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머리 & 따듯한 가슴

by 추성엽

1. 열정은 기회를 부른다


“이한결대리님, 신제품 보고서는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몇 개월 뒤에 출시할 신제품 이름을 확정하지 못해 고민하던 이대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음주 초에 1차 보고 드리겠습니다. 팀장님”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고, 가급적이면 초기투자 비용을 고려해서 달성 가능한 목표를 잡도록 해보세요. 이번에 출시될 신제품에 거는 경영진의 기대가 커서 부담입니다”

“염려 마십시오. 팀장님. 이번에는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지난해 출시했던 신제품이 기대했던 것과 달리 실패로 끝나서 그런지 이번에 출시하는 신제품에 팀의 명운이 달려 있었다. 이한결의 자신 있는 대답에 팀장은 웃으면서 말했다.

“일은 열심히 하는 것보다 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맞는 말이다. 회사는 과정보다 결과가 더 중요한 곳으로 특히 마케팅부서는 매출액이 곧 인격이라는 문화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입사동기가 이대리를 급하게 찾았다.

“야! 이대리,. 본부장님이 찾는다. 빨리 가봐라, 본부장님 성격 급한 거 알지?”

팀장은 빨리 가보라는 눈짓을 보냈고 이대리는 무슨 일인지 궁금해 총알같이 튀어갔다.

“이대리, 오늘 아침부터 홍보실이 왜 이리도 분주한지 아나?”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는데요?”

“이런 넋 빠진 놈. 내가 그렇게도 마케터는 주변의 환경변화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건만 이런 고급정보를 모르다니. TV방송국에서 내일 우리회사에 촬영하러 올 거다. 기업탐방 코너에 ‘신입사원 연수현장을 가다’라는 타이틀로 지금 연수원에서 진행하고 있는 신입사원들을 촬영하러 오겠다는구나”

직선적인 카리스마를 소유한 본부장은 평소에도 직원들을 직접 호출해서 허물없이 대화를 즐겼다. 그제서야 이대리는 방송촬영과 본부장이 부른 이유와 어떤 관련이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거기서 ‘신입사원과 선배사원과의 대화’라는 코너가 있는데 사업본부마다 선배직원을 1명씩 뽑아서 내일 연수원으로 보내라고 하는데 문제는 과장급 이상이란 말이지”

“그럼 저하고는 직접적인 관련이...”

“아니야, 다른 부서는 틀림없이 사장님이 지시한대로 과장급 이상만 보낼 거야. 그런데 생각해봐라. 그들이 가서 무슨 말을 하겠니? 앞에서 인사팀장도 지켜보고 있을 텐데. 다들 정치적인 답변이나 하고 오겠지. 그래서 우리는 허를 치는 거다!”

다른 부서와 차별화하려는 본부장 눈빛이 그날따라 예리해 보였다.

“우리는 이번에 과장급 이하를 보내는 거다, 너 입사한지 얼마나 됐지?”

“대리 3년차 입니다”

“벌써? 너는 회사에서 눈치 정도는 알아도 아직은 정치는 잘 모를 거고, 뒷일은 내가 책임질 테니 신입사원들 질문에 솔직하고 자신 있게 대답해도 된다”

“본부장님 저, 솔직히 자신 없습니다”

“알아. 네가 카메라 발은 안 바쳐주지만 헝그리 정신은 내 맘에 쏙 들거든. 일단 테스트 한번 해보자. 마케터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뭐라고 내가 가르쳤지?”

“100여명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요”

“왜지?”

“오케스트라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은 자신의 악기를 연주하는데 집중하면 되지만 지휘자는 모든 악기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재해석함으로써 자기만의 음악세계를 창조해내는 과정이 바로 회사에서 마케터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거다 너 참 맘에 든다. 내가 경력사원을 안 뽑는 이유가 바로 이 점이야. 똘똘한 신입사원을 뽑아서 내공을 전수시키면 그냥 쏙쏙 빨려 들어가기 때문이지. 뭐랄까 마치 하얀 도화지 위에 마치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래서일까? 본부장은 경력사원을 채용하지 않았다. 장기적인 측면에서 때묻지 않은 신입사원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평소에 그는 직장생활에서 처세술과 사람에 대한 태도는 직장생활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강조했다. 회사에서 일이나 업무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의 태도와 처세가 오히려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열정은 성공의 핵심적인 키워드로 자신이 맡은 업무에 대한 애정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사실 자신의 업무를 사랑하는 태도에서 열정은 발원한다. 그의 말처럼 직장에는 3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열정이 있는 사람, 열정이 없는 사람, 그저 적당히 그런 사람. 열정이 있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빛이 나고 어려움에 부딪혀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에너지가 있다. 열정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충전시켜주기 때문에 쉽게 지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끝까지 달릴 수 있게 도와준다. 반면 열정이 없는 삶은 김 빠진 맥주와 같다. 스스로도 재미없고 남들도 재미없다. 365일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사는 것은 똑같지만 열정을 가지고 사는 것과 그냥 사는 것은 삶의 질에서 큰 차이를 보일 것이다. 열정을 갖고 산다는 것은 삶을 누리며 살 수 있는 특권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너를 거기에 보내는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도 아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인지 본부장은 부드럽게 물어왔다.

“마케팅 PR을 잘 해서 신입사원들이 우리 부서로 대거 지원하도록 만드는 겁니다”

“브라보!”

본부장은 손뼉을 치면서 기뻐하며 이대리에게 신입사원들이 던질만한 질문과 대답하는 요령 등에 대해 몇 가지를 코치한 후에 갑자기 지갑에서 수표를 꺼내 내밀었다.

