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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말 Aug 20. 2023

P의 여행법

바도

P의 여행법

     

  MBTI로 사람을 분류하는 것에 딱히 찬성하지는 않지만, 특정한 상황과 관계 하에서는 그 MBTI라는 것이 분명 실질적 효용이 있다는 것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서로 맞지 않는 관계에서 그 원인을 상대방의 인격이 아닌 그저 MBTI의 탓으로 돌리면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것을 막힘없이 쉽게 인정하게 만든다. 물론 서로 안 맞는다고 너무 쉽게 인정해버리는 관계도 쑥쑥 늘어나는 지도 모르지만. 거기까지 생각하면 머리가 너무 복잡해진다. 흐음.     


  사람들은 나를 보고 MBTI를 신뢰하지 않는 MBTI라고 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조금 억울한 기분도 든다. 마치 '이 세상에 반드시라는 것은 없다. 그리고 이 말도 반드시 맞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처럼 끝없는 딜레마의 구렁텅이에 빠진 기분이 된다. 아무것도 인정하지도 반박하지도 못한 채로 머리 속 모터는 핑핑 과열된다. 나는 세심하지 않은 분류가 폭력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사람들을 단순한 유형으로 얼기설기 나누는 것이 마뜩찮다.     


  내가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MBTI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런 나라도 여행을 하다보면 여지없이 알파벳이 불쑥불쑥 떠오르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마음껏 내키는 대로 여행을 즐기고 있다가 '헉 이건 빼도박도 못하게 P잖아'라는 생각을 한다든가, 카페나 공원에 앉아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얼토당토 않는 상상을 하고 있을 때면 'N'이라는 알파벳이 어느새 눈앞에 둥둥 떠다닌다. 마치 중대한 퀘스트를 받아든 게임 캐틱터처럼. 이렇게 나도 슬슬 MBTI의 바다에 푹 빠지게 되는 것일까. 아마도 그때쯤이면 사람들의 관심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가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도 나름 뒤틀린 운치가 있다.     


  지금부터 적을 것은 P의 여행법이다. 오해할까봐 미리 말해두자면 아무리 P라고 해도 여행지에서 어물어물 돌아다니다가, 길거리에서 대충 아무거나 끼니를 때우고, 골목따라 물길따라 가다가 길을 잃고 시간을 허비하기만 하는 사람은 아니다. 물론 가끔은 그렇지만, 대부분 여행지에서는 하루하루가 무척 소중하기 때문에 다들 그럴싸한 계획을 세운다. 하긴 그것은 단순히 나의 'P'력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건 애당초 계획은 이랬다. 이른 아침 신주쿠역 출발. 도쿄 아사쿠사역에 내린다. 푸글렌 카페에 들러서 신선한 커피를 마시고 신사에 도착한다. ‘우나나’라는 유명한 장어 오니기리를 먹고, 나카미세도리라는 고즈넉한 번화가를 구경한다. 시간이 생기면 근처 우에노의 동물원에 간다. 다시 돌아와서 아사히 타워 전망대에서 아사히 생맥주와 얇게 저민 하몽 치즈를 먹는다. 강변에서 크루즈를 타고 오다이바로 넘어가 실물 크기의 건담과 도라에몽을 보고 야경을 감상한다. 라는 것이 애초의 계획이다. 근사하죠? 그렇다면 실제로는 어떻게 되었는가.     

  우선 신주쿠에서 아사쿠사로 넘어가는 시각이 생각보다 이른데다가 알고 보니 중간에 환승도 해야했다. 그래서 나는 우선 우에노 역에 내렸다. 기왕 갈 동물원을 아침에 다녀오겠다는 기특한 발상을 하게 된 것이다. 동물원에 가는 길에 우연히 우에노 공원을 발견. 겨울잠에 들어간 연꽃의 운치있는 갈색 풍경을 질리지도 않고 바라봤다. 몇몇 사람들은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물가에서 대기를 하고, 호수를 촘촘하게 매우고 솟아있는 갈색 풀들은 이른 아침의 햇빛을 받아 복잡한 무늬를 아로 그리고 있다. 연꽃의 개화 시기(7월)의 정반대 계절에 마주한 무수한 연꽃들의 집적은 무언가를 아스라히 시사하고 있는 것만 같다. 아직 그것이 뭔지 모르기에 나는 눈과 코를 열고 다양한 감각으로 받아들여 열심히 기억한다. 어쩐지 그 광경은 다 끝난 연극의 무대 뒤를 연상케 한다.     


