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절규-바스키아와 뭉크, 개체화와 붕괴의 얼굴

by 회색 유인원 시아









바스키아와 뭉크의 얼굴 앞에서


두 그림을 미술사에서는 표현주의와 신표현주의라 말하곤 한다. 나는 표현주의라는 언어보다 폭발하는 정동과 침잠하는 정동으로 말해보고 싶다. 두 그림을 나란히 놓고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한 화면에서 들려온 절규가 다른 화면에서 메아리치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한쪽에서는 해골처럼 벌어진 얼굴이 원색의 파편과 함께 튀어나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붉게 흔들리는 하늘 아래에서 한 인물이 공기 전체를 뒤흔드는 듯한 침묵의 비명을 터뜨린다. 바스키아와 뭉크, 서로의 이름도 모른 채 다른 세기의 다른 도시에서 살았던 두 사람이 남긴 이 얼굴들은, 표면적으로는 너무도 다른 미학을 가지고 있음에도, 정동적인 차원에서는 하나의 장면을 이루며 우리를 같은 질문 앞에 세워놓는다.


“세계가 나와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그 순간, 인간의 존재는 어떻게 흔들리는가?”


이 질문을 따라가면서, 우리는 두 그림을 표현의 차이로 보지 않고, 하나는 개체화가 폭발하는 장면으로, 다른 하나는 세계-내-존재가 붕괴하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시몽동의 정동 개념과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각각 바스키아와 뭉크가 보여주는 얼굴의 떨림을 세밀하게 읽어낼 수 있는 두 개의 다른 렌즈처럼 작동한다.







시몽동의 정동으로 읽는 바스키아 - 아직 ‘나’가 되지 못한 존재의 폭발


시몽동에게 중요한 것은 이미 완성된 개체가 아니라, 개체가 되어가는 과정, 다시 말해 ‘개체화(individuation)’이다. 우리는 흔히 감정을 한 개인의 내면에 속하는 어떤 상태로 이해하지만, 시몽동은 정동을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에게 정동은 이미 개체화된 개인의 속성이 아니라, 개체화가 일어나는 장, 개체와 세계가 서로를 관통하며 아직 분리되지 않은 전(前) 개체적인 장의 떨림이다.


바스키아의 얼굴을 이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것은 이미 완성된 인물의 초상이 아니라, 여전히 진행 중인 개체화의 현장처럼 보인다. 굵고 검은 선은 얼굴의 뼈대를 긋는 것 같지만, 선은 곧 구조를 고정시키는 대신, 다시 깨지고 겹치고 끊기며 안정된 형태를 끝까지 거부한다. 마치 아직 하나의 ‘인간’이라는 단위로 응고되지 못한 에너지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서로를 밀치고 끌어당기며, 개체화를 향해 움직이는 중간 단계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시몽동식으로 말하자면, 이 얼굴은 메타안정적 상태에 놓여 있다.

- 메타안정적(métastable) 상태란 당장 무너지지는 않지만, 지금의 상태가 완성된 것도 아니고, 내부에 여러 잠재적 에너지·긴장·차이가 남아 있어서 작은 계기(trigger)가 주어지면 다른 상태로 전이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즉 “메타안정성은 변화의 가능성을 품은 질서이며, 이 질서 안에서 개체화는 일어난다.” 스스로를 정리해 안정된 ‘나’라는 개체로 굳어지지 못한 채, 여러 힘들이 서로 긴장하며 공존하는 상태를 말한다.


도시의 인종적 긴장, 자본의 속도, 예술가로서의 욕망, 주변부에 위치한 젊은 흑인 남성의 생존 감각, 죽음에 대한 예감… 이런 것들이 하나의 안정된 서사로 통합되지 못한 채, 색과 선의 파편으로 남아 화면 위에서 ‘동시에’ 진동하고 있다.


이때 바스키아의 얼굴에서 드러나는 불안은 단순한 심리적 상태가 아니라, 개체화가 끝까지 완결되지 못한 채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넘어가려는 존재의 동요 그 자체이다. 정동이란 개체 이전의 떨림이며, 그 떨림은 ‘나’와 ‘세계’가 나뉘기 이전, 즉 “어떤 존재가 되어가고 있지만 아직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상태”에서 흐르는 미세한 진동으로 나타난다.