“오늘 일찍 퇴근해서 백화점에 가서 이걸로 넥타이랑 와이셔츠랑 칼라 배치해서 새로 사 입고 가도록 해!”

본부장의 성격을 아는지라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받아 들고 얼른 돌아서려는 순간 귓전에 들린 한마디에 이대리는 그만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참 생방송이다. 준비 잘해라!”

그날 밤 이한결은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퇴근하면서 백화점에 들러 사온 벽에 걸린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볼 때마다 그의 심장은 두근거렸다.

‘드디어 방송에 출연한다. 그것도 생방송으로 데뷔한다’

잠깐 눈을 부치고 새벽부터 거울을 보면서 연습에 들어갔다. 신입사원이 궁금해할 내용을 미리 생각해보면서 목소리부터 가다듬었다. 그는 차분한 마음으로 신입사원 시절을 떠올리면서 그들이 선배에게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일지 떠올려 보았다.

다음날 경기도 수원에 있는 그룹연수원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7:30분이었다. 촬영은 9시부터 시작될 예정이었는데 1시간 전에는 반드시 도착해야 한다는 인사팀장의 엄명과 수도권 교통도 예측을 불허했기 때문에 빨리 출반한 결과다. 이미 촬영장비는 준비를 대부분 마친 상태였고 마무리 작업으로 분주했다. 이대리는 난생 처음 보는 방송장비와 현란한 조명 그리고 카메라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촬영시간이 불과 20분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며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얼마 후에 PD로부터 간단한 주의사항을 전달 받고 바로 촬영에 들어갔다. 이대리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긴장한 상태에서 신입사원들의 질문이 서슴없이 날아왔다. 주로 회사의 인사정책이나 연봉, 부서별로 주로 하는 업무에 대한 질문이 많았는데 선배사원으로 함께 참석했던 다른 부서의 선배들은 인사팀장의 눈치를 보면서 적당히 회사의 입장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대답하자 분위기가 딱딱하고 자연스럽지 못했다.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대리는 자유로웠다. 무엇보다 뒤를 책임져준다는 든든한 본부장의 후원이 있었고 많은 준비를 했기 때문이다. 일단 이대리는 인사팀장의 눈을 피했다. 그리고 신입사원들이 원하는 대답을 그들의 눈 높이에 맞춰서 솔직하게 대답하기 시작했다. 특히 마케팅부서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열정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대리는 마케팅이라는 업무를 누구보다도 좋아하면서 즐겼던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일에 대한 열정(Passion)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바로 본부장이 자신을 이곳에 보낸 이유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처럼 열정은 목표를 향해 매진하면서 어떤 위기가 와도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는 집념인 것이다. 그때 정신이 번쩍 들만한 뜻밖의 질문 하나가 날아왔다.

“이 선배님께 개인적인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카메라가 재빠르게 질문한 신입사원을 잡자마자 리포터가 추임새를 넣었다.

“아니 이번엔 미모의 신입사원입니다 뭐죠?”라고 즉각 응대하자마자

“여기는 CC(Company Couple)가 많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그리고 선배님은 지금 혼자입니까?” 리포터는 재미있는지 한발 더 나아갔다.

“아 결정적인 질문입니다. 내가보기엔 애인이 없을 것 같은데 자 대답해주시죠”

이대리는 중앙카메라가 재빠르게 자신을 클로즈업하는 것을 느끼면서 일단 급조한 말을 날렸다.

“실제로 결혼까지 골인한 CC도 꽤 있습니다”

동시에 머리 속으로는 다음 말을 재빠르게 가다듬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리포터가 이대리를 거들어 주었다.

“CC로 결혼하면 회사에서 어떤 혜택이 있나요? 그리고 애인은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CC가 결혼하면 회사에서 크게 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제 옆에 앉아 있는 선배님도 CC랍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저는 아직 솔로랍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리포터는,

“우와~ 대단한 회사입니다. 그렇다면 애인이 없으니까 두 분이 한번 잘해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생각지도 못했던 진행자 제안이 둘을 향해 동시에 날아왔다. 질문했던 신입사원은 무척 당황해 하면서 언짢은 표정을 지었고 이대리는 재치 있게 대답했다.

“제가 솔로인 이유는 호랑이는 배가 고파도 토끼는 쳐다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퀸카를 만나지 못해서인데 저분 정도라면 OK입니다”

그의 답변은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면서 전국방송을 탔다.

다음날 인사팀장이 이대리를 찾았다. 인사팀장은 이대리에게 두툼한 봉투를 건네며,

“수고 많았다. 방송도 가장 많이 탔고 선배들이 모두 긴장해서 걱정했는데 너마저 얼었다면 우리회사 엄청나게 창피할 뻔했다. 하지만 그런 공개석상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진행할 때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굉장히 중요하단다. 그것은 우리 회사의 이미지이기도 하지만 바로 너 자신의 이미지기 때문이야. 약간 직설적으로 이야기한 부분이 조금 걸려서 그런다. 너도 조금씩 회사생활을 하다 보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게 될 거야. 아무튼 어제는 잘했고 이건 수고비다”

고맙다는 인사를 마치고 인사팀을 나와서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순간 누군가 이대리의 어깨를 잡으면서 말을 건넸다.

“야~ 어제 TV잘 봤다. 생각보다 카메라발 좋턴데?”

사내에서 TV로 봤다는 홍보실 선배였다. 사내에서 이대리는 어느덧 작은 영웅이 되어있었고 그날 만나는 동료들로부터 하루 종일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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