하여 이 체계의 시간은 자기 살을 뜯어먹는 원형의 회귀로 변한다.
그 안에서 생산은 생명에서 분리되고, 경제는 자연과 분리되고, 정치는 윤리로부터 분리된다.
자본은 모든 관계를 끊으며 유지된다.
그 고립의 구조 속에서, 인간은 더 이상 주체가 아니라 소모의 경로가 된다.

이것이 프레이저가 말한 “경제 외적 기둥들”의 침식이다.
자본은 자신이 서 있는 사회적·자연적 토대를 무시하고, 그것을 무상한 것으로, ‘비용이 제로인 듯’ 취급한다.
그리하여 돌봄은 사라지고, 자연은 침묵하며, 정치는 기술이 되고, 감정은 데이터가 된다.
이 모든 비경제적 영역이 포식의 대상으로 전락할 때, 문명은 더 이상 세계를 유지하지 못한다.

자본주의는 이제 자기 조건을 파괴함으로써만 유지되는 문명, 즉 “자기-포식적 자기-유지(self-cannibalizing self-preservation)”의 역설이 되었다.

이 끔찍한 효율성 속에서 세계는 점점 더 빈약해지고, 생명의 순환은 점점 더 가벼워진다.
그것은 더 이상 살아 있는 유기체가 아니라, 죽은 재생산의 반복이다.


“우리는 무엇에게 먹히고 있는가?”






사회적 재생산의 포식: 돌봄의 얼굴과 상품의 그림자




“시초 축적과 꼭 마찬가지로, 사회적 재생산은 상품 생산의 필수 배경조건이다.”


모든 문명체계는 자신의 존립을 가능케 하는 외부 조건을 비가시화함으로써 작동한다.

이러한 ‘의존의 비가시화’는 문명의 자기지속을 위한 기능적 망각이며, 근대 자본주의는 이 망각을 체계적으로 제도화한 최초의 사회형태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담론은 사회적·자연적 기반을 배제한 채 경제를 자율적 영역으로 구성함으로써, 자신의 토대를 끊임없이 지워내는 자기은폐적 체계(self-effacing system) 로 기능한다.


보이지 않는 노동, 가족과 공동체의 내면에서 반복되는 돌봄의 행위들 - 자본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토대다. 이 세계는 직접적인 이윤을 창출하지 않지만, 그 이윤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주는 조건이다. 이 조건의 이름이 바로 사회적 재생산(social reproduction)이다.

낸시 프레이저는 자본주의를 자본은 사회적 재생산을 전제하면서도, 동시에 그 가치를 체계적으로 부정한다고 진단한다.
경제는 사회가 자신을 떠받쳐 주기를 바라지만, 그 사회를 결코 회계의 장부 속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리하여 사회적 재생산은 ‘경제 외부’로 밀려나고, 경제는 자기의 기반을 ‘제로 비용’으로 착각한 채 무한히 팽창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의 위태로움, 바로 그것이 자본주의의 첫 번째 모순이다.


“사회적 재생산과 상품 생산의 분리는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중심을 이룬다.”


자본은 이 분리를 통해 작동한다.

생산은 공장에서, 재생산은 가정에서 이루어진다. 공장은 임금을 주고 노동을 사고팔지만, 가정은 무급으로 노동을 제공한다. 그런데 공장과 가정은 결코 떨어져 있지 않다.

공장의 노동자는 집에서 회복하고, 그 회복의 조건이 다음날의 노동력을 가능하게 한다.

이 순환이 무너지면, 경제 전체는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은 이 순환의 절반을 ‘비경제적 영역’이라 부르며 투명하게 지워버린다. 그리하여 사회적 재생산은 자본의 내부이면서 외부, 가시적이면서 비가시적인 이중적 그림자로 남는다.


이 그림자의 중심에는 돌봄(care)이 있다.
돌봄은 인간의 존재 방식이자,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가장 근원적인 감각이다. 아기를 품고, 노인을 간호하고, 아픈 이를 돌보는 행위. 이 모든 행위는 경제학적으로 ‘비생산적’이라 불리지만, 실상 그것 없이는 사회 그 자체가 존속할 수 없다.


마사 누스바움에 따르면, 인간의 존엄은 “의존과 상호의존의 인식 위에 세워진다.”
그러나 자본은 의존을 수치로 바꾸지 못하기에, 그것을 ‘사적 감정’으로 밀어낸다.
자본주의의 세계에서 사랑은 공짜여야 한다. 그래야 돌봄의 노동을 무한히 착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은 역사적으로 사회적 재생산의 중심에 위치해 왔으나, 그 자리는 언제나 경제적 비가시성 속에 가려졌다. 그녀의 시간, 그녀의 피로, 그녀의 감정은 시장 바깥의 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그 시장이 굴러가게 하는 것은 바로 여성의 노동이었다.

자본주의의 여성화된 노동, 곧 ‘사랑의 이름으로 착취되는 노동’이 식인 자본주의의 첫 번째 식탁을 차린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연에 의존해 경제를 만들면서, 둘을 존재론적으로 분할한다.”


이 문장은 자연을 말하지만, 동시에 여성의 존재를 의미하기도 한다. 여성과 자연은 자본주의 체계 안에서 동일한 언어로 취급된다. 왜냐하면, 둘 다 ‘무한히 제공 가능한 자원’, ‘스스로 회복하는 존재’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돌봄의 비극이다.
사랑의 감정으로 포장된 노동은 언제나 스스로를 소모하는 윤리 속에 갇힌다. '슈퍼우먼' ‘좋은 엄마’, ‘헌신적인 간병인’, ‘마음 따뜻한 교사’라는 표상은 자본주의가 돌봄의 노동을 정당화하는 장치다. 그리하여 돌봄은 사회의 도덕적 기반인 동시에, 경제의 침묵된 연료가 된다.


프레이저는 『포식하는 자본주의』에서 이 돌봄의 위기를 ‘위기 복합체(crisis complex)’의 핵심으로 제시한다. 경제 위기, 생태 위기, 정치 위기, 인종 위기—이 모든 위기의 공통된 근원에는 돌봄의 붕괴가 있다.
돌봄이 무너지면 사회의 재생산이 불가능해지고, 그 재생산이 무너지면 생산의 토대 자체가 흔들린다.
이 악순환은 자본주의가 더 이상 외부를 가지지 못한 시점, 즉 자기 자신을 먹기 시작하는 자기 포식의 구조로 이어진다. 그 시작점이 바로 가정의 부엌, 그리고 감정의 내부다.



“자본주의는 ‘경제’의 형태를 빌려 사회 전체를 지배하지만, 그 사회의 모든 부분을 완전히 포식할 수는 없다.”


이 남은 틈, 완전히 삼켜지지 않은 영역이 프레이저에게 있어 정치적 희망의 공간이다.
돌봄은 자본의 내부에서 착취되지만, 동시에 자본이 결코 통제할 수 없는 인간적 감응의 영역을 품고 있다.
그 영역에서 연대는 다시 시작된다. 서로를 돌보는 행위가 계산을 넘어서는 순간, 자본의 논리는 균열을 일으킨다. 돌봄은 자본이 가장 강하게 억압하면서도,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영역이다.
그 아이러니가 바로 식인 자본주의의 모순된 심장이다.


