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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여행자 Dec 13. 2018

회장님의 쿨한 퇴임사

<직장인이 쓰고, 말하고, 내책을 낸다> 제15호

아침에 단톡방이 시끄러웠습니다. ‘이거 봤어?’ 홍보인 50여 명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온라인 공간이 있는데, 여기서 글 한 편이 가 되었거든요. 코오롱그룹 이웅열 회장의 퇴임사입니다. 정치인도 아닌 기업인의 퇴임사가 한 때 실시간 검색어 1위까지 오르는 게 좀 의아했는데, 살펴보니 이유가 몇 개 있었습니다. 기존의 문법과 상식을 뛰어넘는 ‘특이점(Singularity)’이 퇴임사에도 찾아온 걸까요.   


#1. 청년 이웅열의 색다른 도전

기업인의 말씀은 보통 좀 딱딱한 인사로 시작돼 한 해 또는 지금까지의 성과들을 돌아보는 경영환경 분석으로 이어집니다. 곧바로 유가와 환율이 복잡하게 뒤섞인 글로벌 위기를 여러 번 강조하다가,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4차산업혁명’과 ‘디지털혁신’을 습관적으로 당부하기 일쑤입니다. 여러 말을 하지만 결국엔 “수익성 개선을 위해 전 임직원이 한 마음이 되어 마른 수건을 짜 달라”는 익숙한 레퍼토리로 끝맺습니다. CEO의 말씀에는 ‘개인’이 들어갈 틈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재미가 없고 반전도 별로 없습니다.   

▲ 뉴스포털과 소셜미디어에선 한 때 난리였다.

제가 볼 때 이 글은 좀 다릅니다. “여러분들에게 ‘회장님’으로 불리는 건 올해가 마지막이네요”라고 처음부터 강하게 운을 띄우거든요. 30대 그룹 총수의 퇴임이 갑자기 결정된 건 아닐 테지만, 메시지만 놓고 보면 꽤나 충격적이죠. 열 살 손녀딸이 운전기사에게 폭언을 한 것도 아니고 마약이나 불법승계, 횡령, 갑질에 휘말린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퇴임사에서 그분은 ‘기업인 이웅열’이 아닌, 정년을 마치고 회사를 떠나는 직장 선배로서 회사와 후배들을 살뜰히 걱정하며 자기의 인생을 담담하게 털어놓고 있습니다. 이건 분명 지금껏 쉽게 볼 수 없었던 모습이네요. 어르신들의 퇴임사에는 ‘내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 알아?’라는 허풍만 가득 담겨 있기 쉬운데, 그렇게 하지 않았네요. 그 진솔한 점이 우리네 직장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습니다.   

▲ 퇴임식하는 코오롱 이웅열 회장 (사진 출처 : 뉴스1)

아마도 작정한 모양입니다. “우물쭈물하다간 용기를 내지 못할까 두렵다”며 복잡한 감정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거든요. 평생을 회장으로 살아왔으니, 바깥으로 나가는 게 그분이라고 쉬울 리만은 없습니다. 물론, 평범한 직장인과 같을 수는 없겠. 그분은 “앞으로는 ‘청년 이웅열’로 돌아가 더 늦기 전에 창업을 하고 싶다”며 회사 바깥의 민낯까지 스스럼없이 보여줍니다. “까짓 거, 마음대로 안 되면 어떻습니까. 이젠 망할 권리까지 생겼는데요”라며 격식 차린 문어체가 아닌 일상의 말투로 이야기합니다. 심지어는 기업인의 금기어인 ‘망(亡)하다’라는 표현도 서슴없이 하더라고요.   


#2. 고백과 유머, 인간적인 매력

좀 흥미로웠던 부분은 난데없는 ‘금수저 고백’입니다. 새삼스럽죠. 그런데 오너 일가인 그분이 스스로를 금수저라고 말하는 건 자칫 의도와 다른 부정여론에 직면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페북이나 트위터, 혹은 기사 댓글에 ‘금수저 틀딱 개짜증’ ‘헐~ 대박! 육십 넘어 청년 뭥미?’ 뭐 이런 식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겠죠. 주변의 비서나 홍보실이 이걸 모를 리 없겠지만, 그분은 자신이 특별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돌려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뒤에 가려진 책임과 무게까지 탈탈 털면서 더 큰 공감과 인간적인 이해를 구합니다. “금수저를 꽉 물고 있느라 이빨에 금이 다 간듯하다”는 엄살 섞인 유머를 보며 피식 웃었습니다.   

▲ 금수저 흙수저론은 자칫 예민해질 수 있는 소재다.