바스키아의 선들이 하나의 인물 묘사로 안정적으로 수렴되기보다 끊임없이 어긋나고 중첩되고 지워지고 다시 그려지는 이유는, 이 그림이 이미 완성된 정체성을 묘사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체성이 막 형성되기 시작하던 그 혼란 이전의 지층, 여전히 미정의 상태로 남아 있는 긴장과 과잉을 가장 거칠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바스키아의 물질적 회화 방식을 알아 둘 필요가 있는데 하나는 팔림프세스트 (Palimpsest) 기법이다. 원래 pergament(양피지)에 쓰여 있던 글을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쓰는 고대의 문자 기록 방식이었으나 현대 미술에서는 지우고, 덧쓰고를 반복함으로써 흔적이 여러 층으로 남는 회화적 기법을 의미한다.

바스키아의 그림에서 보이는 지워진 문자나 긁힌 자국들, 더러는 반쯤 남은 단어들을 덧칠로 가려진 문장들 모두 팔림프세스트적 층위라고 부른다.

바스키아는 스스로를 “화면 위의 작가(writer)”라고 부르듯, 회화를 글쓰기처럼 다뤘고, 지우개로 삭제하는 대신 페인트로 덧칠하여 ‘기억의 흔적’을 남기는 방식을 즐겨 썼다.


또 다른 기법으로 바스키아는 튜브에서 바로 짜낸 물감이 캔버스 위에 쌓이고, 그 위에 다시 색들이 발라지듯 수차례 겹쳐지고, 표면이 얇게 말라 굳기 전에 또 다른 선과 색이 밀고 들어와 층을 무너뜨리고 다시 구축하는 그 과정 전체가 하나의 결정적 의미를 갖는다.


그 두터운 표면 - 마치 뼈와 살이 동시에 밖으로 돌출되는 듯한 그 표면은 바스키아의 해골 얼굴이 미술사에서 흔히 말하는 도상학적 “해골”, 즉 죽음의 상징, 메멘토 모리, 바니타스적 덧없음의 은유를 되풀이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에 있다. 형태가 형태로 굳어지기 이전의 ‘메타안정적 상태’를 물질적으로 체현한 것이며, 해골이라는 이미지가 갖는 상징적 의미는 이미 그 두터운 층들 사이에서 해체되고, 재조립되며 상징의 자리를 잃어버린다. 미술사에서 해골은 대체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윤리적 경고로 기능했다.

도상학적으로 해골은 종종 시간의 무상함, 인간 육체의 덧없음, 혹은 영원한 심판을 예고하는 기호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바스키아에게서 해골은 더 이상 그런 죽음을 의미하는 기호의 체계에 속하지 않는다. 의미가 응결되기 전 단계의 진동, 상징이 형성되기 이전의 장에서 아직 굳지 않은 정동의 압력들이 표면으로 솟아오른 흔적들로 보인다.


그의 그림은, 완성된 인물의 얼굴이 아니라, 얼굴이 되기 직전의 긴장, 내부에 과잉된 에너지, 정동의 압력들이 서로 충돌하며 방향을 찾지 못한 채 연속적으로 개체화를 몰아가는 장면을 질료 자체의 변성으로 드러낸다. 그래서 바스키아의 얼굴이 “해골처럼 보이는 것”은 정동이 자신을 지탱할 형식을 찾지 못해 잠시 ‘해골적 형상’으로 스쳐 지나가기 때문이라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바스키아의 얼굴은 “그려진 얼굴”이 아니라 페인트가 스스로 밀고 올라와 만들어진 층들의 흐름과 파열이며, 내부의 에너지가 잠시 나비효과처럼 표면으로 번쩍 드러난 정동적 흔적 그 자체가 된다.


정동은 언어로 이미 이름 붙여진 감정보다 먼저 오는, 그러나 그 감정의 배경이 되는 더 넓은 장의 상태이다. 바스키아의 얼굴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두려움”, “분노”, “슬픔” 같은 명명된 감정이 아니라, 그런 모든 감정들이 아직 분리되기 전의 혼합된 과잉이다. 그 과잉이 얼굴이라는 최소한의 형식을 빌려 잠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래서 그 얼굴은 해골 같고, 동시에 마스크 같으며, 동시에 낙서 같고, 동시에 아이의 그림 같기도 하다.