돌봄의 위기는 어쩌면 사회적 시간의 붕괴일 수 있다.
가정의 리듬, 노동의 리듬, 휴식의 리듬이 무너질 때, 시간은 자본의 속도에 종속되고, 삶은 ‘회복 없는 반복’의 궤도로 떨어진다.
이때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는 곧 존재론적 위기로 전환된다.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이 누구인지 느낄 수 없고, 그의 관계는 알고리즘의 리듬으로 측정된다. 자본은 돌봄의 붕괴를 통해 감정의 체계를 장악한다.


그러나 이 위기의 밑바닥에는 여전히 미약한 가능성이 남아 있다.
돌봄은 자본이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것은 몸과 몸이 만나는 접촉, 이윤이 아닌 관계의 리듬으로 작동한다. 이 감각이 다시 회복될 때, 자본의 식탁은 흔들릴 것이다.



“자본을 무한히 축적하려는 끝없는 충동에 따르도록 방치하면, 자본이 의존하는 사회적 재생산 과정이 불안정해질 위험에 빠지게 마련이다.”


돌봄의 불안정성은 인간의 관계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자본이 의존하는 모든 생태적 기반에서 동시에 진행된다. 자본은 사회의 몸뿐 아니라, 지구의 몸에서도 영양을 흡수한다. 그래서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는 곧 자연의 위기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제 사유는 인간의 집 안을 떠나, 지구의 호흡으로 향한다. 그리하여 자본은 자연을 어떻게 먹는가?





생태계의 파괴: 자연은 비용 제로가 아니다


“자연은 자본을 위한 자원이 되는데, 그 가치는 전제됨과 동시에 부인된다. 자본 회계에서 자연은 마치 비용이 제로인 듯 처리된다.”


자본은 자연에 이름 붙이는 것을 좋아한다. 숲을 목재라 부르고, 바람을 에너지라 부르며, 흙을 부동산이라 부르고, 바다를 운송 루트라 부른다. 자본은 사물에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소유의 질서를 세우고, 언어를 통제의 도구로 삼아 생명의 의미를 추출한다. 자연은 인간의 말에 포획되는 순간, 더 이상 세계의 일부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즉시 계산의 표 안으로 이송되어, 수치로 환원되고, 효율의 논리 안에 갇힌다. 존재는 이름을 잃는 순간 죽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얻는 순간부터 대상화되기 시작한다. 이것이 근대 자본주의의 첫 번째 폭력이다. 존재를 언어로 환원하고, 생명을 명명으로 가두는 폭력, 말의 권력으로 세계를 재구성하는 폭력이다.


하이데거가 “세계-내-존재”라 불렀던 관계적 존재의 질서 속에서 자연은 결코 배경이 아니다. 인간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세계와 더불어 호흡하는 존재였으며, 존재란 서로의 드러남을 통해 완성되는 관계의 형식이었다.
그러나 근대는 이 관계를 거꾸로 돌려세웠다. 인간이 세계의 중심에 서고, 자연은 그 중심을 받치는 무대가 되었다. 그렇게 세계는 대상의 창고로 변하고, 인간은 그 창고의 관리자라 자처했다

이때 자연은 더 이상 ‘함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 가능한 것’으로 격하된다. 이 관리의 기술 -생명을 관리 가능한 질서로 환원하는 기술- 이 바로 경제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연’에 의존해 ‘경제’를 만들면서, 둘을 존재론적으로 분할한다.”


프레이저의 이 말은 경제가 존재의 인식 구조 자체를 갈라놓는 폭력이 되었음을 드러낸다. 이 분할은 인간의 감각을 두 조각 낸다. 한쪽은 생산의 감각으로, 다른 한쪽은 생명의 감각으로. 우리는 효율을 계산할 때 살아 있다고 느끼지만, 실상 그 계산의 논리는 삶의 온도를 조금씩 빼앗아 간다. 자본은 이 이중 감각을 통해 자연을 지배하고, 자연을 ‘내부의 외부’ - 즉 경제를 가능하게 하는 필수 조건이면서 동시에 경제의 바깥으로 추방된 영역 ― 으로 만든다. 자연은 그 안에 있으면서도 항상 바깥으로 밀려나며, 그 모순된 지위가 바로 자연의 비극이 된다.



인간은 스스로를 자연과 분리했다고 믿었지만, 사실 그 분리는 허구였다.
자본은 인간을 자연의 외부로 내몰았고, 인간은 그 외부에서 다시 자연을 착취한다. 이 착취는 물질적 행위이자 인식의 폭력이다.
‘지속 가능한 개발’, ‘그린 뉴딜’-이 모든 말들은 자연의 회복을 말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회복의 상품화를 의미한다.

자본은 자연의 파괴를 멈추지 않는다. 다만 그 파괴의 과정을 새로운 시장으로 포장할 뿐이다.


“자본주의는 ‘경제’ 그 이상이다.”


프레이저가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경제라는 언어가 이미 세계의 감각을 왜곡한다는 점이다.
경제는 인간의 관계뿐 아니라 자연의 호흡, 물질의 흐름, 기후의 변화까지 계산하려 한다.
그 결과, 존재의 리듬은 숫자의 리듬으로 대체된다. 숲의 침묵은 통계로 번역되고, 비의 내림은 생산성의 방해로 계산된다. 이때 자연은 더 이상 타자가 아니라, 기업의 보고서 속 ‘변동 요인’으로 축소된다.
자연은 데이터로 죽는다.


자연은 침묵하지 않는다. 우리가 만든 모든 행위에 응답한다. 기후의 격변, 바이러스의 창궐, 미세먼지의 질식—이것은 단지 자연의 반란이 아니라, 자연이 인간에게 보낸 답장이다. 그 답장은 현상으로 기록된다.
인간의 귀로는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는 지구의 심장에서 계속 울린다.


이제 자연은 더 이상 ‘배경’이 아니다. 그는 자본의 이야기에 침입한 서사적 인물이다.
그의 등장은 예기치 않으며, 그의 존재는 인간의 계획을 무너뜨린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부분마저 먹어 치울 태세다.”


자본은 자연을 소비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소모한다. 그는 산소를 팔고, 물을 상품화하며, 태양의 빛마저 에너지 시장의 품목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계산은 언젠가 자신의 폐를 갉아먹는 행위로 돌아온다.
산소 없는 성장, 물 없는 생산, 에너지의 전환이 아닌 착취의 가속- 이것은 문명의 자가면역 반응이다.
자본주의는 지구의 몸을 먹으며 살아남지만, 그 몸이 사라질 때 그는 함께 죽는다.


