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마르셀 뒤상, AI
AI 이후, 저자·과정·사건
체코어로 생성된 AI 시를 원어민 독자들이 인간의 시와 구별하지 못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체코 카를로바 대학교 언어학과 연구팀이 체코어 원어민 126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실험에서, 참가자들의 평균 정답률은 45.8%로 무작위 추측 수준보다도 낮았다. 특히 현대시의 경우 정답률이 40.2%로 더 낮아, AI가 체코 현대시를 매우 설득력 있게 모방했음을 보여준다. 참가자의 문학적 배경이나 시 읽기 경험은 정답률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흥미로운 점은 평가의 편향이었다. AI가 실제로는 인간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참가자들이 해당 작품을 ‘AI 작품’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평가가 급격히 낮아졌다. 반대로 인간 작품이라고 믿은 시는 실제 작가와 무관하게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는 시의 품질과 예술적 가치가 동일하지 않으며, 독자의 믿음과 저자 인식이 평가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번 연구는 영어 중심의 AI 훈련 환경 속에서도, 저자원 언어인 체코어에서 AI가 최소한의 프롬프트만으로 인간 수준의 시를 생성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동시에 이 실험은 생성형 AI 시대에 예술의 가치는 작품의 완성도만이 아니라 저자의 존재, 창작 과정, 그리고 독자의 인식에 의해 형성된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낸다. 이는 롤랑 바르트가 주장한 '저자의 죽음' 이론과 달리, 현실의 독자들은 여전히 저자의 존재를 중요하게 여기며, 저자를 찾고 있다는 역설적 현실을 보여주며, 향후 AI 생성 작품의 표기와 투명성 문제에 대한 논의를 요구한다.
<기사 일부 발췌>
체코어로 인간이 쓴 시와 AI가 생성한 시를 체코원어민이 얼마나 정확하게 판정해 내는지 조사한 실험에서 실험참가자들 절반이상이 정확하게 구별해내지 못했다는 발표는 기술의 진보를 알리는 흥미로운 뉴스라기보다, 예술의 정의가 이미 오래전부터 균열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사건적 장면에 가깝다. 보다 깊이 있게 이 실험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예술을 작품의 질이라는 비교적 안전한 기준으로 판단해 왔다고 믿어 왔지만, 실제로는 오래전부터 그 기준을 떠나 훨씬 불안정한 공간에서 예술을 감각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독자들은 AI가 쓴 시를 더 낫다고 선택했음에도, 그것이 AI생성물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평가를 바꾸었다. 여기에는 기술에 대한 거부감이라는 설명만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더 근본적인 미학적 동요가 숨어 있다.
이 동요는 “AI는 인간이 아니다”라는 작가의 정체에 관한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예술을 예술로 성립시키는 어떤 조건, 더 말하자면 예술을 예술로 멈추게 만드는 조건이 지금 이 순간 흔들리고 있다는 감각에서 비롯된다. 시의 운율은 정확했고, 의미는 충분했으며, 상상력 또한 결핍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독자들은 AI의 시라고 밝혀지는 순간 그 시를 다시 가치 낮은 대상으로 재분류한다. 이때 무너진 것은 작품의 완성도라기보다, <예술을 예술로 감각하게 해 주던 존재의 전제 조건, 곧 “이 문장을 통과한 삶”을 상상하게 하던 어떤 경로를 포함하도록 요구받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AI가 쓴 시를 통해서는 어떤 삶이 통과했는지를 더 이상 상상하기 어려워지고, 그 상상 불가능성이 곧바로 가치 하락으로 이어진 사건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몇 주째 이 기사의 내용이 나를 다시 한번 뒤샹의 변기 앞에 세워놓고, 달과 6펜스를 소환하게 만들었다.
이 지점에서 예술은 결과물로만 정의되기 어려워진다. 예술은 잘 만들어진 것이기 이전에 어떤 존재가 세계와 충돌하며 남긴 흔적이라는 감각으로 우리를 이동시킨다. 이 흔적은 작품의 내부에 명시적으로 표기되지 않는다. 오히려 작품의 외부, 그 작품을 둘러싼 삶의 밀도, 실패와 고독, 선택과 단절의 궤적 속에서 간접적으로 감지된다. AI 시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이유는 형식적으로 예술의 요건을 충족하면서도, 그 흔적의 경로를 끝내 제공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우리가 예술을 평가할 때 실제로 무엇을 보고 있었는가'이다. 우리는 늘 작품을 보고 있다고 생각해 왔지만, 실제로 보았던 것은 작품 뒤에 놓인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한 문장, 하나의 회화, 그리고 어떤 선율의 리듬과 몸짓이 우리에게 도달하기까지 소요된 망설임의 시간들, 버려진 초안의 층위들, 실패한 시도들이 남긴 흔적들, 그 실패를 견디며 다시 쓰는 과정의 리듬. 예술은 이 모든 과정이 압축된 자리에서 비로소 감각된다고 할 수 있다. AI 생성물인 시는 처음에는 훌륭한 결과물로 다가왔지만 그 결과에 이르는 시간의 두께가 감지되기 어려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도착하기 때문에 낮은 평가를 받은 것일 것이다.
