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은 사회적 행위를 해석적으로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그 행위의 경과와 결과를 인과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하나의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 막스 베버(Max Weber)
막스 베버(Max Weber)은 인간의 행위가 주관적이지만 여전히 인과적 설명이 가능함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이해'이다. 즉 우리는 어떤 사람이 왜 그러한 행위를 하게 되었는지까지의 과정을 '이해'해야 비로소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설명의 대상이 되는 행위가 논리적 사고에 바탕한 것이든, 이익에 의해 추동된 것이든, 가치에 의한 것이든 그 연원의 종류는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우리가 어떤 행위를 관찰할 때 '저건 비합리적인 행위야' 혹은 '이익을 위한 행위야' 같은 (최근에는 '합리적 의심'이라고 포장되는) 선입견으로 접근하지 않고 '왜 저렇게 됐을까'를 백지 상태부터 엮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지도 모르는 동기와 경로가 존재할 수 있으니까.
학부 시절부터 나는 계속해서 행위에 대해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도록 훈련 받았다. 아울러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지 알기 때문에, 내용적인 측면에서 자연스럽게 얼마나 사람이 다른지를 보여주는 작품들을 높게 평가한다. 요는 나의 편협한 독서나 영화 감상 등에 대한 비평이 이러한 토대 위에 존재하므로 이런 내용들의 작품들은 그저 높게 평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측면에서 '치히로 상'은 매우 인상 깊은 작품이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같이 다시 한 번 사람들이 이다지도 다르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영화였기 때문에. '개연성도 없으면서 그저 일본영화 감성이라고 치부하는 영화' 라는 한 줄 평이 계속 머리를 멤돈다. 어불성설이다. 한 편으로는 역설적으로 이러한 한 줄 평이 “우리는 다른 별에서 왔다”라는 대사를 잘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다른 별에서 왔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니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는 묘지가 따뜻한 공간임을 이해할 수 없었던 프란츠나, '치히로 상'에서는 오카지의 아빠와 같은 인간 군상.
그렇지 않은 작품들에 대해 '젠체한다'는 평들을 종종 마주치게 된다. 아마 우리가 현실에서 만나는 인간은 하나의 요소로 환원하기 어려운, 매우 구체적인 조합의 결과라는 사실을 잘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편견으로 판단하기엔 우리의 말의 의미들, 삶의 조합들은 너무나도 다양하다. 이 다양성을 포착하지 못하면 ‘다정한 무관심’, ‘사랑하지 않는 섹스’와 같은 단어는 이해받지 못하고 그저 젠체로만 보일 수도 있다. 아주 복잡한 의미들의 연결망의 현현인 사람을 마주하는 법을 까먹은 건 아닐까. 사람을 마주한다는 것은 나의 의미망이라는 렌즈로 재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의미망을 하나씩 발견해나가는 것. 따라서 사람을 실제로 마주하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마주하는 것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사람은 어떤 보편성의 화신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요소들의 특이한 조합의 현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이라는 그 특수성을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사회는 타인에 대해서나 스스로에 대해서나 이러한 삶의 방식의 다양성이나 구체성에 대한 이해가 충분할까?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실패가 곧 자살이라는 선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다른 별에서 온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이러한 측면에서 이 영화는 이전 세대와는 다른 오늘날의 사람들이 찾아가는 답을 보여주며 그렇기 때문에 발생하는 이전 세대와의 갈등을 슬쩍슬쩍 보여준다는 점이 흥미롭다.
특히 공존의 방식에 대해 '상대가 보여준 만큼만 대해주는 것이 한 방식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되살리게 하는 영화. 그것이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일지라도. 오늘날의 삶에서는 “앞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으로만 대해야 편한 관계도 있다. 공동체주의나 편협한 인생 조언이 놓치는 부분. 사회란 안전망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거미줄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본다면 자살이라는 선택지는 당연할 수 있다. 세상 어디에 있더라도 사람은 엄습해오므로. 하물며 오늘날과 같은 긴밀한 네트(net)의 세상에서는 더하지 않을까. 광대한 네트가 우리에게 준 건 자유와 무한한 확장일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끝없는 속박과 혼돈 속 자아의 상실일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의 자기의 성장이라는 것이 꼭 직업적 커리어나 (언제나 안타까이 베스트 셀러에 자리하고 있는) '자기 계발'만은 아닌 것 같다. 다들 행복하게 살아야지... 평화로운 삶 그 자체도 목적일 수 있다. 아울러 그 성장의 모습이 꼭 의도적 능동성일 필요도 없지 않을까 싶다. 요아스(Hans Joas)와 같은 의도적 수동성도 가능한 모습이다. 요컨대 흘러가는대로 놔둬 보는 것. 이런 것들이 현대 도시 생활에서의 두드러지게 등장하는 삶의 모습일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삶의 방식을 잡고 참아가는 것이 문화이자 미덕이었던 이전의 세대와 갈등은 피할 수 없을지 모른다.
요약하자면 타인에 대한 이해란 무엇이고 공존의 방식은 무엇일까라는 대한 주제 의식과 오늘날의 삶의 방식과 그에 따른 갈등들에 대한 은유가 좋다. 영화가 전체적으로 잔잔하지만 지루하진 않고, 화면 구성 역시 매우 아름답다. 아리무라 카스미도 매우 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