‘취향 커밍아웃’도 꽤 재밌었습니다. 이웅열 회장은 “윤태규 씨의 ‘마이웨이’라는 노래의 가사가 마음에 딱 와 닿는다”고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도입부가 그분 상황과 딱 맞는 것 같습니다. “아주 멀리 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다 볼 것 없어, 정말 높이 올랐다 느꼈었는데 내려다 볼 곳 없네” 모두가 부럽다고 하지만 선택하지 않은 그 위에 올라선 오너 경영자, 나 혼자가 아닌 수만의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 앞만 보고 달리다가 인생의 절반을 훌쩍 돌고나니 어디선가 찾아오는 공허감. 쉽게 공감할 순 없을지 몰라도, 한번쯤 상상해 볼 수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입니다.    

▲  이 노래는 아마 한 동안 노래방 차트 1위에 오를 것 같다.

‘누구나 한 번쯤은 넘어질 수 있어 / 이제와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어/ 내가 가야 하는 이 길에 지쳐 쓰러지는 날까지 / 일어나 한 번 더 부딪쳐 보는 거야’라는 후렴구는 코오롱의 현재 상황과도 비슷합니다. 코오롱은 섬유와 화학 중심으로 사업 포트폴리오가 꽉 짜여 있는데, 이 분야는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나지도 않는 장치 산업입니다. 야심차게 추진하는 제약사업으로 승부를 보는 것도 쉽지 않고, 의류나 화장품 분야는 경쟁자가 워낙 많아 생각보다 만만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글을 보며, 임원 회식에서 목 놓아 노래 부르는 어느 60대 노신사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졌습니다. 회장님이 인간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다가온 겁니다.


#3. 그분의 이 말씀은 누가 썼을까

단톡방에선 코오롱 이웅열 회장의 퇴임사가 하루 종일 화제였습니다. 지인 중 한 분은 “그분의 문학적 감성이 그대로 묻어난다”고 평을 했고, 다른 분은 “역시 직접 쓴 글이라서 뭔가 찌릿하고 가슴이 짠하다”고도 말했습니다. 좀 삐딱한 다른 부류들은 ‘과연 이웅열 회장이 이 글을 직접 썼을까?’라는 의문을 품기도 했는데 저는 이쪽 편이었습니다. 이렇다 저렇다 몇 번이나 말을 주고받다가 ‘우리끼리 투표라도 해보자’거나 ‘코오롱 홍보실에 바로 물어보자’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습니다. 이 분들 네트워크면 언제든지 확인해 볼 것 같았습니다. 저도 한 두 다리 건너면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아요.     

▲ 코오롱 홍보실은 몇 층일까. 누가 어떻게 썼을까

저는 ‘스피치라이터’입니다. 그분들의 말씀을 듣고 쓰고 고치고 정리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분들의 말과 글은 어떻게든 전문의 손길이 닿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게 제 일이기도 하고, 소명이기도 하고, 세상이 잘 돌아가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중요한 말을 다른 사람이 써줬다고?’ 반문을 하시는 분이 많으실 수 있지만, 저는 오히려 ‘이렇게 중요한 말이기 때문에 그분 혼자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실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아마도 그분께서 일정 부분 구술(口述)을 했겠지요. 나머지는 그동안의 인터뷰나 신년사, 취임사, 현장 순시 말씀, 강의, 경영현안 자 같은 것들을 싹싹 모아 매끄럽게 채웠을 겁니다. 그게 ‘스피치라이터의 일’이니까요.

▲ 일드 <오늘은 일진도 좋고>의 한 장면이 의미심장하다.

CEO와 가장 가깝게 일하는 홍보인들이 모인 단톡방에서조차 ‘이웅열 회장님이 이 퇴임사를 직접 쓰셨나, 다른 사람이 썼나’를 다투는 걸로 봐서, 이 글은 일단 아주 크게 성공했습니다. 그것도 울트라 빅히트를 쳤죠. 스피치라이터가 그분의 캐릭터를 찾아드리고, 그분의 목소리를 오롯이 내고, 자신의 존재까지 완벽하게 감췄으니까요. 여기서 정말 중요한 건 누가 썼느냐가 아닙니다. 그 말씀은 쓰여진 것으로 존재하지 않고, 말해지는 것으로 생명을 얻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온전히 이웅열 회장님의 것입니다. 이웅열 회장의 퇴임사는 저 같은 사람에게 아주 좋은 자료가 될 겁니다. 이렇게 좋은 글들이 많이 나올수록, 스피치라이터의 역할은 점점 더 은밀하고 어려워지겠죠. 창업가로 다시 출발선에 서겠다는 ‘60세 청년 이웅열’에게 남몰래 박수를 보내며, 그분과 함께 하는 저 같은 사람들을 조용히 응원해 봅니다.    


▮ 덧붙이는 말 ▮ 

1. 혹시 이웅열 회장의 퇴임 소싯을 처음 듣는 분 계실까 싶어 관련 기사와 전문을 붙입니다. 찾아보기 귀찮으실까봐요.

https://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18&aid=0004261879


2. 곧 글쓰기 강의 동영상이 추가 될 것 습니다. 다시 알려드릴게요. 

https://www.happycollege.ac/story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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