정동은 언제나 개체와 환경의 경계에서 작동한다. 바스키아의 얼굴은 혼자 부유하는 초상이 아니라, 뉴욕이라는 도시, 자본주의적 속도, 인종적 폭력, 예술 제도의 제도화된 시선, 이런 모든 것들이 그의 몸과 의식을 관통하면서 만들어낸 결과이다. 다시 말해, 이 얼굴은 한 개인의 내면을 그린 것이 아니라, 한 시대의 정동 구조가 한 인물의 얼굴 위에서 응축되어 나타난 이미지이다.


바스키아의 절규는 그래서 “나의” 불안이 아니라, 나를 구성하면서 동시에 나를 해체하는 세계의 불안이 나를 통해 터져 나온 장면이다. 시몽동의 언어로 말하면, 이 얼굴은 개체화의 긴장이 극에 달한 지점, 더 이상 지금의 상태를 유지할 수 없기에 다른 상태로의 전이를 요구하는 임계점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세계가 낯설어지는 순간- 하이데거의 불안으로 읽는 뭉크 - 세계가 멀어질 때 시작되는 붕괴의 정동


많은 사람들이 이 그림 앞에서 직관적으로 떠올리는 단어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불안이다. 그런데 하이데거가 말하는 불안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무언가가 두렵고 걱정스러운 심리 상태’에서 오는 두려움과는 조금 다른 층위에 있다.

존재가 자신과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계기이다. 일상적인 삶에서 우리는 늘 어떤 것들과 분주하게 관계 맺으며 살아간다. 해야 할 일, 만나야 할 사람, 처리해야 할 업무 등… 이런 것들 속에서 우리는 세계를 ‘쓸모 있는 것들의 질서’로, 자신을 ‘그 질서 안에서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로 경험한다.

-여기서 말하는 ‘세계’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사물과 사람을 의미 있게 만나는 전체적 구조, 즉 의미가 펼쳐진 장(場)을 말한다.-


그리고 불안은 그 장이 한꺼번에 무너져 버리는 순간을 의미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그 순간은, 일상의 친숙한 세계가 갑자기 의미의 빛을 잃고 낯설어지게 되는 경험을 이야기한다. 무엇도 특별히 나를 공격하지 않는데도, 모든 것이 한꺼번에 멀어지고, ‘세계 전체’가 나에게서 물러나는 듯한 느낌이 찾아오는 것이다. 불안의 핵심은 “무엇 때문에”(wovor)가 두려운지가 아니라, “전체적인 세계-내-존재 그 자체”가 근거 없는 공허 위에 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는 데 있다.

-불안은 wovor가 없다는 것은 wovor = ‘무엇을 앞에 두고’, ‘무엇 때문에’, ‘무엇을 대상으로’를 의미한다. 즉 wovor는 두려움의 ‘대상’이 존재한다. 그와 달리 불안은 특정 대상이 없고, 이유를 지목할 수 없고 “전체적인 세계-내-존재 그 자체”가 흔들리는 감정이다.-


뭉크의 절규는 바로 이 장면을 정면으로 가시화한다.

다리 위의 인물은 구체적인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은 평온하게 자기 길을 가고 있고, 누군가가 칼을 들고 그를 향해 달려오는 것도 아니며, 그의 발밑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은 공포가 인물을 휩쓸고 있다. 이유를 가리킬 수 없는 불안, 대상이 없는 공포, 바로 그 점에서 이 장면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불안의 구조에 닿아 있다.


하늘은 붉게 일렁이고, 피요르드의 수면은 물이 아니라 녹아내린 색채의 흐름처럼 보이며, 다리의 선조차 안정적인 구조가 아니라 파동처럼 흔들린다. 풍경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정동의 파장이 되어, 인물의 내면과 동기화되고 있다. 일상적인 풍경의 공간성이 붕괴하고, 대신 불안의 리듬이 공간의 구조를 대신하는 순간이다.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이 인물은 더 이상 ‘세계 안에서 어떤 일을 하는 사람’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그는 ‘세계-내-존재’로서의 일상적 자리에서 떨어져 나와, 세계 전체가 자신으로부터 물러나고, 자신 또한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기이한 이중의 멀어짐을 경험한다. 그래서 그는 귀를 막은 채 입을 벌리고 있지만, 그 입에서는 어떠한 ‘말’도 나오지 않는다. 언어가 끊어지고, 의미가 붕괴하는 자리에서 터져 나오는 것은 더 이상 “이야기”가 아니라 어떠한 떨림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듯 “세계는 후퇴한다(Die Welt entgleitet).” 사물은 더 이상 ‘쓸모 있는 것’으로 다가오지 않고, 주변은 낯설게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상태다. 세계는 나를 향한 모든 친숙함을 거두어들인다.

