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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여행자 Jan 30. 2019

투머치토커 박찬호의 글쓰기

<회사에서 글을 씁니다>

방송계 인물들의 이름 앞에는 짧은 수식이 으레 붙습니다. ‘지식소매상’ 유시민, ‘피겨여왕’ 김연아, ‘뼈그맨’ 장동민, ‘마요미’ 마동석, ‘테리우스’ 안정환. 심지어 유병재는 누런 이를 내세워 ‘황금 이빨’을 자신의 캐릭터로 만들었습니다. 별명은 그들의 존재감을 세상에 드러내는 수단이고, 자신만의 생존법일 겁니다. 여러분들도 회사 안팎에서 불려지는 특별한 애칭이 있으신가요? 명함 속 제 자리는 ‘스피치라이터’지만 회사 바깥의 이름은 ‘글쓰는 여행자’입니다.

   

#1. 공이 너무 빠르거나 말이 넘 많거나

1993년 LA 다저스에 입단하며 한국 최초로 메이저리거가 된 박찬호 선수의 별명은 ‘코리안 특급’입니다. 그의 전성기는 정말 화려했습니다. 30인치에 가까운 황소 허벅지가 돋보였고, 거기서 뿜어 나오는 강속구는 시속 160킬로미터를 훌쩍 넘었습니다. 수십억 대 연봉을 자랑하는 덩치 큰 타자들이 박찬호의 공을 맞히지도 못하고 삼진을 당했습니다. 한국의 야구팬들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대리만족을 느꼈죠.  

▲ 박찬호 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공을 던지고 있다.

박찬호 선수가 2012년 한화 이글스에서 은퇴하고 강연과 예능에 뛰어들었는데, 새로운 별명을 얻었습니다. ‘투머치토커(Too Much Talker)’ 감이 딱 오죠. 말이 너무 많은 사람. 포털을 검색하면 그의 별명과 관련된 ‘짤’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제가 LA에 있을 때 말이”로 시작해서 “내 말 알아들었어?”로 마무리하는 패러디가 등장했을 정도니까요. 박찬호는 예전에 ‘공이 너무 빠른 사나이’였는데 요새는 ‘말이 너무 많은 아저씨’로 이미지가 조금 달라졌습니다.    

▲박찬호 옆 리퍼트의 9회말 모습, 귀에 피가 난다고.

‘투머치토커’라는 별명을 들어 본 적이 있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말이 너무 많다고요? 전 인정할 수 없어요. 질문을 하니까 답을 하는 뿐인데, 저더러 말이 많다고 하죠. 어쩌고 저쩌고 블라블라.” 화면이 빠른 속도로 한참 편집돼 지나갔는데도 그는 대답을 이어 갔습니다. “제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음, 저는 꼭 필요한 조언만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꼭 필요한 말이 자꾸만 생각납니다. 꼭 필요한 말인데 안 할 수가 없죠. 이게 다 꼭 필요한 말이니까. 왜냐하면. 흠, 그게.”  


#2. 좋은 글을 쓰는 3+1원칙    

“말이 많다”는 표현은 대체로 부정적인 뉘앙스를 동반합니다. 호흡이 지나치게 길거나, 같거나 비슷한 말을 반복하거나, 목소리 톤이 일정하고 지루하면 “말이 많다”는 소리가 나옵니다. 정확하지 않은 팩트를 확인도 없이 대충 내놓거나, 모호한 표현을 남발하거나, 여기저기 논리가 삐걱거리는 말을 듣는 건 피곤한 노동입니다. 관심 없는데도 혼자 신나서 전문용어를 계속 늘어놓는 사람을 보는 건 짜증나는 일이고요.

▲ 단순히 말이 많아서 수다쟁이인 건 아니다.

박찬호의 말에는 ‘최초’ 타이틀을 달고 한국 야구의 역사를 새로 쓴, 그만의 특별한 에피소드와 후배들을 위하는 진정성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도 귀에 안 들어오고 버겁다면, 그건 콘텐츠를 다루는 ‘방식(way)’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만약 박찬호 선수가 글을 써야 한다면, 저는 이렇게 알려 주고 싶습니다. ‘짧고(Short), 쉽고(Easy), 운율 있게(Rhyme)’ 그리고 ‘정확하게(Exactly)’ 써야 한다고요. 좋은 글을 쓰는, 3+1 원칙입니다.  

