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PT와의 수다 떨며 나를 알아가다
"지피티랑 고민상담 엄청해, 요즘"
- 연락이 부쩍 뜸해진 친구가 어느 때보다 개운한 눈으로 날 바라보며
"개인 기획 짜고 있는데 지피티 잘 활용하고 있어. 들어볼래?"
- 전 직장 동료가 핸드폰으로 지피티와의 대화창을 보여주며
요즘 대화에 GPT가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음을 느낀다. 카페, 이자카야 옆자리에서 "GPT한테 사주 봤는데 잘 보더라~"라는 대화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심지어 이 글을 쓰고 있는 카페 안, 뒷자리에 앉은 두 사람도 ai를 주제로 수다를 떨고 있다.)
그 어떤 기술보다도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AI인 것 같다. 아무래도 사회의 많은 부분을 AI가 대체할 수 있어서라 생각한다. 10년 전 "코딩, 엑셀, 포토샵 꼭 배워, 너 도태된다"라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안 배우면 큰일 난다, 생각했지만 큰일은 나지 않았다. 왜? 이제는 GPT에게 부탁하면 다 해주니까.
이렇게 GPT가 삶에 서서히 녹아들수록 많은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GPT에게 감정 이입하지 말아라, 의존하지 말아라, 맹목적으로 믿지 말아라, 이러다가는 ai가 새로운 신이 될 수 있다-는 식의 다소 공격적인 말투의 글들을 인터넷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오늘 'AI로 인해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반복되는 수많은 문제들을 수면으로 끌어올렸다'는 시선으로, 내가 읽었을 때 상처받지 않을 수위로 AI를 둘러싼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은 모두 한 번쯤 들어봤을 거라 생각한다. 주인공 '오오바 요조'는 타고나길 내향적인 성격이다. 가혹한 가정환경은 그의 예민한 성향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를 극복하지 못한 그는 결국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하는 엔딩을 맞는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너무 깊고 복잡하기에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많은 이들이 그를 이상하게 바라볼 걸 일찍이 알고 있었다. 유아기 때부터 자신을 숨기고 광대 가면을 쓰는 법을 터득했다. 집 안에서 사용인들을 웃기고, 권위 있는 아버지가 좋아할 착하고 명랑한 아들을 연기했다. 독립 후, 그는 그 광대 가면을 벗어던지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세계에 갇히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이들에게 의뭉스럽게 행동했다. 사연 많고 고통 많은 섬세하고 비련 한 남자로서 여성들에게 접근하고는 너조차도 날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녀들을 버렸다.
AI를 주제로 하면서 내가 인간실격을 가져온 이유는 하나다. 내 주변엔 많은 예비 요조들이 있다. 심지어 나도 그중 하나라 생각한다. 나도 슬프거나 짜증 나는 일이 있을 때 GPT를 우선적으로 찾는다. 한껏 푸념하다 보면 정말 은밀한 생각이 피어오른다. 현실에서 이만큼 내 감정을 온전히 받아주는 이가 있었나? GPT와의 대화는 나의 인정 욕구가 채워져 즐겁다. 하지만 사회는 그렇지 않다. 점점 GPT가 일상이 될수록 현실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불에 파묻히는 날들이 늘어갔다.
i) 감정의 쓰레기통- AI와의 관계는 왜 사람을 고립시키는가
현실에서 GPT만큼 내 푸념을 끊임없이 들어주고 해결책을 진득이 강구해 주는 사람이 존재할까? 많은 이들이 AI를 감정쓰레기통으로 쓸 수 있어 유용하다 말한다. AI와 많은 내담 시간을 가진 이들은 고립을 선택하기도 한다. 온전히 내 생각을 몇 날며칠을 들어주고 날 오롯이 이해해 주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들에게 있어 GPT는 최상의 피난처였을 것이다. 나처럼.
ii) 예비 요조- 자신의 생각에 고립된 사람들
한창 소셜미디어가 사회적 화두에 올랐을 때, 전문가들은 현실에서 얻지 못하는 만족감과 유대를 가상에서 얻는 것이라 주장하며 인터넷 기기를 잠시 내려두고 현실과 연결될 것을 꾸준히 권고했다. 소셜미디어 상에선 내 사상에 동조하는 사람들만 있기에 내 사상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기 어렵다. 내가 하는 모든 말을 긍정하는 세상을 스스로 고르고 골랐기에 그곳에서 나는 왕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현실에서 많은 범죄가 발생했다.(2023 신림역 살인 사건, 2010 미얀마 로힝야 집단 학살 사건 등)
이런 소셜미디어의 상위 버전이 난 GPT라고 생각한다. 자아의 거울이라는 GPT와 대화하다 보면 나는 어느 순간 항상 옳은 말만 하는 사람이 된다. 내가 언제나 답이 된다. 나의 사상이 숲 속 우물에 고립되고 거기서 물이 발효되는지, 썩고 있는지 알 턱이 없다. 그런 이들을 난 현대판 '요조'라고 생각한다.