이제 자연의 위기는 인간의 위기다. 기후의 변동은 계절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 구조의 붕괴로 이어진다.
가뭄은 전쟁이 되고, 홍수는 이주를 낳으며, 폭염은 노동의 리듬을 무너뜨린다. 생태 위기는 경제의 외부 사건이 아니라, 경제의 내부 균열이다. 이 균열이 확대될수록, 자본은 통제의 언어로 대응한다. 탄소세, 기후 펀드, ESG. 그러나 그 모든 제도적 조치는 문제의 본질을 피해 간다.
자본은 여전히 지구를 ‘시장’으로 본다. 그가 결코 보지 못하는 것은 지구가 더 이상 시장을 견디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하이데거는 말한다.
“기술의 본질은 기술적인 것이 아니다.”
기술은 세계를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이며, 그 드러냄의 방식이 곧 진리의 형태다.
근대 자본주의의 기술은 자연을 ‘자원으로서 드러내는 방식(Ge-stell)’을 선택했다.
즉, 자연은 언제나 ‘활용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세계를 끝없이 동원 가능한 창고로 경험한다. 그러나 이 기술적 드러냄은 결국 인간 자신을 그 창고 속의 부품으로 만든다. 자연이 자원이 된 세계에서 인간 또한 자원이 된다. 이 전도된 질서 속에서 자본의 포식은 인간의 내면까지 확장된다.


이제 자본은 생태를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소비의 과정 자체를 상품화한다.
관광산업은 ‘자연을 경험하라’고 말하고, 에코마케팅은 ‘환경을 지키며 소비하라’고 권한다.
자연은 더 이상 존재가 아니라 이미지가 된다. 숲은 배경화면으로, 산은 광고의 풍경으로, 바다는 휴양의 무대로 전락한다. 인간은 자연을 체험하는 대신, 자연의 이미지를 소비한다. 그리하여 자본은 자연의 표면만을 보존하며, 그 표면 아래에서 생명을 추출한다. 이것이 현대의 이미지 자본주의다. 지구의 껍질만 남기고 그 속을 파먹는 문명. 이처럼 자본은 자연을 포식하며 동시에 자연의 이미지를 신격화한다. 자연은 ‘순수함’, ‘치유’, ‘휴식’의 상징으로 광고 속에서 부활한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언제나 현실의 파괴 위에 세워진다.

우리가 ‘자연으로의 회귀’를 꿈꿀수록, 실제 자연은 더 멀어진다.
이 역설 속에서 자본은 완벽히 승리한다— 그는 자연을 파괴하면서 동시에 숭배하기 때문이다.


자본의 생태적 포식이 심화될수록 그는 자신의 외부를 상실한다.
자연이 완전히 상품화된 순간, 자본은 더 이상 외부로부터 에너지를 얻지 못한다. 그때부터 자본은 정치의 영역을 먹기 시작한다. 정치는 자본의 통제 장치로 전락하며, 법과 제도는 생태를 보호하는 대신 그 착취를 합법화한다. 이로써 자본의 식탁은 자연을 넘어 사회의 구조로 이동한다.







정치의 탈정치화: 위기의 관리와 통치의 기술



“자유무역과 지적재산권 같은 신자유주의적 관념들이 헌법으로 제정되고, 이를 글로벌 체제로 고정시킨다.”


자본은 정치의 언어를 빼앗았다. 그는 더 이상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지 않는다. 그의 새로운 광장은 협약서와 데이터베이스, 조약의 문장들 속에 있다.
어쩌면 신자유주의는 하나의 경제학이 아니라, 세계의 헌법을 다시 쓰는 정치적 체계인지도 모른다.
그 헌법의 문장은 기업의 로비와 투자자의 손에서 작성되었고, 그 조항의 첫 줄에는 언제나 이렇게 쓰여 있었다:
“시장은 스스로를 규율한다.”


하지만 시장은 결코 스스로를 규율하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국가의 권력, 공적 제도, 시민의 희생 위에서 유지된다. 프레이저가 말하듯,
“이 기구들은 압도적으로 자본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며, 민주적 입법을 미연에 방지한다.”
민주주의는 이름만 남았고, 정치는 점점 통치(governance)로 대체되었다.


정치의 탈정치화란, 정치가 스스로의 언어를 잃고 기술이 그 자리를 차지한 상태를 말한다.
이 새로운 시대에서 정치적 판단은 알고리즘으로, 윤리적 숙의는 통계적 시뮬레이션으로 대체된다.
국가는 더 이상 누구를 위한 권력인가를 묻지 않는다. 그는 이제 얼마나 효율적인가를 묻는다.
이 효율의 논리가 지배하는 순간, 인간은 통치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의 객체가 된다.
정치는 살아 있는 대화가 아니라, 데이터의 자동화된 합의로 치환된다.


푸코가 말한 생명정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읽힌다.
국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통제하고, 죽음을 막기 위해 감시한다. 그러나 그 감시의 구조 속에서 생명은 점점 숫자와 그래프의 형태로 재구성된다. 감염자 수, 실업률, GDP 성장률— 이 모든 수치가 생명의 지표로 간주될 때, 정치는 인간의 얼굴을 잃는다. 그 얼굴 없는 정치, 그것이 바로 식인 자본주의의 통치 형태다.



“자본을 무한히 축적하려는 끝없는 충동에 따르도록 방치하면, 자본이 의존하는 사회적 재생산 과정이 불안정해질 위험에 빠지게 마련이다.”


국가가 사회적 재생산을 보장하지 못할 때, 그 공백은 시장이 채운다. 돌봄과 복지, 교육과 의료는 더 이상 공공의 책임이 아니라 상품의 이름으로 유통된다. 이때 국가는 시장의 보조자가 되고, 정치는 자본의 중계자가 된다. 자유무역협정은 헌법을 넘어선 헌법이 되고, 세계무역기구(WTO)나 국제통화기금(IMF)은 국민국가의 권위를 대체한다. 이러한 초국가적 기구들은 탈정치적 통치의 장치다— 그들은 법의 형식을 빌려 정치의 내용을 제거한다.


푸코는 이를 “통치성(governmentality)”이라 불렀다.
권력은 이제 억압하지 않는다. 그는 자유의 기술을 통해 지배한다.
시민은 자유롭게 소비하며 스스로를 규율하고, 기업은 사회적 책임을 말하며 감시의 체계를 확장한다.
자유는 더 이상 해방의 언어가 아니라 통치의 전략이 된다. 그리하여 정치의 장은 감시의 공간으로 변하고,
자유는 복종의 기제로 재탄생한다.


이 통치의 구조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 팬데믹이었다.
도시는 봉쇄되고, 사람들은 격리되었으며, 국가는 생명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감시와 통제의 새로운 기술을 실험했다. 그러나 그 보호의 언어 속에서 시민의 권리는 사라지고, 인간의 고립은 심화되었다.

