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돌부리를 넘는 법

2부 연립사람들

by 규아

민정이가 또래보다 빨리 운명의 실체에 눈을 떴던 건, 어쩌면 그 초가집에서 들었던 ‘팔자’라는 소리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민정이는 삼촌의 책장에서 《인생 12진법》이라는 해묵은 책을 발견했다. 동화책 대신 잘 모르는 한자와 단어가 빼곡한 그 책을 넘기며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열두 가지 흐름을 더듬었다.


몇십 년이 지나 다시 아무것도 없이 고향인 군산으로 떠밀려 왔을 때, 민정이는 그때 방울이네 집이라 불리었던 연화당을 회상하며 부둣가 어느 점집을 찾았다. 무일푼이 된 그녀에게 낯선 무당은 신을 받을 팔자라며 수천만 원에 달하는 굿판을 권했다. 하지만 민정은 더 이상 사탕 하나에 벌벌 떨던 연립주택의 아이가 아니었다.


“아줌마, 당신 참 잔인하네.” 민정의 차가운 일갈에 방울 소리가 멈췄다. “나 같은 사람 사정 뻔히 알면서,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이 얼마나 막막했으면 이런 미신이라도 붙들고 있겠나 싶어서 위로는 못 해줄망정 돈을 요구해요? 절망을 뜯어먹고 사는 게 당신네 신령님 뜻이야? 그게 악행이지 뭐야!”


무당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지만 민정이는 멈추지 않았다. 신령님이 노하든 말든, 이미 바닥까지 추락한 인생에 더 겁날 것은 없었다. “신령님이 정말 그렇게 용하면, 바로 이 문제들에서 빠져나오게 해줘 봐. 그럴 능력도 없으면서 돈 뜯을 생각부터 해? 굿판이 아니라 사람을 먼저 고쳐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민정이는 그렇게 한바탕 깽판을 부리고 점집을 나왔다. 무당의 세치 혀에 농락당했다는 분한 마음도 있었지만, 민정이 같이 절망에 빠진 이들이 또다시 저 감언이설에 속아 남은 재산마저 털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앞섰다. 그 길로 민정이는 인생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보았던 인생 12진법으로 시작한 사주 공부를 하며 민정이는 조금씩 알아갔다. 팔자라는 것은 결국 제 성격이며, 운명이라는 흐름은 내가 쌓아온 덕과 업의 결과라는 것을. 불행이 닥쳤을 때 우리가 매달려야 할 것은 요란한 굿판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내 성격의 어느 모난 부분이 삶의 돌부리에 걸렸는지 살피고 다듬는 것만이, 굴곡진 인생을 조금이나마 반듯하게 펼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민정이는 깨달았다. 그리고 이 엄중한 논리에서 남의 점사를 살피는 무당들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남의 불행을 진심으로 함께 아파하며 그들의 짐을 나누어지는 참된 영매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민정이가 마주했던 무당은 가장 절망에 빠진 이들의 꼬투리를 잡고, 그 간절함을 이용해 제 허기를 채우는 행위에 급급하여 결국 자신의 운명에 더 크고 날카로운 돌부리를 심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타인의 불행을 제 잇속의 수단으로 삼는 이들이 정작 제 집안의 풍비박산과 가난의 대물림 앞에서는 무력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들은 신의 목소리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은 악업의 굴레에 묶여 제 눈앞의 구렁텅이조차 보지 못하게 된 것이리라. 운명을 고치는 것은 요란한 굿판의 징 소리가 아니라, 제 업을 씻어내려는 정직한 참회뿐임을 그들은 끝내 알지 못할 수도 있다.


민정이는 이제 신당의 방울 소리가 무섭지 않다. 그것은 신의 위엄이 아니라, 제 팔자를 스스로 꼬아버린 자들의 슬픈 신음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게 민정이가 벼랑 끝에서 깨달은 운명이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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