몇 주째의 예술에 대한 나의 고민을 시간이라는 키워드로 조금 더 들여다보면, 여기에는 서로 다른 세 가지 시간 체제가 겹쳐 있다.
(이건 개인적 해석과 사유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 벤야민이 말한 경험의 시간이다, 사건이 곧바로 소통되지 않고 침전되며 이야기로 응결되는 시간이다.
둘째, 시몽동이 말한 개체화의 시간이다. 불균형이 유지되며 존재가 자기 자신에게 도달해 가는 과정의 시간이다.
셋째, 생성형 AI가 만들어내는 가속의 시간이다, 산출이 끊임없이 갱신되고 곧바로 다음 산출로 밀려가며 ‘머무름’이 짧아지는 시간이다.
이 세 가지 시간은 서로를 완전히 대체하지 않는다. 다만 오늘의 창작 현장에서는 이 시간들이 한 작품의 주변에서 서로 다른 속도로 부딪히며, 그 충돌이 예술의 감각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이 불안은 전혀 새롭지 않다. 우리는 이미 한 세기 전, 뒤샹의 변기 앞에서 유사한 상황을 겪었고 또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샘』은 예술적 숙련의 산물로도, 미적 감동을 유발하는 대상으로도 소개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그 변기는 예술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흔들었다. 뒤샹이 수행한 것은 “이것도 예술이다”라는 선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술이 어디에서 발생하는지를, 다시 말해 예술이라는 범주가 발생하는 조건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행위였다. 그는 예술을 대상 내부로부터 끄집어내어 선택, 맥락, 제도, 질문의 장으로 이동시켰다.
뒤샹 이후 예술은 미적으로 뛰어난 대상만을 의미하지 않게 된다. 예술은 감각의 교란이자 사유의 재배치이고, 작품은 그 재배치가 발생한 흔적이다. 이때부터 예술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인가를 예술로 보게 만드는 조건'을 흔드는 사건으로서 기능한다. 뒤샹의 변기는 아름다움을 제공하지 않았지만, 그 변기 앞에서 우리는 판단을 유예하며, 예술이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묻게 되었다.
이렇듯 예술은 대상에 머무르기보다 질문이 발생한 자리, 감각과 사유가 어긋나는 틈에서 발생한다.
이 틈은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의 이동과도 맞닿아 있다. 아우라는 작품의 고유성에만 머물지 않고 관람자와 대상 사이에 형성되는 거리, 시간, 망설임의 구조로 이동한다. 뒤샹의 변기는 그 거리를 파괴한 사건으로 읽히기 쉽지만, 더 정확히는 거리가 어디에서 생성되는지, 멈춤이 어떤 방식으로 발생하는지, 그 구조를 노출시킨 사건으로 읽을 수 있다. 변기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앞에서 우리는 멈춰 서서 '어디까지가 예술인가?', ' 예술은 친숙하고 아름다운 것이어야 할까?', ' 예술은 우리에게 심미적 경험을 촉발시켜야 할까?'라는 질문을 발생시킨다. 그 유예의 시간, 그 멈춤의 구조가 곧 아우라의 다른 형태로 우리에게 도착한다.
AI 시 실험은 이 뒤샹적 질문을 다시 한번, 더 급진적인 방식으로 되살린다. 뒤샹의 변기에서 인간의 선택과 의도가 극단적으로 강조되었다면, AI 시에서는 의도의 주체가 흐릿해진다. 우리는 “누가 이것을 예술로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에 예전처럼 단단한 답을 제시하기 어려워지고, 그 불확정성이 곧바로 가치 판단의 흔들림으로 이어진다. AI 시는 뒤샹 이후 예술이 끝내 도달하게 될 경계선을 우리 앞에 드러낸다. 그러면 여기에서 또 다른 질문이 생긴다. 예술이 사건이라면, 그 사건을 발생시키는 주체의 자리에는 무엇이 놓이는가?