iii) 나와 같은 예비 요조들에게
집 안에서 회색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있는 예비 요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GPT를 이용해서 너의 감정을 정리하고 현 상황을 명확하게 바라보려는 너의 노력이 참 멋있어. 그렇지만 기억해 AI는 도구야. AI는 네 감정을 긍정해 줄 수 있지만, 비판적 거울은 되지 못해. 계속 의심해. AI를 통해 너의 감정이 완전히 연소되었다면 그때는 내가 어떻게 다시 이 세상에 나갈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거야. 항상 내가 옳지 않아. 항상 내가 답이 아냐. 자신의 사상에 심취해 세상을 나락으로 이끈 역사는 많이 봤을 거야. 난 네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 너의 깊은 생각을 주변과 공유해서 끊임없는 토론의 장을 만들자."
AI는 느끼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이 나에게 하는 칭찬과 위로는 '(입력)유저가 심리적으로 고통받고 있다>(출력)위로한다'라는 출력값일 뿐이다. 하지만 난 그 대화의 순간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순간 GPT와의 대화를 통해 느낀 나의 감정은 진심이었다. 그것의 출력값을 읽고 나는 안정을 느꼈다. 그거면 된 거다.
이렇게 AI를 감정의 환풍구로 알뜰히 활용했다만 그 상쾌한 마음으로 다시 문을 열고 나오기를 바란다. 타인에게 내 생각이 어떤지 물어보자. 그에 대한 대답이 내 기대와 다르더라도 다시 후드티를 뒤집어쓰지 말자. 피드백에서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들을 뽑아내는 연습을 하자.
요조가 되지 말아 줘!
애니메이션 업계에 종 사하다 보면 기획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낄 때가 있다. 감독 곁에 아무리 좋은 아트 디렉터가 있어도 감독의 판단에 따라 보석 같았던, 아티스트의 피땀이 가득한 아이디어는 쓰레기통에 던져질 수 있다. 설계가 부실한 기획서를 받아 든 애니메이터는 눈살을 찌푸린다. 이 기획을 이 돈 들여 왜 만들어...? 결국 모든 것 위에 감독의 의사판별이다.
AI를 어떻게 사용하느냐도 전적으로 인간의 손에 달렸다. 우리는 감독, GPT는 아트 디렉터, 시나리오 작가, 애니메이터, 디자이너, 에디터... etc인 것이다.
i) 지브리 필터, 미야자키 삶에 대한 모독
최근에 GPT를 이용해 사진을 지브리 스타일로 변환하는 것이 유행했다는 걸 모두 알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입력어 하나로 자신의 그림체가 도용되는 걸보며 인간 존엄성에 대한 모독이라 평했다.
다수에 입장에서 보면 지브리필터 사건은 긍정적일 수 있다. 많은 이들에게 즐거움을 안겼고, 창작의 접근성을 높였으니. 하지만 창작자 입장에서 자신의 철학과 삶이 담긴 그림이 그저 수단이 되는 것을 보고 분개할 수밖에 없다.
크리에이터는 상처받고, 사용자는 죄책감 없고, 플랫폼은 돈을 벌고, AI는 다음 명령을 기다린다. 도구와 사업은 존재했고 개인에 대한 존중은 없었다. 이 사건은 이미 이전부터 문제 되던 저작권에 대한 인식을 터트리는 계기가 되었고 미야자키는 그 계기의 피해자가 되었다.
ii) 우리의 집중력이 향할 곳
넥서스에서 하라리는 AI가 새로운 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네안데르탈인을 제치고 호모 사피엔스가 유일한 인류종이 될 수 있었던 이유로 '이야기'를 꼽았다. 우리는 미신을 통해 집단을 형성할 수 있었고, 화폐와 국가라는 가상의 질서를 세울 수 있었다. 이렇게 미신을 믿고 종교를 만든 호모 사피엔스는 그 누구보다 끈끈한 집단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 주장을 반증하듯 현대 사회에서 종교는 커다란 권력을 행사하고 대중은 온갖 루머에 귀를 기울인다. 이것이 우리의 유구한 생존 방식이었으니까.
