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

by 록유

눈 오는 날

남부 지방에 살아 몇 년이 가도 눈구경을 하기가 힘들었다. 서너 해에 한 번 올까말까한 그 귀한 눈이 내리는 날이면 어릴 적 추억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다.

10살 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학교가 있는 동네에 살고 있어서 집은 걸어서 10분이면 도착할 정도로 가까웠다. 날씨가 희부옇더니 공기는 차가워졌고 하늘은 낮게 내려왔다.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진 하늘은 무거워보였다.

어느새 하나 둘 눈이 날리기 시작했다. 조금씩 내리던 눈은 뭉치가 커지고 온 세상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와! 눈 오네.”

눈을 싫어하는 어린 아이가 없듯이 나또한 눈을 바라보며 기쁨에 들떴다.

차가운 볼에 눈이 닿으면 금방 녹아버렸지만 그 차가운 느낌이 좋았다. 눈을 맞으며 집으로 가는 길은 즐거웠다. ‘눈이 좀 쌓이면 친구들과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도 해야지’라고 생각하며 걸어갔다. 잰걸음으로 걷다가 천천히 걸었다. 혼자 걸어가는 골목길은 심심했다.

오르막이 나타나자 다리에 힘을 주었다. 눈이 쌓이기 전에 얼른 집으로 가야했다. 하얀 가루가 하늘하늘 내려오는 하늘을 자꾸만 올려다봤다. 세상이 온통 하얀 눈 왕국이 되어가고 있었다. 눈 구경을 하면서 걷느라 걸음은 자꾸만 느려졌다. 머리에는 소복소복 눈이 쌓였다. 헥헥거리며 걸어가는데 저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펑펑 쏟아지는 눈 한가운데를 대야를 머리에 이고 걸어오는 한 사람, 엄마였다.

“엄마!”

늘 집에서 보던 가족을 밖에서 만나면 낯설게 느껴지면서 한편으로는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을 만나는 듯 반갑다. 엄마 어깨에는 소복이 눈이 쌓여 있었다.

“엄마, 어디 가?” “응, 방앗간에 떡하러 가는데. 춥지?”

쫀득쫀득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이 떠올랐다. 엄마는 떡대야를 내려놓고 내 머리위에 쌓인 눈을 털어주었다. 그리고 내 언 볼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엄마의 손도 차갑게 얼어있었지만 내게는 따듯함이 전해졌다. 차가워도 포근한 느낌을 주는 하얀 눈처럼. 엄마의 두 볼도 발갛게 얼어 있었다. 나도 엄마의 볼에 손을 대어볼까 하다가 엄마의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주었다. 엄마가 방긋 웃었다.

“무슨 떡 해?” “백설기.”

엄마는 떡대야를 다시 머리에 이었다.

“나도 따라갈래.”

엄마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엄마 손을 잡고 싶었는데 엄마는 떡대야를 이고 있어서 내 손을 잡을 손이 없었다. 나는 엄마의 치마를 그러쥐었다.

소리 없이 눈이 폴폴 내리고 있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눈에 묻혔다.

그날 엄마의 치마를 그러쥐고 가던 나에게는 백설기 가루 같이 내리는 눈이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차가운 눈을 맞으면서 드는 생각은 아이러니하게도 ‘포근하다’이다. 솜처럼, 솜사탕처럼 폭신폭신하고 부드러워서인가 하지만 기억 속에 어릴 적 엄마와의 추억이 담겨있어서 그런 건 아닌가 싶다.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행복을 찾아갈 때 과거 언저리가 무의식 속에 색채를 남겨 놓는다. 힘이 들거나 고단한 날, 내가 꺼내어 보는 한 장면에 언제나 이날이 들어차 있다. 내 인생을 온돌방처럼 따듯하게 덮혀 주는 사랑의 기억으로 내 삶은 안온해진다.

눈이 오는 날이면 언제나 그날이 떠오른다.

이제는 곁에 없는 엄마가 그리운 날에도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