바로 이 구조가 뭉크의 노트에서 감각적으로 드러난다.


“두 친구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이 피처럼 붉게 변했다. 나는 지쳐서 울타리에 기대었다. 푸르스름한 검은 피오르와 도시 위로 피와 불의 혀가 있었다.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고, 나는 불안에 떨며 서 있었다. 그리고 자연을 통과하는 무한한 비명을 느꼈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길을 걷고 있었고, 하늘은 붉었으며, 도시는 아래 있었고, 피요르드는 고요히 펼쳐져 있었다. 즉 ‘세계’는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어떤 계기에서, 어떤 틈에서, 그 세계는- 갑작스럽게 나에게서 멀어지고, 그 대신 자연 전체가 나를 향해 비명을 지르는 듯한 감각이 밀려온다.


하이데거의 언어로 말하면 “세계가 물러난 자리에, 존재의 없음이 드러난다.”

세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더 이상 나를 붙들어주지도 않는다.

사물은 ‘의미 있는 것’을 넘어 “있을 뿐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때 인간은 세계의 의미망 속에 편안히 놓여 있던 일상의 자리에서 미끄러져 떨어져 나간다.


“나는 자연을 꿰뚫는 거대한 비명을 느꼈다.”

이것이 바로 그 미끄러짐의 체험이지 않을까?

세계가 의미를 잃고 물러난 자리에서 들려오는 것은 인간의 말도, 심리적 감정도 아닌, 존재 그 자체가 내뱉는 비명, 그 비명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근거 없음의 심연”(Abgrund)의 울림일 것이다.

뭉크는 그 비명을 ‘외부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적었지만, 사실 그 비명은 세계가 물러난 틈에서 자신의 존재가 아무것에도 기대지 못하고 드러나는 자기 존재의 울림이다.
그래서 그 비명은 밖에서 울렸지만 안에서 들렸고, 자연의 울음이었지만 동시에 나의 울음이었으며, 세계의 붕괴이자 나의 붕괴였다.

하이데거는 이 순간을 “존재가 자기 벗겨진 자리로 던져지는 순간”이라고 불렀다.

뭉크는 이를 미술가의 언어로 “나는 자연을 꿰뚫는 비명을 느꼈다.”로 기록된다.


〈절규〉의 주인공이 귀를 막고 있음에도 비명을 더 크게 듣는 이유이며, 하늘이 붉게 불타오르는 이유이며,

공기가 뒤틀리고 공간이 흔들리는 이유이다.

그는 자연이 낸 비명을 들은 것이 아니라, 세계가 물러난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존재의 공허를 들은 것이다.

이때 자연은 더 이상 ‘배경’으로 있지 않다.

하늘은 멎어 있는 듯 붉게 일렁이며, 피요르드의 수면은 물이 아니라 어떤 거대한 생명체의 피부가 뒤집히듯 울컥거리고, 바람은 비명의 울림으로 온다. 자연은 평온한 외관을 유지하려 하지만, 그 평온의 얇은 막 아래에서는 세계 전체가 신음하듯 갈라지고 뒤틀리는 소리가, 인물의 내면과 공명한다.


불안은 이때, 그 세계를 이루고 있던 자연마저도 더 이상 인간에게 말을 걸지 못하고, 비명을 삼키는 거대한 존재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바로 그 틈새에서 터져 나오는 질문이 있다.
“나는 누구이며, 이 세계는 무엇인가?”

그 질문은 더 이상 지적 사유의 문장이 아니라, 붉은 하늘과 울렁거리는 물결과 공기 자체가 함께 끓어 올리며 인간과 자연 모두의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동시에 올라오는 비명, 이미 언어가 되지 못한 음향의 물질적 흔들림이다.


불안은 이때, 불쾌한 감정으로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나는 누구이며, 이 세계는 무엇인가”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일상적 위장이 걷혀나간 채 드러나는 순간이다.


뭉크의 절규는, 한 인간이 그 질문 앞에서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순간, 즉 어떤 것도 나를 지탱해주지 않는 것 같은 무중력 상태의 존재론적 장면을, 색채와 선의 변형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두 개의 절규 - 바스키아와 뭉크, 개체화와 붕괴의 얼굴


이제 다시 두 그림을 나란히 떠올려 본다.