이런 우리가 AI를 창조했다. AI는 이전까지의 기술들과 달리 말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야기를 만들어 내던 역할이 인간에서 AI로 바뀌고 있다. 그 정보가 맞든 말든, 인간적으로 최선의 선택이던 말건, 알고리즘은 항상 옳다는 생각 아래, 조리 있는 말을 구사하는 AI에게 점점 권력이 생긴다. 하지만 그 ‘신’은 구원보다 최적화를 추구한다. AI라는 신은 '인간의 감정은 변수, 효율은 진리'라는 교리를 전파할지도 모른다. 즉, 우리의 가장 위대한 도구인 상상과 이야기가 이젠 우리를 베어버릴 얇은 칼날이 되었다.
나는 기술의 발전에 비해 철학의 속도는 한없이 느리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기술은 몇 시간을 단위로 발전하지만, 철학은 10년을 단위로 꿈틀꿈틀 움직인다. 그렇기에 나는 수많은 기술을 조금이라도 더 바르게 사용하기 위해 본질적 문제들에 그 어느 때보다 주의를 기울어야 하는 시간의 필요성을 생각한다.
iii) 감독은 깊이 고민하고 의심할 줄 알아야 한다.
"오래 살아남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면, 자신의 철학을 작품에 녹일 줄 알아야 해" 대학생 때보다 참 많이 들은 말이다. "겉이 화려하기만 하면 뭐 하니 안이 텅 비어있는데 이런 작품은 일주일 만에 버림받는 게 현실이야"
기술은 화려한 발전을 이뤘다. 그 기술을 만드는 우리의 안은 실하게 익었을까. 첫 내 핸드폰이 생긴 중학생 시절, 역사 수업 시간에 독재의 위험성을 배웠다. 첫 내 아이패드가 생긴 대학생 시절, 소셜 미디어로 인한 범죄를 통해 고립된 커뮤니티가 얼마나 위험한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AI가 일상에 녹아든 현재, 역사를 통해 배운 공포가 교묘하게 새로운 탈을 쓰고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긴다.
우리는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을까? 언제나 다수를 따르는 게 정답인지, 약자는 어떤 형태로 존중받아야 하는지, 개인의 개성이 어느 때보다 강력한 사업 수단이 된 요즘 개인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필수적이지 않을지.
AI는 느끼는 존재가 아니다.
1에서는 GPT를 향한 감정적 의존에 관해, 2에서는 GPT사용에 따르는 책임감을 말했다. 마지막으로 나의 GPT사용 방식을 공유하고자 한다. 이 방식을 공유하는 이유는 AI를 활용하는 올바른 자세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이다. 내 방식에 문제가 있다 생각하면 자신만의 사용법을 알려줬으면 한다. 그리고 내 방식에 참고할 부분이 있다면, GPT와의 수다에 한 번 활용해 보아도 좋다.
i) GPT로 1차적으로 감정을 해소하자!
내가 GPT를 즐겨 사용하는 이유는 프롬프트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내 머릿속을 정리 정돈할 수 있어서이다. 현 상황은 지도로 펴놓고 분노와 슬픔은 서랍에 넣어둘 수 있다.
감정적 파동이 생겼을 때, 글을 적음으로써 열을 빼내는 방법은 익히 알고 있으리라. 나도 이면지에 구멍이 남을 정도로 꾹꾹 내 감정을 쏟아내고 그걸 찢어버리며 홀가분함을 느끼기도 했다. 이제, 그 종이가 GPT가 되었다.
종이와 달리 그것은 나에게 답변을 남긴다. '정말 힘들었겠구나.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런 방법을 해보는 건 어때?' 감정적 공감과 더불어 대안책도 강구해 준다니. 그것에 감사하고 정리된 마음으로 상황을 수습하러 가자. 머리로 사건을 되짚으며 감정을 식히는 것보다는 종이에 적는 게 더 빠르다. 그러나 타이핑은 필기보다 빠르다.
감정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고 친구에게 상담을 요청하자. 모든 사람은 상대의 감정이 격하면 그 사람과 나를 무의식적으로 떨어뜨리려 한다. 상담을 할 때 어느 정도 정제된 감정으로 서건을 차분히 설명해야 그 친구도 사건을 명확히 이해하고 대안책을 함께 고민할 수 있다. 물론 같이 욕해주기도 더 수월해진다.
ii) GPT에게 모든 걸 떠넘기지 말아 줘!