팬데믹 이후의 세계에서 비상사태는 통치의 일상적 언어가 되었다.
검문, QR 코드, 감염 데이터, 백신 여권— 이 모든 장치는 인간의 생명을 수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생명의 관리 체계를 완성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정치는 점점 더 비감정적이고 기술적이 된다. 결정은 알고리즘이 내리고, 책임은 어디에도 귀속되지 않는다. 이 무책임의 체계 속에서 윤리의 자리는 통계로 대체되고, 윤리적 판단의 시간은 ‘긴급한 조치’의 명령으로 지워진다. 정치는 더 이상 사유의 공간이 아니라, 긴급 대응의 프로토콜로 전락한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기반을 지탱하는 사회적 조건들을 스스로 파괴한다.”


이 문장은 통치의 윤리적 공백을 드러낸다. 자본은 사회적 재생산뿐 아니라 정치의 토대까지 갉아먹는다.

정치는 이제 사회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사회를 유지하는 척하면서 자본의 순환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리하여 정치의 중심은 윤리가 아니라 관리의 기술이 된다. 그 기술의 언어는 ‘데이터’, ‘투명성’, ‘성과’, ‘지속 가능성’— 모두 감시의 또 다른 이름이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에서 “예외상태란 법이 정지되지만 동시에 법이 작동하는 상태”라고 말한다.
팬데믹 동안의 통치는 바로 그런 형태였다. 국가는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면서도 그 제한을 법적 정당성으로 포장했다. 그리하여 법은 존재하지만, 그 법이 지탱하던 인간의 존엄은 사라졌다.
이 모순된 상태가 지속될 때, 정치는 더 이상 공동의 삶을 위한 협의가 아니라, 통제의 합리화를 위한 장치가 된다. 그러나 이 모든 통치의 논리는 결국 인간의 신체에 닿는다.

권력은 몸을 통제하고, 몸을 통해 사회를 통제한다.
스마트워치, 생체 인증, 헬스케어 데이터— 이 모든 기술은 인간의 몸을 정치의 데이터로 변환한다.
그리하여 개인의 건강은 공공의 문제로, 공공의 안전은 개인의 감시로 이어진다.
푸코가 말한 “규율 권력”은 이제 감시의 시대에서 “정동 권력”으로 진화했다.
자본은 인간의 두려움과 욕망, 불안과 안전의 감정을 관리한다.
이 정동의 통제야말로 정치의 탈정치화가 도달한 심연이다.



“이윤 주도 경제가 그 작동에 필요한 ‘경제 외적 기둥’을 포식하도록 북돋는 사회 질서.”


이 경제 외적 기둥 중 하나가 바로 정치다.
정치는 원래 사회의 윤리적 조정자였지만, 자본은 그 기둥을 내부화하여 자신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만든다.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언어는 점점 더 중립화된 기술적 문장으로 대체된다.
시민은 ‘소비자’로, 정치는 ‘플랫폼’으로, 참여는 ‘피드백’으로 변한다.
이 언어의 전환 속에서 정치는 감정과 판단을 잃고, 세계는 점점 더 비감정적인 구조로 정렬된다.


벤야민은 말한다.
“파시즘은 미학을 정치화하고, 공산주의는 정치의 미학화를 거부한다.”
오늘의 자본주의는 그 둘의 경계를 뒤섞는다.
그는 미학을 이용해 통치를 아름답게 꾸미고, 정치의 냉혹함을 ‘혁신’과 ‘진보’라는 언어로 포장한다.
이로써 정치의 폭력은 감각되지 않고, 윤리의 결여는 디자인의 세련됨으로 위장된다.


이제 정치의 자리는 비어 있다. 그곳에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이 깃들어 있다.
그 폭력은 더 이상 총으로 쏘지 않는다. 그는 데이터를 조정하고, 통계를 왜곡하며, 여론의 감정을 알고리즘으로 조율한다. 이 보이지 않는 폭력이야말로 식인 자본주의의 정치적 얼굴이다.


이 지점에서 자본의 식탁은 또 한 번 확장된다.
그는 자연과 사회, 정치의 영역을 삼킨 뒤, 이제 인간의 몸, 특히 피부와 혈통, 인종의 경계로 향한다.
이제 자본은 차이의 경제학을 통해 누가 살아남고, 누가 버려질지를 결정한다. 정치의 탈정치화 이후,
세계는 다시 한번 수탈의 언어로 돌아간다.





인종화된 수탈: 피의 경제학과 국경의 정치




“자본은 노동과 관계를 맺을 뿐만 아니라 자연과도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이 관계는 식인적이고 추출적인 관계다.”


자본은 관계의 존재론을 갖지 않는다. 그가 맺는 모든 관계는 착취와 추출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는 노동자와 관계를 맺을 때 임금이라는 대가를 내세우고, 자연과 관계를 맺을 때 자원이라는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그 관계의 근본적 특징은 언제나 비대칭적 포식이다. 이 불균형의 질서는 피부의 색과 국경의 선을 따라 확장된다. 자본주의의 근본 구조는 단지 노동의 착취가 아니라, 인종과 젠더, 지리의 차이를 이용한 체계적 수탈의 구조다.


낸시 프레이저가 ‘식인 자본주의(cannibal capitalism)’라 부른 것은 이러한 추출적 관계가 단지 생산의 외부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내적 논리 그 자체로 통합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새로운 외부를 만들어내며, 그 외부로부터 생명과 가치를 흡수한다.
이 외부의 다른 이름이 바로 ‘식민지’, ‘여성’, ‘인종화된 타자’다. 그들은 체계 속에서 동시에 필수적이면서도 배제된 존재들이다. 그들의 노동 없이는 세계가 굴러가지 않지만, 그들의 존재는 늘 ‘보이지 않는 비용’으로 취급된다.


이러한 이중적 관계의 역사적 원형은 시초 축적(primitive accumulation)에서 시작된다.
마르크스가 말한 이 개념은 단지 자본의 초기 조건이 아니라, 그가 반복적으로 재생산하는 폭력의 구조다.


프레이저에 따르면 “시초 축적과 꼭 마찬가지로, 사회적 재생산은 상품 생산의 필수 배경조건이다.”


자본은 매번 새로운 시초 축적을 수행한다. 그는 이미 형성된 시장 위에 다시 폭력을 덧씌운다.
노예제, 식민정책, 토지의 사유화, 여성의 가사노동, 그리고 오늘날의 데이터 추출까지—모두 ‘시초 축적’의 반복된 변주다. 이 폭력은 언제나 인종적이고 젠더적이다. 그리하여 자본의 탄생은 결코 계약의 결과가 아니라, 피의 관계, 억압의 흔적 위에서만 가능했다.


실비아 페데리치는 『캘리번과 마녀』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성의 몸은 근대 자본주의의 첫 번째 식민지였다.”
이 말은 여성의 몸, 특히 생식과 돌봄의 노동은 근대 자본주의가 자신의 축적을 가능하게 한
가장 원초적인 ‘자원’이었다. 이 수탈의 구조는 곧 인종의 구조로 확장된다.
페데리치가 여성의 몸에서 발견한 식민의 흔적을, 프란츠 파농은 흑인의 피부에서 읽었다.
그는 말했다. “흑인의 피부는 백인의 무의식 속에서 생산된다.”
즉, 인종은 생물학적 차이가 아니라, 경제적 분할을 정당화하기 위한 상징적 구조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연’에 의존해 ‘경제’를 만들면서, 둘을 존재론적으로 분할한다.”