이 질문은 인간 중심주의를 옹호하거나 폐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술이 어떤 종류의 시간과 실패를 필요로 하는가라는 문제로 이동해서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은 언제나 중단과 실패의 흔적을 포함한다. 예술은 잘 만들어진 것의 총합으로 닫히기보다, 잘 되지 않았던 것들이 끝내 사라지지 않고 남긴 긴장으로 열린다. 이 긴장은 결과의 결함이 아니라, 과정의 잔여다. 과정의 잔여가 남는 한, 작품은 닫히지 않고 계속해서 관람자의 시간을 붙잡는다.
(나에겐 세잔의 사과가 있는 정물화가 그러하다. 세잔은 다시점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어도 결과의 결함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가 본다는 것이 실은 매우 흔들린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예술이 사건이라면, 그 사건을 발생시키는 주체의 자리에는 무엇이 놓이는가?
『달과 6펜스』의 마지막 장면은 이 질문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뒤집는다. 스트릭랜드는 평생 완성한 벽화를 불태워 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작품은 존재했고, 그 작품은 걸작으로 추정되며, 세계의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작품은 세계에 남겨지지 않는다. 감상과 평가와 유통과 역사가 모두 거부된다. 예술은 결과로써의 작품을 포기하고, 행위로써의 삶을 남긴다. 그 순간 예술은 침묵의 형태로 등장한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예술은 자기 자신에게 도달한다.
스트릭랜드의 그림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끝없이 질문을 생성한다. 우리는 그 그림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 그림이 통과했을 삶의 시간을 상상하게 된다. 뒤샹이 예술을 제도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었다면, 스트릭랜드는 예술을 제도의 바깥, 타인의 시선 바깥으로 끝까지 끌어낸다. 한쪽에서는 “이것을 예술로 볼 것인가”가 발생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아무도 보지 않아도 예술이 발생하는가”가 실천된다. 그리고 AI 시는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우리를 멈춰 세운다. 작품은 설득력 있게 도착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주저한다.
이 주저함은 약점으로 읽히기보다, 예술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알리는 징후로 읽힌다. 예술은 망설임 속에서 발생한다. 너무 빨리 이해되는 작품은 금세 닫히고, 너무 쉽게 소비되는 작품에게는 질문을 남기기 어려워진다. 질문을 남기지 않는 완성도는, 예술이 머물 자리를 줄인다. 그래서 지금 이 세 장면은 하나의 질문으로 겹쳐진다. 예술은 대상의 질에 있는가, 사유의 맥락에 있는가, 삶의 개체화 과정 그 자체에 있는가. 이 질문에 하나의 답을 고정시키는 순간 예술은 다시 좁아진다. 오늘날 예술은 결과, 맥락, 존재의 세 층위가 끊임없이 어긋나며 교차하는 지점에서 감지된다.
AI와 비개체화
예술은 왜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만 발생하는가
질베르 시몽동에게 개체는 완성된 결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개체를 고정된 실체로 이해하는 전통 형이상학을 비켜서며, '존재'를 '항상 진행 중인 상태, 곧 개체화(individuation)의 한 국면'으로 사유한다. 시몽동은 이렇게 말한다.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개체화가 있을 뿐이다.”
(L’individu n’est pas, il y a seulement de l’individuation.)
이 문장은 예술을 이해하는 좌표를 이동시킨다. 예술 작품은 완성된 개체로 닫히기보다, 개체화가 아직 닫히지 않은 상태, 긴장이 풀리지 않은 존재의 흔적을 품는다. 작품은 결과처럼 보이지만, 어떤 불균형이 아직 정지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표면으로도 읽힌다.
시몽동에게 개체화는 전개되지 않은 잠재성(pre-individuel)을 전제로 한다. 개체는 이 잠재성을 완전히 소진하지 않으며, 잔여를 품은 채 존재한다. 그 잔여가 예술의 자리다. 예술은 안정된 균형 상태를 보여주기보다, 균형으로 이행하기 직전의 떨림, 아직 결정되지 않은 긴장을 감각하게 한다. 그래서 예술은 즉각적으로 이해되기를 추구하기보다는, 이해를 늦추며 관람자의 시간을 요구한다.
이에 비해 생성형 AI의 생성 방식은 시몽동의 개체화 개념과 어긋난다. AI는 결과를 산출하지만, 불균형을 오래 붙잡는 방식으로 자신을 조직하지 않는다. 수정이 가능하고 개선은 반복되며 오류는 다음 시도로 흡수된다. 시몽동의 언어로 말하자면, AI는 전개되지 않은 잠재성을 “견딤”으로서 품기보다, 산출로 치환하며 지나간다. 그러나 예술은 바로 그 견딤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잘 되지 않음이 오래 지속되는 시간, 방향을 잃은 채 머뭇거리는 시간, 의미가 응결되기 전의 상태가 유지되는 시간. 예술은 그 시간 속에서만 발생한다.