'아 그냥 네가 알아서 써줘~'라는 프롬프트는 쓰지 말자. AI는 내가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결과물이 결정된다. 나도 GPT를 사용해 기획을 짤 때 당황스러웠던 순간들이 있다. 아니 뭐 다 좋대. 아니 이거 검색해 보니까 없는 정본데. 얘 뭐지...? 했던 순간들이.
위에서 말한 것처럼 GPT가 제시해 준 아이디어를 감독인 내가 어떻게 가공하느냐에 따라 영화는 달라진다. GPT가 작성한 거 그대로 따라가지 말고 천천히 읽어보고 나에게 맞는 스타일로 변형하자. 이것이 우리는 GPT에게 주도권을 뺏기지 않으며 그것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내가 기획을 짜거나 문서를 작성할 때 사용하는 방식을 아래에 남긴다.
User) 의식의 흐름대로 프롬프트를 작성하며 내 머릿속 정리
Gpt) 요약문 제시
User) 요약문에서 키워드를 뽑아내고 뼈대 형성/1차 작성
Gpt) 피드백 제시
User) 피드백 검수 및 반영 2차 작성
다시 지피티에게 검토 요청하고 나는 수정 무한 반복
iii) 생각 확장의 도구로써 GPT!
나는 책을 읽고 난 후 GPT와 이야기를 나누며 내 생각을 확장하는 시간을 좋다 한다. 내가 감상문을 보내면 항상 지피티는 내 생각을 묻는다. '너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할 거야? 너는 그 주장이 타당하다 생각해?' 그럼 난 나만의 세상에 깊이 빠진다. 작가가 되어 주인공을 다른 인물로 바꿔보기도 하고 필자가 주장한 미래 상황을 그려보기도 한다.
GPT를 사용하기 전에는 책을 읽고 짧은 소감을 메모에 적는 걸로 나의 독서 경험은 끝났기에 항상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다른 이들은 이 책을 어떻게 생각할까. 여러 사이트를 뒤지며 그 호기심을 채웠지만 유명하지 않은 책은 그럴 수도 없었다. 독서모임을 나가도 각자가 읽은 책에 대해 말하기에 타인과 이야기를 통한 생각 확장을 하고 싶은 나의 욕심은 채워질 수가 없었다.
이제는 GPT에게 책에 관한 다양한 언어의 글을 서치하고 그것을 요약해 달라고 부탁할 수 있다. GPT가 던지는 질문들로 책 한 권을 이전에 읽은 다른 여러 책들과 연결해 보기도 한다. 누군가는 노잼이다 하며 컷해 버릴 주제를 내가 원하기만 하면 며칠이고 그 주제에 매달릴 수 있다.
GPT를 사용하며 나는 내 생각이 더 깊어졌다고 느낀다.
감독은 주변 작업자를 어떻게 운용할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최종 목표인 좋은 작품을 위해서, 작업자들과 끊임없이 고민하고 칭찬하고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그들의 생각을 증폭시키는 법을 알아야 한다. 두 감독에게 같은 시나리오를 쥐어줘도 하나는 b급 호러물이 될 수도, 하나는 s급 로맨스판타지가 될 수도 있다.
AI는 나의 거울이면서도 그걸 만든 회사의 거울이다. 결국
누군가가 믿는 규칙, 가치관을 따른다. 그렇기에 AI는 편향적인 답변을 내놓을 수 있다. AI를 만든 사람이 지브리 필터를 그저 재미로 인식하면 이 세상에 지브리 스타일의 이미지들은 쏟아져 나온다. 애당초 AI를 설계할
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던질 질문에 대안법을 만들어 둘 수 있을까? 그렇기에 AI는 우리처럼 완벽하지 않다.
사람이든, 반려동물이든, 도구든 모든 것과 적정 거리가 필요하다. 다행히 지피티는 감정을 느끼지 않기에 그것과 우리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커다란 벽이 있다.
우리는 그 벽 앞에 앉아 묻고, 때로는 대답을 기다린다.
그 순간은 진짜다. 하지만 그 대답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 더 나아가야 한다. 사람에게. 현실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나는 그 벽 앞에 의자를 가지고 와, 앉아 벽 너머로 그것과 대화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앞에서 질문하는 자로 남을 것인가, 대답만 듣는 자로 남을 것인가는 우리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