이 존재론적 분할은 인간 사이에서도 재현된다. 백인은 ‘문명’으로, 흑인은 ‘자연’으로 위치 지워졌다.
자본은 이 분할을 통해 생산과 재생산, 주체와 객체, 중심과 주변을 구획한다.
그 결과, 인종화된 몸은 언제나 ‘노동의 대체물’이 된다. 그들은 투명하게 보이지만, 언제나 배경으로 밀려나 있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시각적 질서의 정치학이다.
보이는 자와 보이지 않는 자, 보아야 하는 자와 결코 보이지 않아야 하는 자 사이의 위계. 라엘 예기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정신』에서 말한다.

“자본주의는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기 위해 항상 타인의 삶을 포식한다.”
그 포식의 구체적 형식이 바로 인종화된 수탈이다.
노예제의 시대에는 피와 노동이 교환되었고, 식민지 시대에는 자원과 영토가 교환되었으며, 오늘날에는 정보와 신체가 교환된다.
피부의 색이 이제는 패스워드의 코드로, 혈통의 계보가 데이터의 라벨로 전환된다.
이것이 디지털 자본주의의 새로운 인종화다.




“자본주의는 ‘경제’의 형태를 빌려 사회 전체를 지배하지만, 그 사회의 모든 부분을 완전히 포식할 수는 없다.”


인종화된 수탈의 가장 강력한 도구는 국경이다.
국경은 단순한 선이 아니라, 누가 보호받고 누가 배제될지를 결정하는 윤리의 경계다.
국경의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비자 시스템, 그리고 ‘불법’이라는 단어 속에 숨어 있다.
국경은 사람을 가르고, 이주민과 난민을 ‘존재하되 시민이 아닌 자’로 만든다.
그들의 노동은 사회를 지탱하지만, 그들의 생명은 언제든 버려질 수 있다.
그들의 존재는 통계로만 기록되고, 그 통계는 언제나 ‘인구 관리’라는 이름으로 제시된다.


조르조 아감벤이 말한 ‘호모 사케르(homo sacer)’

—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지만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존재—
그 개념은 오늘날 국경지대에서 현실이 된다. 이주노동자는 사회의 기능을 유지하지만, 그는 법적 권리의 주체가 아니다. 그의 신체는 계약의 대상이지만, 그의 삶은 제도의 외부에 있다. 이처럼 인종화된 몸은 법과 생명 사이의 경계에 서 있는 존재다. 그의 피는 사회를 지탱하지만, 그의 이름은 언제나 지워진다.


자본은 이 인종적 차이를 ‘위험의 관리’라는 언어로 정당화한다.
불법 이주, 테러, 전염병— 이 모든 담론은 타자의 존재를 위협으로 구성한다.
그리하여 국가는 안전을 내세워 감시를 강화하고, 기업은 ‘위험 관리 산업’을 새롭게 확장한다.
국경의 폭력은 곧 경제의 안보화(securitization)다.
안전은 시장의 논리로 변환되고, 인간의 이동은 비용과 위험의 항목으로 계산된다.
이 과정에서 인종은 통계적 변수로 환원된다.
흑인의 생명, 여성의 생명, 난민의 생명—그 모든 차이는 시스템이 자신의 불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한 간극이 된다.



“자본주의는 ‘더 커다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 때 좀 더 쓸모 있음을 주장하려 한다.”


그 ‘더 커다란 무엇’이란 인종화된 삶들의 비가시적 수탈이다.
이 세계에서 인종은 단지 피부색이 아니라, 부와 빈곤, 보호와 배제의 코드다.
자본은 피부를 인식하고, 피부를 통계로 변환하며, 그 통계를 이윤의 예측모델로 활용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데이터 인종주의(data racial capitalism)다.
AI 알고리즘의 편향, 감시 기술의 불균형, 금융평가와 신용점수의 차별— 이 모든 것은 자본의 새로운 인종적 통치다.


“식민의 가장 깊은 폭력은 타자의 정신을 식민화하는 것이다.”
오늘날 자본의 식민주의는 더 이상 총으로, 배로, 군대로 수행되지 않는다.
그것은 데이터, 이미지, 알고리즘의 언어로 수행된다.
그 폭력은 눈부시게 매끄럽고, 착취는 윤리의 언어로 포장된다.


이것이 ‘식인 자본주의’가 도달한 문화적 단계다— 타인을 먹는 문명, 그러나 그것을 감각하지 못하는 시대.


자본은 이제 국경의 바깥에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안의 경계들에서 작동한다.
피부의 색, 언어의 억양, 여권의 종류, 심지어 신용카드의 한도까지— 모든 차이가 계급의 새로운 표지가 된다. 이것이 현대의 인종주의다.
그것은 피부의 문제가 아니라, 접속의 문제다.
누가 연결될 수 있고, 누가 단절될 수밖에 없는가.
그 차이가 곧 생존의 기준이 된다.


이제 자본은 더 이상 외부의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모든 내부에 침투했다.
피부의 경계는 사라지고, 인종의 선은 알고리즘의 안에서 재편된다.
그리하여 수탈의 구조는 점점 더 자기 포식적 형태로 변한다.
자본은 외부의 피가 아니라, 이제 자신의 피를 마시기 시작한다.
그의 위는 사회의 구조로, 그의 치아는 법의 장치로, 그의 혀는 미디어의 언어로 변했다.
그리하여 식민은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형태를 바꾼 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이 자기 포식의 문명은 곧 전체 세계의 위기로 전환된다.
자본이 더 이상 외부를 가질 수 없을 때, 그는 자신의 기반—사회적 재생산, 생태계, 정치, 인종— 모두를 스스로 먹어치운다.
이것이 프레이저가 말한 식인 자본주의의 결정적 순간, 즉 자본이 자기 자신을 소화하지 못하고 역류하기 시작하는 국면이다.






팬데믹 이후의 식인 자본주의: 자기 포식의 문명




“자본주의는 자신이 의존하는 조건들을 스스로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팬데믹 이후의 세계는 그 문장의 실험실이었다.
인류는 처음으로 자본이 멈춘 세계를 보았다.
공장은 멈추고, 항공기가 멈추고, 거리의 소음이 사라졌을 때, 우리 앞에 드러난 것은 더 이상 ‘자연의 복원’이 아니라 침묵의 구조였다. 그 침묵은 살아 있는 존재들의 정지된 호흡, 생산이 멈춘 사회의 허기를 드러냈다.
자본은 처음으로 자신의 결핍을 보았고, 그 결핍을 견디지 못한 채 다시 가동되었다.
그러나 그 재가동의 첫날부터 세계는 이미 다른 형태로 병들어 있었다.