창작하는 과정을 상정해서 들여다보면 이 차이는 더 확연하게 드러난다. 창작자가 AI를 켠다. 한 줄의 프롬프트를 입력하자마자 열 개의 초안이 나타난다. 그러나 곧 다른 감각이 고개를 든다. ‘더 나은 버전’을 고르는 일은 끝나지 않고, 선택은 점점 얇아지며, 결정은 매번 다음 제안에 의해 유예된다. 문장은 넘쳐나지만, 한 문장을 위해 오래 머무는 시간이 짧아진다. 초안의 층위가 쌓이기보다, 초안들이 서로를 밀어내며 지나간다. 이때 창작자는 결과를 많이 얻는다. 동시에 자신이 어디에서 흔들렸는지, 어떤 불균형을 견뎠는지, 그 흔들림의 이력을 남기기 어려워진다. ‘비개체화’는 이 장면에서 감각으로 도착한다. 결과는 풍부하게 보이지만, 과정의 두께가 얇아진다.
또한, 시몽동은 개체화를 “불안정한 평형(métastabilité)”으로 설명한다. 완전한 혼란도 완전한 안정도 아닌 상태, 불균형이 아직 살아 있는 상태. 예술은 바로 이 메타안정성의 감각을 품는다. 작품은 완성되어 보이면서도, 해결되지 않은 긴장이 남아 있고, 우리는 그 긴장을 감각하기 때문에 작품 앞에서 멈춘다. 그래서 AI 이후 예술의 질문은 이렇게 바뀌게 된다.
-예술은 '얼마나 정교한가'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불균형을 유지하는가'.
-예술은 '얼마나 많은 의미를 제공하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잠재성을 남겨두는가'.
신유물론 이후에도 예술은 왜 ‘시간’을 요구하는가
생성형 AI를 둘러싼 예술 담론에서 포스트휴먼과 신유물론의 언어는 자주 호출되는 편이다. 인간 중심주의가 해체되어야 하며, 창작은 인간 주체의 특권으로만 남지 않으며, 알고리즘과 데이터와 기계적 연산 또한 행위자로 세계를 구성한다는 논의다. 이 담론은 오래된 예술 개념을 흔든다.
다만 이 담론이 생성형 AI 예술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기울수록, 하나의 질문이 상대적으로 가볍게 지나간다. '이 얽힘은 어떤 시간을 통과하는가'이다.
포스트휴먼 담론은 주체의 재배치에 있다. 다중의 행위자나 분산된 의도, 네트워크 효과들이다. 그러나 그 행위가 축적되는 방식은 실패가 머무는 시간과 불균형이 지속되는 국면에 대한 질문을 쉽게 평면화시킨다. 주체가 분산되는 일이 곧바로 예술의 시간 구조를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예술은 “누가”의 문제를 넘어 “어떤 시간”의 문제를 요구한다.
벤야민에게 기술은 감각의 질서를 바꾸는 힘이었다. 그는 기술복제가 예술을 민주화한다고 말하면서도 경험의 빈곤을 경고했다. 사건이 늘어나지만 침전은 얇아지는 현상. 생성형 AI 예술은 이 구조를 더 가속한다. 이미지와 텍스트는 무한히 생성되지만, 그 앞에서 멈추는 시간은 짧아진다. 신유물론이 물질의 능동성을 강조할 때, 벤야민이 붙잡은 것은 물질의 활동성만이 아니라 시간의 두께였다. 아우라는 사물의 신비로 남기보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도달이 늦어지는 거리의 감각으로 우리에게 온다. 이 거리는 원본 숭배가 아니라, 경험이 쉽게 소모되지 않도록 붙잡아두는 장치이며, 그 장치는 오늘 AI의 속도 속에서 다시 조직될 필요가 있다.
포스트휴먼 담론과 벤야민–시몽동의 사유는 이 지점에서 비판적으로 접속한다. 인간 중심주의의 해체는 중요한 과제다. 동시에 예술이 사건으로 남기 위해 필요한 지연의 구조, 개체화의 메타안정성, 경험의 침전은 사라지기 어렵다. 예술은 인간의 특권이기보다, 개체화가 닫히지 않은 상태의 특권에 가깝다. 이 상태는 인간에게만 열려 있지 않되, 자동으로 부여되기도 어렵다. 이제 예술은 주체의 문제라기보다, 과정이 얼마나 오래 열려 있는가의 문제로 이동해야 한다.
