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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여행자 May 31. 2018

글, 대통령에게 배운다

<週刊 태이리> 4호

뭘 물어봐도 척척 말해주는, 머리 큰 친구가 있었습니다. 별명이 ‘정답은행’이었는데, 하품하듯 ‘서울대’에 갔습니다. 모르는 게 없고 친절해서 도라에몽의 마법주머니 같았습니다. 회장님 말씀을 쓰다가 앞이 보이지 않을 때, 비밀노트가 하나 있으면 얼마나 든든할까요. 그런 친구가 내게도 생겼습니다.   

  

#1. 대통령의 말과 글

‘대통령의 말과 글’에는 ‘대통령 말씀’이 수시로 올라옵니다.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우리 선수들이 메달을 따면 어김없이 축하를 건넸고, 화재나 침몰과 같은 갑작스런 사고가 있을 때는 같이 슬퍼했습니다. 국가기념일은 물론 여성의 날, 바다의 날, 무역의 날, 경찰의 날에도 그 ‘말씀’이 꼭 있었습니다. 세계가 주목한 판문점 선언과 만찬 환영사도 그날 바로 언론과 동시에 여기에 공개됐습니다.  


말씀은 일주일에 서너 개쯤 올라옵니다. 스피치라이터가 ‘준비된 글’을 작성하기도 하지만, 현장에서 ‘나온 말’을 종종 녹취도 합니다. 한참동안 ‘말이 된 글’을 귀로 듣고 ‘글이 된 말’을 눈으로 읽다가 ‘참 잘 썼다’는 생각을 저절로 했습니다. 홍보인으로 14년, 3권의 책을 쓴 작가로 10년, 스피치라이터로 2년 살아온 나름의 소신으로 조심스럽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대통령 말씀은 ‘공짜’라 더 매력적입니다. 저작권 없이 누구나 열람과 저장이 가능합니다. 신문을 챙기지 않아도, 이것만 보면 국내외 이슈와 트렌드를 저절로 알 수 있습니다. 글쓰기 책을 따로 사거나, 참고자료를 찾느라 구글 신(神)께 기도드릴 일도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저는 지금 정치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대통령의 말과 글을 잘 배우면, 글쓰기 입문에서 심화반으로 점프할 수 있다”는 꽤 매력적인 제안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 연설문집은 해외문화홍보원에서도 내려 받을 수 있다.


#2. 쉽게, 말하듯, 정확하게

문재인 대통령의 말씀자료는 좋은 말과 글이 어때야 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첫째는 ‘쉽게 쓴다’는 겁니다. 쉽게 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짧게’ 쓰는 거고요. 그래야 문장이 뒤섞이지 않고, 앞과 뒤과 연결됩니다. “촛불은 위대했습니다(촛불집회 1주년)” “그것이 애국입니다(현충일)”처럼 때로는 단순하게 문장을 맺고 시작해야 합니다. 거기서 리듬이 생겨나고 속도가 붙습니다. 독자의 집중력도 생겨납니다. 그 중 하나가 ‘사운드 바이트(Sound Bite)’로 살아남게 됩니다. 사운드 바이트란, 눈에 잘 띄고 자막 처리하기 좋은 표현을 말합니다.    

▲ 사운드바이트는 ‘한 입 정도의 말뭉치’라는 뜻이다.

둘째는 ‘말하듯 쓴다’는 점입니다. 말과 글은 각자의 장점이 따로 있지만, 둘 중 하나를 꼭 선택하라면 ‘말’이 먼저입니다. 말은 글보다 생생하고, 감정이 실려 있고, 체온이 담겨 있습니다. 지금의 시대정신(Zeitgeist)에 딱 맞습니다. ‘장진호 전투 기념비 헌화사’에서 대통령은 자신이 실향민의 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솔직히 자신을 내 보이면, 글이 한층 더 생생해지고, 단어에 감정이 실리고, 문장에 체온이 담깁니다. 깊이가 달라집니다. 문 대통령은 그 흔한 “감사합니다”라는 외교적 수사 대신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사탕 한 알에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는 문장을 과감하게 선택했습니다. 이전까지의 연설문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새로운 시도라고 생각됩니다. 