그 병의 이름은 자기 포식이었다.
이 문명은 더 이상 외부를 포식하지 않는다. 그는 이제 자신을 먹는다.
자본은 노동자를 착취하던 단계를 지나, 이제는 인간의 감정, 시간, 관계, 꿈마저 자원으로 전환했다.
그의 식탁 위에는 더 이상 물질적 음식이 아니라, 데이터, 감정, 주의(attention)가 놓였다.
이 식탁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를 먹이로 내주며, 그 시스템을 계속 작동시키는 순환의 일부가 되었다.



“포식은 더 이상 주변부의 사건이 아니라 중심부의 논리다.”


이제 ‘포식’은 더 이상 타인의 문제도, 외부의 폭력도 아니다.
그것은 나의 소비 습관, 나의 클릭, 나의 시간 속에 들어와 있다. 우리는 정보를 삼키며, 동시에 삼켜진다.
휴대폰의 화면은 식탁의 거울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고, 자신의 고독을 상품화하며, 사랑조차 데이터로 교환한다. 이것이 식인 자본주의의 완성된 형태— 감정의 자본화, 존재의 금융화다.


정동이론가 브라이언 마수미는 말한다.
“정동은 통치의 새로운 단위가 되었다.”
팬데믹 이후의 자본은 감정을 측정하고, 그 감정의 변동을 실시간으로 조정한다.
증오와 분노, 공포와 불안은 더 이상 사회의 결함이 아니라 생산의 자원이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혐오를 연료로 삼고, 증권시장은 불안을 지표로 삼는다.
이 정동의 경제 속에서 인간은 더 이상 소비자도, 생산자도 아니다.
그는 이제 감정의 추출 지다.



“식인 자본주의는 사회적 삶의 토대가 되는 모든 ‘비경제적 영역’을 파괴한다.”


프레이저가 말한 ‘비경제적 영역’은 사랑, 돌봄, 자연, 정치, 인종— 모두 자본이 자신의 외부로 설정해 온 영역이었다.
그러나 팬데믹은 그 외부마저 완전히 흡수했다.
사랑은 원격화되었고, 돌봄은 플랫폼으로 전환되었으며, 정치는 비상조치의 언어로 축소되었다.
이제 자본은 더 이상 외부를 갖지 않는다.
그는 완전한 내재성의 괴물이 되었다.
모든 것이 시스템 안에서 순환하며, 그 어떤 것도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 상태가 바로 자기 포식의 문명이다.



통치는 자유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자유는 더 이상 저항의 가능성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효율적으로 규율하기 위한 자기 관리의 기술로 변형되었다.
‘자유’는 감시의 새로운 얼굴이며, 자기 계발’은 통제의 가장 부드러운 형태다.
우리는 자유롭게 스스로를 착취하며, 그 착취의 결과를 ‘자기실현’이라 부른다.
이 아이러니야말로 식인 자본주의의 구조다.




“비상사태는 예외가 아니라 규칙이 되었다.”(벤야민)


팬데믹은 이 명제를 전면화했다.
모든 사회가 ‘긴급’을 표준으로 삼았다.
모든 정책은 ‘예외’를 전제로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시민의 권리, 교육의 시간, 예술의 공간은 모두 일시 정지되었고, 그 공백 속에서 자본은 새로운 형태의 순환을 설계했다. 그는 멈춘 듯 보이면서, 오히려 더 깊숙이 우리의 신체와 감정에 침투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타자의 숨결을 위험으로 인식하며, 관계의 모든 접촉면이 감염의 통계로 환산되었다. 이것이 비접촉의 문명이다— 서로 닿을 수 없는 인간들, 그러나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는 시스템의 노드들. 벤야민은 “파국이란 세계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계속되는 세계 자체”라고 했다.

그의 말은 오늘의 풍경을 정확히 예언한다.
파국은 이미 일어났다.
문제는 그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식인 자본주의는 파국을 관리하며, 그 관리 자체로 생존한다.
파국의 지속이 곧 체제의 연료가 되었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위기를 해결하지 않는다. 다만 전가한다.”


자본은 위기를 ‘해결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해결’한다.
그는 위기를 사회의 특정 집단으로 밀어 넣고, 그들의 고통을 구조조정의 비용으로 삼는다.
팬데믹 기간 동안 가장 먼저 해고된 이들은 돌봄 노동자, 여성, 비정규직, 이주민이었다.
자본은 언제나 가장 취약한 이들의 몸에서 가장 빠르게 피를 뽑아낸다.
그들의 희생 위에서 체제는 마치 복구된 듯 작동한다.
그러나 그것은 회복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붕괴의 관리다.


그리하여 ‘복원력(resilience)’이라는 단어는 이 시대의 새로운 도덕이 되었다.

“다시 일어나라”, “다시 연결하라”— 이 명령은 사회적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의지로 치환한다.
그 결과, 위기의 원인은 사라지고, 책임은 개인의 내면으로 귀속된다.
이렇게 식인 자본주의는 죄책감의 심리학을 통해 지속된다.



“인간의 삶은 이제 자본의 유일한 남은 자원이다.”


이제 자본은 외부의 자연도, 새로운 시장도 없다.
그는 오직 인간의 내면에서만 새로운 에너지를 추출할 수 있다.
우리는 ‘마지막 자원’이 되었다. 그 추출의 도구는 스마트폰, 플랫폼, SNS, 그리고 우리의 일상적 피로다. 노동과 휴식의 경계는 사라지고, 시간은 영원히 연결된 상태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우리는 스스로를 착취하면서도, 그 착취를 인식하지 못하는 디지털 노예제의 주체가 된다.


그러나 바로 이 무감각 속에서 새로운 감각이 태어난다.
그것은 ‘피로’라는 형태로, ‘무기력’이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몸이 멈출 때, 세계는 균열된다.
그 멈춤이야말로 자기 포식의 체계를 중단시킬 수 있는 유일한 틈이다.


디디-위베르만은 『반딧불의 잔존』에서 “가장 어두운 밤에도 작은 불빛은 꺼지지 않는다.”
그 반딧불의 빛은 희망이 아니라, 잔존의 윤리다.
완전한 파국의 시대에도 빛은 꺼지지 않고 깜빡인다.
그것은 저항이라기보다, 살아 있음의 증언이다. 식인 자본주의의 내부에서도 이 반딧불의 잔존은 존재한다.
돌봄의 손길, 무명의 연대, 작은 공동체의 식탁, 그 모든 미세한 실천이 자본의 완전한 내재성에 균열을 낸다.


프레이저가 말한 네 가지 위기— 생산, 재생산, 자연, 정치— 그 모두가 붕괴의 한가운데서 서로의 경계를 넘어 교차할 때, 새로운 형태의 윤리가 출현한다.
그 윤리는 공통의 취약성을 인정하는 윤리일 것이다.
인간은 더 이상 주체가 아니라, 서로의 상처를 통해 연결된 존재다. 그 연결이 바로 새로운 정치의 시작이다.