▲ 생각한 것을 그대로 한 번에 쓰는 건 판타지다.

가장 중요한 건, 짧게 쓰는 겁니다. 길어지면 중언부언하게 됩니다. 같은 단어를 한 문장 안에서 다시 쓴다는 건, 생각이 얇고 어휘가 가난하다는 고백입니다. 짧게 쓰는 건 간단합니다. 일단 다 쓰고, 나중에 다 빼는 거죠. 꼭 남겨야 하는 건 생각보다 얼마 없습니다. ‘글 좀 쓴다’는 분들은 그렇게 여러 번 고쳐서 겨우 글을 내놓습니다. 붓 한 번 휘둘러 순식간에 써 내려가는 ‘일필휘지(一筆揮之)’는 무협지에 나오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3. 쓰듯 말하고, 말하듯 쓰고    

짧게 쓰면 ‘저절로’ 쉬워집니다. 군더더기 빼고 주어와 서술어를 일치시키고, 쓸 것과 쓰지 않아도 될 것을 가리게 됩니다. 알고 있는 걸 자랑하려고 함부로 전문용어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독자를 생각하며 가장 궁금한 핵심을 찌르게 됩니다. 쉽게 쓰려면 ‘원숭이 똥구멍’을 기억하는 게 좋습니다.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절한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조금씩 올라가야 합니다. 처음부터 “원숭이 똥구멍은 백두산”이라고 말하면 공감이 안 됩니다. 쉬운 글은 앞 문장과 뒷문장이 딱딱 맞고 서로를 척척 끌어줍니다.

▲ 말 잇기 놀이에는 글쓰기의 비법이 숨어 있다.

짧은 글은 쉽고, 그 안에 ‘운율’이 있습니다. 읽을 맛이 납니다. 글의 외형률(外形律)은 ‘글의 구성’입니다. 서론, 본론, 결론. 기-승-전-결. 주장, 이유, 예시, 강조. 첫째, 둘째, 셋째. 이런 식으로 글을 디자인하면 그 모양에서 운율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패턴에 익숙하거든요. 내재율(內在律)은 호흡과 발음입니다. 시조에 보면 3-4-3-4 / 3-4-3-4 / 3-5-4-3 이런 식으로 글자 수가 딱 정해져 있어요.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소리로 읽어 보면 알게 됩니다. 독자들은 작가들이 잘 짜 놓은 그 리듬을 흥얼거리며 따라갑니다.

▲ 구글에 없는 것은 세상에 없다.

글은 정확하게 써야 합니다. 순수문학과 영화는 예상 못한 반전이 있고 조금 애매하게 써도 될지 모릅니다. 우리 같은 직장인이 자신의 생각을 담는 글, 업무 전문성을 정리하는 글은 그렇게 쓰면 안 됩니다. 오로지 ‘팩트(Fact)’와 험(Experience)로 승부해야 합니다. 아는 것만 쓰고, 모르면 구글신께 바로 여쭤보세요. 그래도 잘 모르겠으면 쓰지 않는 게 맞습니다. 이것만 잘 지켜도 ‘이것도 글이냐?욕은 안 먹습니다.

▲ 나만의 아이덴티티를 만들고, 즐겁게 쓰자.

글쓰기에는 오랜 명언이 있습니다. “쓰듯 말하고, 말하듯 써라!” 말은 생생하고 익숙하며 친숙하지만, 투박하고 틀리기 쉽습니다. 글은 고칠 수 있고 논리적이지만 딱딱하고 지루합니다. 좋은 글은 말과 글을 넘나들어야 합니다. 오늘 알려드린 3+1의 원칙이 복잡하면 이것만 기억하세요. “쓰듯 말하고, 말하듯 써라!” 여러분의 별명이 ‘글쓰는 ○○○’였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글쓰는 여행자’ 정태일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덧붙이는 글

▮ 덧붙이는 말  


1. 이 내용은 책 <회사에서 글을 씁니다>로 출간되었습니다. 더 많은 내용은 책에서 확인해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89148567?scode=033&ReviewYn=Y


2. 휴넷 해피칼리지 무료 강의를 함께 보시면 글쓰기에 도움이 됩니다.

https://www.happycollege.ac/student/courseIntroduce?Process_Code=HC00000410#


3. 제 대학 시절 별명이 ‘박찬호’였습니다. 닮았는지 아닌지는 여러분들 판단. 비슷한 구도 찾아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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