셋째는 ‘사실대로 쓴다’는 겁니다. 이게 참 쉽지 않습니다. 글을 쓰다 보면 논리의 허점을 뭉개고 싶은 유혹이 듭니다. 게을러서일 수도 있고, 자료가 부족해 그럴 수도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순국 장소를 ‘하얼빈’이라고 잘 못 말한 박 前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는, 소통은 없고 최순실만 있었기 때문인 듯 싶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쉽고 흥미진진한 글이라고 해도, 그게 사실이 아니면 아무 쓸모가 없고 조롱받기 일쑤라는 것입니다. 화려한 거짓 수사보다 한 줄의 담백한 팩트가 더 아름답습니다. 물론 시, 소설, 수필, 희곡의 경우는 다를 수 있습니다.  

▲ 이렇게 자주 틀리기도 쉽지 않다.

   

#3. 연결하고 융합하는 훈련

저는 천재적인 글쟁이들이 참 부럽습니다. 소설가 한강의 찌를 듯한 감수성이 탐나고, 밀란쿤데라의 지성이 참을 수 없이 존경스럽습니다. <대통령의 글쓰기>를 쓴 강원국 교수의 위트와 깊은 경험은 훔치고 싶은 충동이 들 만큼 매력적입니다. 제가 습관처럼 질투하는 글쟁이는 몇 명 더 있습니다. 진중한 독서력을 뽐내는 <빨간책방>의 이동진, 외모만큼 거침 없는 말빨을 가진 <나꼼수>의 김어준, 자로 잰 듯 냉철한 논리를 지닌 <미학 오디세이>의 진중권, 할 수만 있다면 얼마를 주고라도 그들의 능력을 내 머리와 손가락으로 다운로드 하고 싶습니다. 김영하, 오쿠다히데오, 유발 하라리, 히가시노 게이고 등 질투의 대상은 국내외에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이런 SF적 고민을 하는 저와 같은 사람들에게 희망적인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정보를 주고받는 글은 연습하면 누구나 잘 쓸 수 있다” 지식소매상을 자처하는 유시민 작가가 한 말입니다. 제가 먼저 하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맞습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나 최명희의 <혼불>, 베르베르의 <뇌>와 같은 명작은 아무나 쉽게 쓸  없습니다. 노력해도 안 될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아, 정말 다행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습만 하면 자신이 원하는 수준의 글쓰기를 필요한 만큼 척척 해낼 수 있다는 말이니까요.

▲ 유시민 작가는 ‘글쓰기는 훈련’이라고 말한다.

레이건과 부시의 스피치라이터인 페기누난은 “가장 중요한 말은 늘 심플하다”고 말했습니다. “I love you” “It's over” 그리고 “Here & Now!” 네, 지금 여기부터입니다. 좀 초라해 보여도 내 밑천을 먼저 잘 살펴보셔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연결’하고, 내 경험을 세상의 것과 ‘융합’해야 합니다. 4차산업에서만 연결과 융합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말해 놓고 보니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것처럼, 너무 쉽게 이야기한 것 같아 좀 민망하지만 이게 글쓰기의 핵심입니다. 이젠 ‘선택과 집중’이 아니라 ‘연결과 융합’이 중요합니다. 제 부족한 자기고백이, 여러분의 글쓰기 실력을 한 뼘 정 키우는 데 작은 도움은 되길 바랍니다. 제가 당신의 좋은 글쓰기를 옆에서 응원하겠습니다. 


▮ 덧붙이는 말 ▮


1. <週刊 태이리>는  ‘한남동’ 에세이와 ‘글쓰기’칼럼을 매호 번갈아 연재합니다. 이 글은 제가 개인 발행한 매거진에 올린 것을 윤색한 것입니다.  https://brunch.co.kr/@30story


2. 처음 발행한 <아무나 모르는, 그 한남동>이란 글이 조회수 3만 3천뷰를 넘겼습니다. 무척 놀랐어요. 고맙습니다. 

 

3. 한남동에 대한 사소한 추억이라도 있으신 분은 언제든지 댓글로 제보해주세요. 한남동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준비 중인데, 흥미로운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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