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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사와 스피치라이터, 그리고 챗GPT

AI로 회사에서 글을 쓸 때 궁금한 것들

by 글쓰는 여행자

제 아버지는 한남동 우사단로와 종로 5가에서 20년 넘게 이발소를 운영하셨습니다. 학창시절 두발검사라는 걸 했는데, 저는 아버지 가게에 들러 머리를 잘랐습니다. 그런데 손님들이 아버지께 늘 하는 말이 “깔끔하게 잘라주세요” 이거더라고요. 아버지는 그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가위를 들었는데, 중학생이던 저는 ‘도대체 깔끔의 기준이 뭘까?’하는 궁금증이 계속 들었어요. 어떤 손님은 옆머리를 바짝 밀어야 깔끔하다고 말하는데, 다른 손님은 자연스럽게 숱을 남겨놓는 게 깔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스피치라이터를 미치게 하는 ‘불친절-긴급-모호’

글쓰기를 좋아하던 소심한 막내아들은 ‘국문과는 굶는 과’라던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방송작가, 기자 등 여러 직업을 고민하다 충무로와 종로에서 홍보인으로 데뷔했습니다. 회사를 대신해 보도자료를 쓰고, 회장님 자서전을 쓰고, 회사의 역사책인 사사(社史)를 편집하다가 지금은 신년사, 기념사, 취임사, 칼럼 등 그분의 온갖 말과 글을 맡아 쓰는 스피치라이터로 살고 있습니다. 비서실, 기획실, 연구원, 영업본부 등 수많은 팀 사람들의 수많은 피드백을 받아 ‘그분’의 글을 끝까지 마무리하는 게 제 일입니다.


제가 받는 지시의 대부분은 ‘불친절’하고, ‘긴급’하고, ‘애매모호’합니다. “내가 그걸 일일이 다 말해줘야 해? 그럴 거면 내가 쓰지!” “내가 개떡같이 말해도 너는 찰떡같이 알아듣고 잘 써 와야지!”라는 말은 기본입니다. 아침에 보냈으면서 점심 먹고 제출하라거나, 금요일 6시에 요청하면서 월요일에 보자고도 합니다. “감동적이면서 호소력 짙으면서 가슴을 울리는 짧은 글”을 써오라는 기괴한 요청도 종종 받는데, 숨이 막혀도 어떻게든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야 하는 게 제 밥값입니다. 그분의 말과 글을 쓰면서 머리가 깨질 듯 아플 때마다, 아버지의 밥벌이 고충은 또 얼마나 컸을지 생각하곤 합니다.


프롬프트는 ‘말로 하는 코딩’

검색의 시대가 가고 ‘질문’과 ‘요청’의 시대가 왔다고 합니다. AI에게 제대로 지시만 하면 무엇이든 척척 써낸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내가 쓴 글은 어딘가 부족하고 자꾸만 실망스러울까요. 문제는 도구가 아닌 ‘사용자’에게 있습니다. 주변에 ‘알아서 잘, 딱, 깔끔하게, 센스있게’ 써온 부하직원들이 있어서, 제대로 요청해보지 않은 겁니다. 만약 독자님이 사회 초년생 주니어라면 ‘팀장이 나한테 이 일을 어떻게 지시하면 일하기가 편할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프롬프트를 작성해보세요.


이런 걸 모르고 “감동적인 건배사를 써줘!”라고 GPT에게 요청하면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위하여!”라는 뻔한 답변이 나올지 모릅니다. 요청을 바꿔보세요. “전기차의 친환경성과 미래 비전, 그리고 파트너십을 강조하는 영어 건배사를 써!”라고 단호하고 구체적으로 지시하면 결과물이 확실히 달라집니다.


FIT한 프롬프트만 살아남는다

사람이 인공지능에게 입력하는 지시문을 프롬프트(Prompt)라고 하는데, 이건 단순한 대화나 수다가 아니라 ‘말로 코딩하는 설계도’입니다. 그리고 좋은 설계도는 세 가지 요건을 갖춰야 합니다.


첫째, 틀에 딱 맞춰(Format) 써야 합니다. 어제는 이렇게 물어보고, 오늘은 이렇게 물어보면 안 됩니다. 자유연상식으로 떠오르는 질문들을 조각조각 그때그때 물어보면, 원하는 답 근처에도 못 가고 대화는 빙빙 제 자리만 돌게 됩니다.


둘째, 시시콜콜(Include details)해야 합니다. 육하원칙에 맞춰 맥락, 예시를 입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자세히 설명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때까지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말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아무 것이나 쳐 박아두면 안 됩니다. 쓰레기를 넣으면 쓰레기가 나온다(Garbage in, Garbage Out)는 인생의 명언은 AI에도 그대로 적용되거든요. 엄선된 정보와 자료를 구체적으로 넣어야 합니다.


셋째, 명확하게(Tell clearly) 요청해야 합니다. 에둘러 풍자하는 충청도식 화법으로 “그렇게 급하면 어제 오지 그랬어유~”라고 말하면 챗GPT는 ‘어제 오지 못한 이유에 대해 분석합니다. 추상적 표현은 숫자로 바꾸고, 불필요한 존댓말은 빼고, 직관적으로 지시해야 합니다.


프롬프트 핵심은 구조화와 맥락설계

좋은 프롬프트의 구성요소는 이미 다 공개되어 있습니다. 핸드폰이나 자동차를 사면 사용설명서가 다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오픈 AI도 챗GPT 사용설명서를 이미 내놨거든요. 클로드 제작사인 앤트로픽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설명서를 제대로 읽지 않을 뿐이죠.


가장 간단한 건 RTF입니다. 역할(Role), 작업(Task),형식(Format)을 포함해 질문을 구조화하면 됩니다. 맥락(Context), 지시(Action), 결과(Result), 예시(Example)로 요약되는 CARE도 있습니다.

제가 추천드리는 구조는 ACTS입니다. 맞아요, 세제 이름하고 똑같아서 기억하기도 쉽죠. 역할(Actor), 맥락(Context), 작업(Task), 예시 또는 문체(Sample or Style)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장 표준화되고 일관된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밑줄 그어 놓으세요.


이때, 가장 중요한 건 맥락(Context)입니다. 이 글을 쓰는 이유, 글이 사용되는 장소와 시간, 새로운 정보와 이미 알고 있는 정보, 독자와의 관계, 독자의 배경지식, 글쓴이의 입장과 처지 등을 함께 알려주면 ‘맞지만 엉뚱한 글’을 써올 우려가 절반 이하로 확 줄어듭니다. 그래서 요즘은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이 아니라 ‘콘텍스트 엔지니어링’으로 개념이 점차 바뀌는 추세입니다. 콘텍스트 엔지니어링은 단순히 지시를 구체적으로 하는 방식을 넘어서 ‘맥락’을 정교하게 설계하는 작업입니다.


바보야, 문제는 너야! 챗GPT가 아니라.

30년 전, 이발사인 아버지는 손님들의 애매모호한 요청들을 경험으로 해석해냈습니다. 스피치라이터인 저는 눈치와 전문성으로 어떻게든 일을 해냈습니다.

하지만 뭐든 해낼 것 같은 생성형 AI도 사용자가 누구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내놓습니다. 그동안의 애매하고 급하고 불친절한 요청들을 구체적이고 계획적이며, 자세한 요청으로 지금부터 바꾸지 않으면 여러분의 AI는 계속 엉뚱하고 실망스러운 답만 꺼내 놓습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문제는 사용자에게 있지 도구에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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