  애초 계획과 다르게 공원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내고 우에노 동물원에 들어갔다. 여권을 제시하고 할인 받아 480엔이다. 입장하니 사람들이 입구 근처에서 재차 줄을 스고 대기하고 있다. 어딘가 줄을 서야하는 분위기라 나도 따라 섰다. 알고보니 그 줄은 우에노 동물원의 마스코트 자이언트 판다를 보는 줄. 나도 귀여운 판다는 좋아해서 차분하게 일본인들과 어울려 열심히 관람했다. 10분 대기 후 입장. 여기저기 곳곳에서 카와이 카와이. 일본인들은 동물 구경에도 열의를 다한다. 안경을 꺼내고 발을 동동 구르고 눈시울을 붉힌다. 동물원은 겨울임에도 외투를 벗어야 할만큼 후텁지근 하다. 거기에는 아마도 동물들이 뿜어내는 온기와 사람들이 동물에게 제공하는 순수한 열기 같은 것이 약간은 작용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평일 우에노 동물원을 방문한 이들의 대다수는 초로의 아주머니와 아저씨 그리고 나이 지긋한 할머니들이다. 나는 자이언트 판다 보다도 어르신들을 보면서, 나이 든 사람이 저런 식으로 순수하게 웃을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축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겨울 서광처럼 내리쬐는 태양광을 받는 그들의 모습은 정말로 일종의 은총이 내려오는 것처럼 보인다. 자이언트 판다를 실컷 구경하고 나왔더니 짧았던 대기줄은 불어나서 150분을 기다려야한다는 팻말이 나붙었다. 누군가는 팬더를 보기 위해 동물원에 와서 3시간을 기다리곤 하는 것이다. 귀엽긴 하다만. 여유롭기 동물 구경을 마치고 서쪽 출구로 나온 시각은 11시 30분. 왠지 동물원 근처에서는 흔한 길고양이도 비둘기도 조금 신비롭게 여기게 된다. 그것은 마치 타국의 존재처럼 타종 그 자체가 주는 하나의 신비로움에 대한 재인식이다.

  11시 40분 경에 내가 지나치고 있던 건물은 일본 국립 서양미술관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피카소 특별전이 막바지에 있었다. 기웃기웃 고민하다가 까짓거 보기로 결정. 마침 맞게 관람 시간이라 곧이어 입장했다. 안내문이나 도슨트 설명도 전혀 알아 들을 수 없는 타국에서 전시를 보기는 처음이다. 그래도 예상외로 무척 진귀한 경험이었다. 한국에서 보던 피카소 특별전 보다 작품 셋업도 충실하고 관람 환경도 훌륭했다. 좁은 공간에 꾸깃꾸깃 사람을 집어 넣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도 없어서 마음에 드는 작품 앞에서 오랫동안 시간을 써도 괜찮았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사진도 충분히 찍을 수 있다. 작품에 대해서 따로 할 말은 없지만, 한가지 정말 신기했던 것은 피카소가 그린 뒤틀린 얼굴 회화를 아이폰이 하나의 '얼굴'로서 제대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럴수가. AI 기술력의 발전에 놀라야 할지 피카소의 설득력에 놀라야 할지 좀체 알 수 없는 부분이다.      


  하루 동안에 그 뒤로도 막상 계획에 따른 것은 별로 없다. 아사히 타워는 근처도 못갔다. 명인의 장어 오니기리 대신에 격투기 선수 사장님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두껍고 거친 스테이크 정식을 먹었다. 크루즈를 타고 오다이바로 넘어 갔지만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려서 야경은 못봤다. 시부야에서 늦도록 맥주와 하이볼을 잔뜩 마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에서 긴 하루를 정리하고 있으려니 어쩐지 이런 생각이 든다. 아마도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이렇게 즐거운 하루를 보낸 것은 아닐까. 그대로 이행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저 계획을 세우는 것 만으로도 거기에는 즉흥성을 품을 수 있는 유효한 골조가 생기게 되는지도 모른다. 마치 충분히 긴 목줄을 걸고 마음껏 공원을 뛰노는 강아지처럼. 기본 테마를 끊임없이 변주하여 연주하는 푸가처럼. 기본 골조를 흔들고 우연을 섞으면서 하나의 악곡은 더욱 풍성하고 예상치 못한 깊이를 주는지도 모른다.

  역시 나는 사람의 성향이 MBTI를 그대로 따른다는 것에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다. 그것은 자기 충족적인 예언처럼 미리 정해진 MBTI에 맞춰 스스로의 성향을 조금씩 더 강화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지도 모른다. 나는 'I'니까 사람이 많은 파티에는 안 갈거야. 나는 'T'니까 언제나 이성적으로 사고해. 하면서. 당연히 내가 MBTI에 맞추어 계획을 일부러 어기는 것은 물론 아니다. 실제로도 나는 그런 무계획적인 혹은 반계획적인 성향을 얼마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계획의 영역에 즉흥성을 조금씩 시도해 보면서, 또는 그 반대로 즉흥의 영역에 계획을 얼마간 시도해보면서, 어쩌면 더 복합적이고 개별한 MBTI의 가능성을 시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P'니까 이번에는 계획을 세워봐야지. 나는 'E'니까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도 연습해 봐야지. 하면서. 그렇지만 사람들은 결국 ‘그런 말을 하는 것도 너의 MBTI 특성 중 하나다’ 라고 할지도 모른다. MBTI를 부정하는 MBTI까지 포용할 수 있다니. 역시 MBTI가 인기 있는 이유는 모든 유형이 독립적으로 이해받기 때문일 것이다. 왠지 꽝이 없는 점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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