이제 문명은 묻는다.
‘먹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먹힌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식인은 단지 폭력의 은유가 아니라, 관계의 형식이다.
우리는 서로를 통해 살아가고, 서로의 일부를 흡수하며, 그 흔적 속에서 자신을 구성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포식은 그 관계를 일방적으로 만들었다.
타자를 먹되, 소화하지 못하고, 결국 자기 자신을 먹게 된 문명. 그 문명의 말로는 파국이 아니라, 자기 인식의 불가능이다.




“식인 자본주의는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든다.”



그 망각을 회복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철학의 윤리적 과제다.
우리는 다시금 타자를 느껴야 하고, 타자의 고통 속에서 자신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이 ‘감응의 윤리’다. 그 윤리는 거대 담론이나 구조의 개혁이 아니라, 아주 작은 실천에서 시작된다.
한 사람의 손을 잡는 일, 하루의 노동을 정당하게 대우하는 일, 사라져 가는 자연의 숨결을 기억하는 일 이 미세한 실천들이 식인 자본주의의 거대한 위 속에서 남겨진 잔존의 빛이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이해하게 된다. 문명의 위기는 생산의 위기가 아니라, 감각의 위기였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세계— 그 무감각이야말로 자본이 만들어낸 최고의 상품이었다.
그러나 그 무감각의 심연 속에서도 한 줄기 감각은 살아 있다.
그것이 바로 예술이다.


이 모든 철학적 사유와 역사적 폭력을 한 장의 그림으로 응축한 화가가 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캔버스로 삼아 식인 자본주의의 내장을 꿰뚫어 보았다.
그녀의 피, 그녀의 고통, 그녀의 몸은 세계의 구조를 드러내는 철학적 도해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 한 장의 그림 앞에서 우리는 1부에서 5부까지의 사유를
하나의 이미지로 본다.





한 장의 그림이 이론을 이긴다









어떤 문장은 아무리 정교해도 세계의 구조를 다 담지 못한다. 그러나 한 장의 그림은, 말보다 빠르게 진실에 닿는다. 그것이 프리다 칼로의 그림이 낸시 프레이저의 언어를 넘어서는 지점이다. 그녀의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선 위에 서 있는 자화상〉은 자본주의의 오랜 식탁을 단 한눈에 보여준다. 한쪽엔 흙, 다른 한쪽엔 쇳소리. 한쪽엔 순환, 다른 한쪽엔 소모. 그녀의 발아래 얇은 국경선 하나가 세계의 균열을 대신한다.


프레이저는 “자본주의는 자연과 사회적 재생산에 의존하면서, 그 둘을 존재론적으로 분할한다.”라 말한다.

그 문장을 그림으로 본다면 바로 이것이다. 칼로의 자화상은 분할의 시각적 지도이며, 자본주의의 숨겨진 배경, 즉 ‘더 숨겨진 처소들(even more hidden abodes)’을 드러내는 일종의 회화적 철학서라 볼 수 있다. 그녀의 몸은 예술적 주체를 넘어, 사회 재생산의 상처와 생태적 고갈, 인종화된 수탈과 정치적 경계가 하나의 신체로 응축된 세계의 지도 같아 보인다.


왼편의 대지는 아직 호흡하고, 오른편의 공장은 이미 숨을 삼킨다.

태양과 달, 꽃과 전깃줄이 하나의 화면에서 동시에 빛나고 꺼지며, 그 중간에 한 여인이 정면을 바라본다.

그 시선은 비난도 감탄도 아니다. 그것은 목격자의 시선, 세계의 증언을 감당하는 자의 눈빛이다.

이 그림이 놀라운 이유는, 그것이 복잡한 철학의 문장을 감각으로 번역한다는 점이다.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는 더 이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화면 왼편의 흙냄새, 뿌리의 색으로 존재한다.

그 흙은 여전히 자라지만, 이미 착취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


‘생태적 붕괴’는 태양과 달의 겹침으로, ‘정치의 탈정치화’는 전깃줄의 무표정한 팽팽함으로, ‘인종화된 수탈’은 의복과 피부의 경계로, ‘자기 포식의 문명’은 굴뚝의 회색 연기로 치환된다.

그림은 모든 개념의 이름을 잊지만, 대신 그 감각을 정확히 남긴다.

자본의 논리는 언제나 비가시적인 질서로 움직인다.

그는 노동을, 감정을, 자연을, 정치까지도 비용 제로로 처리한다.

칼로의 화면은 그 ‘제로’의 폭력을 색으로 드러낸다.

왼편의 흙은 과잉의 생명으로 넘쳐나지만, 바로 그 충만함이 ‘무상으로 제공된 자원’으로 전락한다.

프레이저가 “자본 회계에서 자연은 마치 비용이 제로인 듯 처리된다”라고 했을 때, 칼로는 이미 그 장부의 빈칸을 꽃으로 채워 넣고 있었다.

그 꽃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계산되지 않는 고통의 은유다.

가끔 철학은 예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너무 늦게 발견한다.

프레이저가 자본의 식인적 구조를 “경제를 넘어선 사회 질서의 형태”라고 진단했을 때, 칼로는 그 질서를 오래전부터 그림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회를 이론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대신 몸으로 목격했다.

그 몸은 흙과 철, 시간과 피, 두 대륙의 경계 위에 서 있다.

그 몸의 정면성은 선언이 아니라 견딤의 자세다.

어떤 견딤은 말보다 오래간다.

이 한 장의 그림은,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모든 층위를 순서가 아니라 동시성으로 배치한다.

사회적 재생산(좌측의 대지), 생태(빛의 리듬), 정치(전선과 기둥), 인종(피부와 복식), 자기 포식(연기의 소용돌이)— 그 다섯 장의 사유가 한 화면에 함께 존재한다.

한쪽을 보면 다른 한쪽이 따라 움직이고, 한 요소를 느끼면 다른 모든 요소가 함께 진동한다.

이 동시성은 언어가 흉내 낼 수 없는, 회화의 시간이다.


프레이저가 쓴 책이 체계의 분석이라면, 칼로의 그림은 체계의 감각적 지도다.

이 지도는 숫자도 범례도 없이, 오직 질감으로 그려져 있다.

그 질감은 흙의 온도와 철의 냉기, 식물의 촉감과 연기의 맛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녀는 색으로 사유한다.

붉은색은 노동의 피, 녹색은 돌봄의 숨, 회색은 산업의 무기력. 그 색들이 서로 섞이면서, 자본의 ‘식탁’이 완성된다. 그 식탁 위에는 우리가 먹고사는 세계가 있다.

문제는 그 식탁이 누군가의 몸으로 차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질문은 달라진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일과, 그 비판을 ‘느끼는’ 일은 어떻게 다른가.

칼로의 회화는 그 차이를 보여준다. 낸시는 개념적 이성으로 자본주의를 비판하였다면 칼로는 그림을 통하여 감각적 이성 혹은 심미적 이성으로 채현 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개념으로 비판할 수 있지만, 감각으로 공감할 때만 변화가 시작된다.

그녀의 그림은 자본의 구조를 해체하지 않는다. 대신 그 구조를 감정으로 느끼게 만든다.

그 감정이야말로 가장 오래 남는 윤리다.

