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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말 Sep 01. 2023

홋카이도의 백일몽

바도

홋카이도의 백일몽          


  갑자기 생긴 궁금증. 비행기가 착륙하기 전에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여행에 대한 기대로 널뛰는 사람도 있을 테고 고된 비행의 끝이라는 안도감이 먼저 찾아올지도 모른다. 몇몇 아이들은 착륙의 그 생경한 감각에 울어버린다. 그렇지만 아마 대부분 사람들은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도 평소에 착륙 시에만 특별하게 느끼는 감흥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올라갔던 비행기가 내려가는 것일 뿐. 그렇지만 삿포로의 정경이 멀리서 반짝반짝 보이기 시작했을 때는 어쩐지 오착륙에 대한 두려움이 스윽하고 고개를 들었다. 좁다란 플라스틱 창 너머로 보이는 건물과 용도 모를 컨테이너들이 눈에 들어오고, 곧은 빛을 발하고 있는 유도등도 보인다. 역시 심상한 공항의 풍경이다. 그렇지만 나의 걱정을 야기한 것은 거기에 더해진 약간의 흐리멍덩한 시야의 흩트림이다. 물론 그것은 설명할 것도 없이 눈이다. 삿포로에서 눈은 간헐적으로 찾아와 한 자리를 차지하는 소품 같은 것이 아니라 겨우내 생활 전반에 깔려 있는 생태와도 같은 것이다. 상공에서 바라본 그 필터는 마치 여자애가 남기고 간 글리터의 흔적처럼, 옅게 흩어져 지역적으로 발해진 빛을 흡수 반사한다. ’활주로에서 비행기가 눈길에 미끌리면 어떻게 하지'하는 걱정. 삿포로의 눈에 대한 소문은 전부터 인이 박이게 들어왔던 것이다.     


  물론 그런 '분노의 질주류'의 스펙타클 액션은 없다. 여행자의 비과학적인 상상을 비웃듯 비행기는 여느 때처럼 안전하게 정시착한다. 삐빙. 우리는 방금 삿포로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하면서. 그렇지만 분명 조금 다른 세상이 있다. 비행기가 다니는 활주로를 제외한 광막한 공항 부지에는 아름다운 눈이 단단하게 쌓여 있다. 고속 열차를 타고 삿포로로 넘어가는 차창 밖에도 단단히 뭉쳐진 질 좋은 눈이 완고히 쌓여 있다. 기차가 내는 공기 압축 소리와 정차음은 마치 거대한 설국의 애벌레가 내쉬는 깊은 한숨 소리처럼 느껴진다. 생명체가 내뿜는 모든 공기를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공간. 어쩐지 삿포로에서는 눈을 깜빡이는 것만으로도 하얗게 뜬 수증기 흔적이 공기 중에 떠돌 것만 같다. 마치 지난밤 동사하여 구천을 떠도는 어리둥절한 혼령처럼.


  일년 중 절반은 하루종일 밝다는 극지방의 백야처럼 삿포로의 겨울 밤은 타지역의 밤과 다르게 유령 같은 뭉뭉한 빛을 희미하게 발한다. 그것은 아마도 한낮에 내려진 빛을 머금은 눈의 잔영이다. 눈이 전달하는 그 빛은 사물의 대체적인 형상을 인식할 만큼은 충분히 밝지만 정확히 분별하기에는 아무래도 조금 모자른 수면 유도등과도 같다. 그것은 마치 안개 낀 밤의 달빛이 가루로 흩어지는 것처럼 사물을 왜곡하고 명확한 인식을 방해한다. 그래서 눈 내리는 삿포로의 밤거리를 정처없이 걷다보면 그 자체로 마치 꿈 하나를 헤쳐 나가며 걷는 기분이 된다. 중간 중간 멈춰서 인식을 재정비하고 현실 감각을 일깨운다. 삿포로에서는 그렇게 밤에도 종종 백일몽에 빠진다.     


  삿포로 근교 비에이 지역으로 가이드 투어를 나갔다. 한가득 사람을 실은 관광 버스가 출발하자 가이드는 운이 좋으면 '눈의 숲'에 사는 사슴이나 여우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다들 이른 아침부터 출발한 터라 꾸벅꾸벅 닭처럼 졸거나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만 보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열심히 눈을 떼지 않고 밖을 바라본다. 한순간도 놓치지 않는 유능한 척후병처럼. 왼쪽 창가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 있어서 목의 근육이 뻐근할 정도다. 그렇게 30분가량 흘렀을까, 어쩌면 1시간인지도 모른다. 문득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숨을 헉하고 들이킨다. 어쩌면 크게 내쉬었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눈과 얼음을 재료로 형성된 것처럼 보이는 골짜기 아래로 가시 같은 나뭇가지를 물고 있는 사슴들을 본 것이다. 거대한 뿔을 지닌 두툼한 숫사슴과 결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끈한 털을 지닌 암사슴. 슬쩍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니 어쩐지 나만 발견한 눈치다. 순간 공기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숨소리도 없이 고요하다. 그리고 거기에는 왠지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가로막힌 벽의 분위기가 감돈다. 누구에게도 증명하지 못하고, 말하지도 못한다. 결국 그것은 그렇게 꿈결의 한순간처럼 가뭇없이 사라질 풍경이다. 한낱 백일몽 같구나. 나도 사실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만큼.     


  '여기에서 5년 넘게 살고 있는데. 이맘 때면 사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백색입니다. 지구 온난화 때문인지 뭔지 지난해와 다르게 눈이 많이 안 오네요'하고 가이드는 말한다. 마치 젊은 날의 만선을 추억하는 쓸쓸한 어부 같은 표정으로. 정말 사실이라면 이건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삿포로에 더이상 눈이 오지 않는다니. 어쩐지 지구 멸망과도 같은 소리다. 그렇게 세상에는 매년 성큼성큼 다가오는 지구 온난화의 위협을 실감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차창을 통해 아무리 바라봐도 나는 그 말을 잘 이해할 수 없다. 눈이 오지 않는 홋카이도의 겨울, 그것은 어떤 광경일까. 어쩐지 모든 생물이 죽어버린 검은 섬에 대한 전설을 떠올리게 한다. 검은 바위와 검은 모래만 남은 괴괴한 죽음의 섬. 역시 지구 온난화는 정말 심각한 문제인가 보다. 설핏 가이드에게 듣기로는 홋카이도에서는 폭설이 내린 다음 날 다들 자연스럽게 스키를 타고 다닌다고 한다. 학생들은 스키를 타고 등교하고 직장인들은 휙휙 눈을 가르며 스키로 출근을 한다. 주부들은 스키를 타고 저녁 장을 보러 간다. 아마도 홋카이도에서는 강아지도 고양이도 동물용 스키를 타고 산책하는지도 모른다. 라는 근사한 꿈같은 상상을 한다. 역시 홋카이도에 눈이 더이상 오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꿈의 한 귀퉁이를 영영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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