공존 이후의 사유 구조
이제 AI 기술과 인간의 창작이 함께 가는 흐름은 되돌릴 수 없는 조건이 되었고, 그렇다면 질문은 더 이상 “AI가 예술이 될 수 있는가”에 머물기 어렵다. 이때, 질문은 또 한 번 이동한다. 이 결합 속에서 '사유는 어떻게 변형되어야 하는가' ' 예술은 어떤 방식으로 다시 발생하는가'이다.
“불가피”라는 말속에는 두 겹의 현실이 들어 있다. 기술의 현실에서 AI가 창작의 환경이 되었고, 도구를 넘어 동료처럼 배치되는 국면으로 진입했다. 존재의 현실에서 인간은 창작의 유일한 근원으로 서기보다, 과잉된 가능성 속에서 더 치열하게 선택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앞으로의 사유는 “AI가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를 넘어, 가속이 감각과 경험을 어떻게 바꾸는가를 묻는 자리로 이동한다.
‘협업’이라는 말 또한 점검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AI와 인간의 협업은 흔히 생산성의 언어로 정당화된다. 더 빠르게, 더 많이, 더 높은 완성도로. 그러나 예술은 늘 생산성의 언어가 미처 포획하지 못하는 시간의 윤리와 결부되어 있었다. 벤야민의 아우라는 원본성의 신비보다, 멈춤의 구조와, 도달 지연의 구조로 읽힐 수 있다. 그에 반해 AI가 창작 과정에 들어오는 순간, 도달은 빨라진다. 초안은 즉각 나오고, 변주는 무한히 이어지고, 개선은 자동으로 반복된다. 그러니 앞으로의 핵심 질문은 “AI가 예술인가”가 아니라, “가속 속에서 예술이 머무는 시간은 어떤 방식으로 조직되어야 하는가”가 된다.
여기서 시몽동은 더 깊은 층위를 제공한다. 작품은 완성된 개체로 닫히기보다, 개체화가 닫히지 않은 흔적이다. 우리가 작품 앞에서 멈추는 이유는 작품이 “이해하라”라고 명령하기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고 속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AI는 끊임없이 완성을 제공한다. 더 나은 버전, 다음 버전. 이때 인간이 지켜야 할 것은 ‘능력’이 아니라 ‘시간’이다. 인간은 과잉된 완성 속에서 '어떻게 미완의 시간을 지킬 것인가'이다. 이 질문이 곧 개체화의 질문이며, 예술의 질문이지 않을까?
따라서 앞으로의 창작 윤리는 “무엇을 만들 것인가”보다 먼저 “어떤 시간을 남길 것인가”를 묻게 된다. 인간이 AI를 사용해 더 정교한 형식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익숙한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정교해지는 과정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론적 리듬을 잃게 되는가'이다. 인간의 실패는 결과가 나쁨을 뜻하기보다, 판단이 유예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이 지속되는 상태, 불균형이 살아 있는 상태를 뜻한다. 예술은 그 상태를 통과하며 발생해 왔다.
그러니 “함께 간다”는 말은 다시 정의될 필요가 있다. AI는 가속의 기술이다. 인간은 가속을 통과하면서도 지연을 조직하는 방식을 발명해야 한다. 여기서 지연은 게으름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다. 사유가 닫히지 않도록 붙잡아두는 장치이며, 경험이 침전될 수 있도록 확보하는 틈이다.
이때 저자성 또한 다시 쓰일 수밖에 없다. 저자는 결과를 만드는 사람으로 남기보다, 시간을 책임지는 사람으로 이동한다. 무한한 변주 중 무엇을 남길지, 무엇을 버릴지, 어디에서 멈출지, 어느 지점에서 완성도를 포기하고 불균형을 남길지. 저자의 윤리는 이 선택의 자리에서 발생해야 한다. AI 시대의 저자는 무한한 가능성을 소유하기보다, 가능성의 과잉 속에서 폐기의 윤리를 수행하는 사람이다. 예술이 발생하기 위한 시간의 조건 재구성을 실천한다.
결국 우리의 사유가 달라져야 한다는 말은 예술의 정의를 새로 쓰는 일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예술이 발생하는 시간의 정치학을 다시 구성하는 일에 가깝다.
예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오래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질문이 예술의 본질로 한 걸음 더 들어가 '작품 뒤에 놓인 시간'을 향할 때, AI와 함께 가는 창작이 불가피하다는 말은, '예술은 어떤 시간 속에서 발생하는가?'라는 질문을 피하기 어렵다는 뜻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