그녀의 화면에서 태양과 달이 동시에 떠 있는 이유는 시간의 이중성, 문명의 분열된 리듬을 상징한다.

자본은 항상 대낮의 속도, 효율의 리듬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생명의 리듬은 달의 시간, 느림과 반복의 호흡으로 움직인다.

그 둘의 충돌이 바로 현대의 피로다.

칼로는 그 피로를 아름다움으로 가두지 않고, 빛의 대비로 풀어낸다.

그 빛은 눈부시지 않다. 오히려 낮고, 묵직하며, 오래 지속된다.

그 빛은 미학이 아니라 생존의 증언이다.

보통 우리는 ‘이론이 예술을 설명한다’고 생각하지만, 가끔은 예술이 이론을 구원한다.

칼로의 그림은 낸시 프레이저의 체계를 초과한다.

그녀는 책 한 권 분량의 분석을 단 한 장의 이미지로 압축한다.

이것이 미학의 압도적 승리다—언어가 감각을 따라잡지 못하는 순간. 그 승리는 오만한 것이 아니라, 겸허하다.

그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말한다.

그림의 중심에 선 인물의 표정은 공허하다.

그 공허함은 냉소가 아니라 비애다. 그녀는 알고 있다. 이 세계의 무게는 이미 자신의 몸을 관통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왼편의 흙과 오른편의 철을 동시에 품고, 그 둘의 진동을 자신 안에서 균형 잡으려 한다.

그것은 인간이 마지막으로 수행할 수 있는 윤리이기도 하다. 균형의 윤리, 감각의 윤리, 관계의 윤리. 우리는 종종 예술을 ‘위로’로 말하지만, 이 그림은 위로하지 않는다.

그녀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함이 사유를 다시 시작하게 한다.

이 불편함은 죄책감이 아니라, 감각이 다시 살아난다는 신호와 같다.

프레이저가 말한 ‘자기 포식 문명’의 가장 치명적인 결과는 고통의 소멸이 아니라, 감각의 둔화였다.

칼로는 그 무감각을 뚫는다. 그녀의 붓질은 다시 느끼게 만든다— 이 세계가 여전히 고통 중에 있으며, 그 고통이 아직 아름다움을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녀의 국경선은 실제의 선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선이자, 윤리의 선이다.

그 선을 넘는 일은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오로지 감각의 이동으로만 가능하다.


그녀는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아직 흙의 냄새를 기억하는가.

너는 아직 누군가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가.

너는 아직 ‘살아 있는 것’의 미세한 떨림을 감각할 수 있는가.

그 감각이 있다면, 파국 후에 구원이 있지 않을까?

이 한 장의 그림은 철학의 결론이 아닌, 철학의 시작점이다.

모든 개념은 결국 이 감각으로 돌아와야 한다.

우리가 이 그림 앞에서 느끼는 불안, 불협, 안타까움, 그리고 조용한 확신 그것이 사유의 근원이다.

자본의 폭력은 이론으로는 무너뜨릴 수 없다.

그러나 느낀다는 행위가, 이 세계가 아직 완전히 포식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낸시 프레이저가 그토록 정교하게 설명한 세계의 파국을, 프리다 칼로는 단 한 장으로 그려버렸다.

이론이 구조를 해부했다면, 그림은 그 구조의 심장을 그렸다.

그 심장은 아직 뛰고 있다.

그 뛰는 리듬이야말로, 식인 자본주의의 식탁 위에서도 완전히 삼켜지지 않는 마지막 생명일 것이다.

그리고 그 리듬은, 우리가 그녀의 그림 앞에 서서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할 때 들린다.

아주 작은, 그러나 확실한, 살아 있음의 소리. 그것이 미학의 승리다.

그것이 철학이 다시 예술 앞에 고개를 숙여야 하는 이유이지 않을까





빛은 아직 세계를 포기하지 않았다



세계는 끊임없이 자신을 설명하려 한다.
정치학은 그 구조를 말하고, 철학은 그 근거를 탐색하며, 예술은 그 형상을 그린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이 모든 설명이 너무 많아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말이 넘치면 감각은 사라진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은, 고통이 아니라 감각의 불능이다.
그 불능 속에서 세계는 점점 더 정교하게, 그러나 점점 더 무의미하게 작동한다.
우리는 구조를 이해하지만, 더 이상 그 구조를 느끼지 않는다.

이 여섯 장의 글이 탐색한 것은, 결국 감각을 되돌려주는 사유였다.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 생태의 붕괴, 정치의 탈정치화, 인종의 수탈, 그리고 자기 포식의 문명까지—이 모든 것은 하나의 동일한 질문으로 수렴된다.
“우리는 여전히 느낄 수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이론은 잠시 멈추고, 이미지가 대신 대답한다.
그 한 장의 그림, 프리다 칼로의 〈국경선〉은 그 대답의 형식이다.
그녀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서 있고, 바라보고, 견딘다.
그 침묵의 자세 속에서, 세계는 다시 자기 얼굴을 드러낸다.

이 모든 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돌봄의 감각을 기억하는가.
여전히 흙의 냄새를, 타인의 체온을, 시간의 무게를 느낄 수 있는가.
그 감각이 남아 있다면, 철학은 여전히 살아 있다.
철학이란 결국 느낀다는 행위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사유는 차갑지만, 감각은 뜨겁다.
그 둘이 다시 만날 때, 세계는 비로소 스스로를 회복하기 시작한다.

프레이저가 말한 포식의 구조는, 냉정하게 보면 완벽하다.
그 체계는 스스로의 균열마저 흡수하며 성장한다.
그러나 칼로가 보여준 것은, 그 완벽함의 균열 사이에서 깜빡이는 작은 빛이었다.
디디-위베르만이 말한 반딧불의 잔존처럼, 그 빛은 어둠을 몰아내지 않는다.
그저 아주 작은 반박처럼, 아주 조용한 저항처럼, 깜빡인다.
그 미세한 깜빡임이야말로 세계가 완전히 포식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 빛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는 아직 쓰고, 그리며, 사유할 수 있다.

나는 이 모든 글을 다 쓴 지금에서야, 철학이 결국 살아 있는 것들의 언어라는 사실을 다시 생각한다.
그 언어는 정답이 아니라 호흡이고, 개념이 아니라 몸의 리듬이다.
사유는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중간에 머물며, 다른 이의 문장에 의해 다시 이어진다.
그 중간의 상태, 그 불완전함 속에 윤리가 있다.
예술이, 철학이, 인간이 그렇게 이어진다.

세계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그러나 그 불투명함이야말로 사유의 조건이다.
투명한 진실은 위험하다.
불완전한 진실만이 사람을 겸허하게 만든다.
그 겸허 속에서 우리는 다시 감각을 배운다.
사유는 그 감각 위에서 피어난다.

이 글은 나의 기원이다.
빛은 아직 세계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 빛이 깜빡이는 동안, 우리의 말도, 우리의 생각도, 우리의 예술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세계는 아직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그 말에 대답할 준비를 다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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