바스키아의 얼굴은 폭발하는 개체화, 뭉크의 얼굴은 붕괴하는 세계-내-존재의 장면으로 읽혔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내려가 보면, 두 그림은 시몽동과 하이데거의 사유가 서로 교차하는 접점을 형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시몽동에게 정동은 개체와 세계가 분리되기 이전의 떨림이라 했었다. 바스키아의 작품에서 우리는 이 떨림이 아직 하나의 안정된 개체로 응고되지 못한 채, 여전히 자신을 찾아가고 있는 존재의 긴장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이 개체화의 긴장은, 사실상 세계와의 관계를 새롭게 짜야하는 압력에서 비롯된다.


하이데거에게서 불안은, 세계의 의미의 구조가 붕괴하면서, 존재가 더 이상 익숙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과 세계를 이해할 수 없게 되는 순간이다. 뭉크의 절규는 바로 이 순간, 즉 세계 전체가 무의미의 색으로 물들어가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 두 입장을 연결해 보면 뭉크의 절규는 이미 형성된 세계-내-존재의 구조가 무너지는 순간, 즉 개체와 세계의 관계가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는 붕괴의 정동을 드러낸다.


바스키아의 얼굴은 붕괴 이후 혹은 구조 밖에서, 새로운 개체화를 향해 정동이 폭발적으로 재배치되는 과정,

즉 아직 고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라는 존재가 만들어져 가는 형성의 정동을 드러낸다.

하나는 해체의 장면, 다른 하나는 형성의 장면이지만, 둘 다 “기존의 질서로는 더 이상 이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이미지이다.


하이데거의 불안은 익숙한 세계가 더 이상 나를 지탱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존재 자체가 무근거성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시몽동의 정동은 바로 이 무근거성이 새로운 개체화의 조건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개념이다.


이렇게 보면 뭉크와 바스키아는, 서로 다른 시대의 언어와 미학 속에서, 하나는 해체의 얼굴, 다른 하나는 형성의 얼굴을 통해, 같은 존재론적 진실을 서로 다른 문장으로 말하고 있는 셈이다.




예술, 존재의 실험 장 - 두 얼굴


결국 중요한 것은 이 두 절규가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이다.

우리는 종종 예술작품을 ‘감정의 표현’으로 이해하지만, 시몽동과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보면, 이 두 그림은 감정을 묘사한 것이라기보다, 존재가 세계와 맺는 관계가 붕괴하고 다시 구성되는 과정 자체를 실험하는 장이라고 할 수 있다.


바스키아의 얼굴은 정동의 가속화 내지 증폭, 연결과 접속의 에너지적 확산의 끊임없는 기계적 배치이자 횡단이다. 세계의 구조가 나를 규정하기 전에, 나는 이미 정동의 차원에서 세계와 얽혀 있는 존재였다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완성된 주체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상처와 폭력, 욕망과 저항의 긴장 속에서 끊임없이 다시 만들어지는 과정 그 자체라고.


뭉크의 절규는 세계가 언제나 나를 따뜻하게 품어주는 집이 되는 것은 아니며, 어느 순간 그 세계는 낯선 붉은 하늘로 변하여 나를 한 점의 존재론적 고립으로 내몰 수 있다고. 그때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 있는가”라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이라고. 예술은 색과 선과 정동의 구조를 통해 사유하게 만든다.


바스키아와 뭉크의 두 절규는, 두 개의 얼굴이 제기하는 미학적 차원의 존재론적 질문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너 역시, 이미 만들어진 어떤 존재가 아니라, 세계와 함께 흔들리며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냐고.” 이 질문을 들은 사람은, 더 이상 이 두 그림을 ‘심리적 불안의 표현’으로만 보지 못하게 된다.

대신 그 얼굴들에서 자기 자신의 떨림을,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정동을, 그리고 아직 말로 다 붙잡히지 않은 존재의 가능성을 조금은 더 선명하게 감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예술 앞에 서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예술은 우리를 위로하거나 교훈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존재의 실험 장으로 우리를 초대함으로써,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믿었던 ‘나’와 ‘세계’의 관계를 다시 묻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바스키아와 뭉크의 두 절규는, 그 실험 장에서 마주친 두 개의 서로 다른 문장, 그러나 같은 존재론적 떨림의 두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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